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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뉴 Jul 24. 2023

안녕, 나의 냉장고!

마침내 사달이 나고야 말았다.

'바꿔야 한다'는 짝꿍의 주장을 애써 외면하며 꽤 오랜 시간을 잘 버티고 있었건만, 작별의 시간은 어느 날 갑자기, 생각지도 못한 순간에 찾아왔다.



14년이라는 시간 동안 묵묵히 버텨 준 냉장고였다.

비록 몇 해 전 컴프레셔를 바꾸긴 했지만 그 외 딱히 문제를 일으킨 적은 없었다.

그러다 며칠 전. 한동안 경고음을 발하더니 냉장고 안이 어둠 속에 잠겼고, 녀석이 품고 있던 음식들은 냄새를 풍기며 썩어가기 시작했다.



컴프레셔가 고장을 일으켰을 때는 부품만 갈면 되는 문제였다.

그런데 이번엔 손 쓸 도리가 없었다. 누전을 일으키며 아예 냉장고 전원이 나가버렸기 때문이다.

쓰라린 마음을 부여잡고 정성스럽게 쟁여 놓은 많은 식품들을 내다 버려야 했다.



알고 있다. 냉장고의 건강수명이 7년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을.

사람의 건강수명이 73세 정도라고 하니, 14년도 더 전에 만들어진 녀석은 사람으로 치자면 100세도 훨씬 넘은, 19세기에 태어난 인간에 견줄 수 있을 것이다.



그래도 가능한 오래오래 같이하고 싶었다. 짝꿍과 나와 새로운 삶을 함께해 온 녀석과.

마트에 갈 때마다 감각적인 자태를 뽐내던 신형 냉장고에도, 잊을 만하면 그럴싸한 논리를 앞세워 ‘새 냉장고' 타령하던 짝꿍 앞에서도 내 마음이 결코 흔들리지 않았던 이유는 그래서였다.



물론, 새로운 것이 주는 신선함과 반짝임을 나도 좋아한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이 녀석을 떠나보낼 수 없었던 건, 녀석 위에 정겹게 자리 잡고 있는, 아이들의 손때 묻은 스티커들과 그것들이 품고 있는 추억들 때문이었다. 이제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아련한 시간이 깃들어있는.




녀석은 2000년대 후반, 냉장고 유행의 선두를 달렸던 ‘지*’의 앙드레 김 시리즈 중 하나다.

눈부시도록 하얀 바탕에 파스텔톤의 큼지막한 핑크 꽃무늬가 돋보이는 모델이다. 지금은 다소 촌스러워 보이기도 하는 디자인이지만 당시에는 신혼부부들이 갖고 싶어 하던 냉장고계의 ‘워너비’였다.



설렘 가득한 마음으로 맞이했던 냉장고는, 갓난아이의 울음으로 잠 못 이루던 밤이면 내가 의지할 곳이 되어주었다. 녀석의 온도 표시계에 들어오는 불빛을 작은 등불 삼아, 그 앞을 수십 번도 더 오가며, 품 안에서 우는 아이를 달래고 밀려드는 잠을 나는 버텨냈었다.



냉장고는 아이들이 유아였던 시절, 유용한 키재기 기구로, 때로는 큼직한 스케치북이자 메모판으로 팔방미인처럼 활약하며 존재감을 키워갔다.

시간이 지날수록 각종 그림과 스티커들로 본래의 단정한 모습은 잃어갔지만, 녀석은 대체불가능한 우리 집의 구성원으로 변신에 변신을 거듭했다.



그 시절을 거쳐오며 어느 순간부터인가 냉장고가 살아있는 생물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처음 우리 집에 왔을 때는 그저 평범한 사물이었던 녀석이 생명체로 다시 태어나기라도 한 것처럼.

그렇게 생명력을 키워가며 아이들의 손때 묻은 스티커들을 오래도록 품어준 녀석이, 불현듯 움직이기를 멈추고 완전한 정적과 어둠에 잠겨버린 것이다.



냉장고가 내게 말하는 것 같았다.

이제는 내 소임을 다했다고. 단지 부품 따위 가는 것으로 더 이상 생명을 지탱할 수 없노라고.

그러니 이제 새 친구를 맞이하라고.

이별은 힘들겠지만, 이별이 없다면 새로운 시작은 결코 올 수 없는 것이라고.



결국 눈물을 머금고 새 식구를 들이기로 했다.

신박하고, 모던하고, 심지어 광활한 공간을 자랑하는 녀석으로.

새로 온 녀석은 날렵하고 멋져 보이지만, 어쩐지 아이의 자리를 꿰차고 앉아있는 것 같아 얄미워 보이기도 한다. 그래도 이 녀석과 또 새로운 정을 쌓아나가게 될 테지….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곳에 남겨두고 오래도록 기억하고 싶다. 제 역할을 다하고 조용히 우리 곁을 떠나간 그 녀석을.

이런 나와 달리 짝꿍은 기쁨으로 충만해 보인다. 본인의 오랜 숙원 사업을 완수하였으니 그럴 법도 하겠지만.

할인을 핑계로 냉장고와 함께 세탁기까지 세트로 갈아치웠으니 기쁨이 배가되기라도 한 걸까?

짝꿍이 뒤돌아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을 것만 같다.

어쩐지 패배자가 된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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