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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뉴 May 07. 2022

첫 만남

엄마, 피아노 학원 등록하면 앵무새 준대. 나 학원 다닐래!!

어느 날 학교를 마치고 돌아온 첫째가 들뜬 목소리로 부르짖었다. 이게 자다가 무슨 김밥 옆구리 터지는 소리란 말인가? 내게 앵무새는, '옛 왕실에서 키우던 귀한 새'라는 인식이 있었다. 요즘 들어 반려조로 앵무새를 키우는 인구가 늘어간다고는 하지만, 우리가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비둘기, 참새, 박새,  직박구리 등과는 차원이 다른 몸값 비싼 아이들이라는.... 알게 모르게 나 스스로 새들에게 '계급'을 부여하고 있었나 보다.

아이 말로는, 요 며칠 어떤 아저씨 한 분이 교문 앞에서 귀여운 앵무새를 데리고 와서 피아노 학원 홍보를 한다고 했다. 매일 학교 앞을 동행하는 새들이라면 그리 건강하지 못하겠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만 왠지 한 번 보고 싶은 마음도 들었다. 내게 아직 '동심'이 남아 있어서일까?    


그러나 내가 처음부터 아이 말에 마음이 동했던 건 아니다.

  “앵무새 키우고 싶어서 학원 다니겠다는 건 안 돼!”

  “꼭 그런 건 아니야!”

‘꼭’이라는 아이의 말 한마디가 영 미심쩍었다. 그렇게 며칠이 흘러갔고, 아이는 혹여나 등록이 마감될까 조마조마해하며 보채다, 나를 설득하기를 반복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도대체 학원비가 얼마나 비싸기에, 무슨 숨겨진 꿍꿍이가 있어 간 크게도 앵무새를 무려 등록 '사은품'으로 주겠다고 홍보하고 있나,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이 학원의 홍보 전략이 아이들에게도 학부모에게도 제대로 먹히고 있는 것 같았다.     


문득 내 초등학교 시절, 학교 교문 앞 상자 속에서 하굣길 아이들의 마음을 훔치던 샛노란 병아리들이 생각났다. 부모님이 집에서 병아리 키우는 걸 허락해줄 리 만무했고, 혹여 운 좋게 집에서 키울 수 있게 된다 해도 녀석들이 건강한 닭으로 클 수 있는 확률은 낮다는 사실을 어린 나이에도 난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녀석들을 마주치는 날이면 학교 앞에서 차마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평소라면, 학교를 마치자마자 빛의 속도로 집으로 달음질쳐갔을 텐데 말이다. 그 기억을 떠올리니 아이의 마음에 내 마음이 포개어지며 일단 한번 학원에 가볼까, 하는 생각이 스멀스멀 들기 시작했다. 나쁜 게 아니라면 뭐든 스스로 배우겠다고 하는 마음은 응원받을 만한 거니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아이에게 한 가지 다짐을 받았다.

   "앵무새 때문에 등록하고, 학원 잠시 다니다 그만둔다 그러면 안 돼! 못해도 일 년은 열심해 배운다고 약속하면 보내줄게."

  "응. 약속할게!"

  "정말이지?!"

  "그렇다니까!!"     


아이와 함께 아파트 상가에 자리 잡고 있는 피아노 학원으로 향했다.

등록을 하러 왔다고 하니 학원 홍보를 담당하고 있는 듯한 한 남성이 우리를 상담실로 안내했다. 잠시 기다리고 있으니 그는 여러 가지 등록 사은품들을 양손 가득 들고 돌아왔다. 그의 손에는 문화상품권, 미니 게임기, 구* 플레이 카드 등 아이들이 혹! 할 만한 물건들로 가득했다. 학부모인 내 입이 떡 벌어지려 했다. 아이는 둘째 치고, 내 눈이 이리저리 사은품 사이를 오가며 신나게 방황하고 있었다. 요즘은 학원 홍보도 참 거창하고 전투적으로 한다는 생각을 하며.

  "전 앵무새 갖고 싶은데, 앵무새는 어디 있어요?"

사은품을 살펴보던 아이가 살짝 실망한 듯 그에게 물었다. 아이의 말에 나는 정신이 번뜩 들었다.

  "아, 그래? 그럼 잠시만 더 기다려봐."


5분쯤 지나자 그가 새장 속에 앙증맞게 자리 잡고 앉아 있는, 하늘빛을 품은듯한 앵무새 한 마리와 함께 돌아왔다. 그 순간 나는 직감했다. 이제 학원 등록은 돌이킬 수 없는 사실이 되었음을. 지극히 자본주의적인 목적으로 어리고 여린 생명을 이용한다는 사실이 맘에 들지 않으면서도 나는 어김없이 그 어여쁜 생명체에게 첫눈에 마음을 홀딱 빼앗겨버렸고,  내 손은 이미 지갑을 열 준비를 하고 있었다.   

   

등록을 마친 후 우리는 즐거운 마음이 되어 새로운 가족이 된 앵무새와 함께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집에 오자마자 녀석에게 이름을 붙여 주었다. 구름을 닮았다 하여 '구르미'라고.... 그 당시 우리는 구르미가 몇 살인지 알지 못했다. 우리가 알고 있었던 사실은, 구르미는 앵무새 중 가장 작은 종에 속하는 '사랑앵무'라는 것과, 학원 홍보를 위해 한동안 고달픈 시간을 보낸 아이였다는 것이었다. 그래서였을까, 구르미는 오랜 시간 우리와 함께 하지 못하고 보름여 만에 구름 위 하늘나라로 떠났다.          

구르미가 떠난 날 아이들은 울부짖으며 절규했다. 엄마가 갔어도 저토록 서럽게 울었을까 싶을 정도로.          


우리는 차마 버티지 못하고 또 다른 앵무새를 분양받았다. 흔히 '앵아치-양아치 앵무새'라고 불리기도 하는 씩씩한 모란앵무를. 그리고 몇 년째 우리 집엔 새들이 함께 살고 있다. 녀석들은, 평일과 휴일을 가리지 않고 아침이면 지저귀는(?) 소리로 어김없이 잠을 깨우고, 우리가 밥을 먹고 있을 때면 밥상머리를 열성적으로 기웃거리며-자신의 본분을 잊고 점점 '생식'이 아닌 사람들이 먹는 '화식'을 탐내고 있다-, 바람 소리를 내며 신나게 거실 위를 날아다니기도 한다. 하루에도 십수 번씩 녀석들이 싸 대는 똥을 치우느라 때론 좀 귀찮아지기도 하지만, 이제 아이들의 지저귀며 날갯짓하는 소리가 없으면 집이 죽은 듯 적막강산이 될 것 같다.     


그러고 보면 인연은 생각지도 못한 우연한 기회에 시작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그 인연의 끈이 얼마 동안 이어질지는 아무도 알 수 없겠지만, 소중하게 지속되는 인연은 우리에게 그 어디에서도 얻을 수 없는 많은 것들을 선물해준다. 그 인연이 비록 여리디 여린, 작은 생명체와 이어진 것이라 해도 말이다.


생각지도 못했던 앵무새와의 행복한 동거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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