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비로운 마음을 구걸합니다
그 도로 건너편 인근에서 자취했던 나는 학교를 가기 위해 매일같이 그곳을 지나가야 했다. 도로에 횡단보도가 있긴 했지만, 강의 시작 시간이 다 되어서야 헐레벌떡 학교로 달려가곤 했던 내게, 신호가 바뀌기를 기다려야 하는 도로 위보다 단 1분이라도 등교 시간을 앞당길 수 있었던 지하도가 더 친숙할 수밖에 없었다.
'백원만' 아저씨는 그곳의 터줏대감이었다. 내가 학교에 첫 등교하는 날부터 있었으니, 아마도 내가 입학하기 오래전부터 아저씨는 지하도의 주인장으로 지내왔을 것이다.
사실, 아저씨의 진짜 이름을 나는 알지 못한다. 아저씨가 (아저씨를 목격한) 학생들에 의해 '백원만 아저씨'로 명명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뿐, 그 외 아저씨의 신상에 대해서 내가 알고 있는 사실은 없다.
아저씨의 이름이 ‘백원만’이라 불린 이유는, 아저씨가 자신의 영역인 지하도를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항상 '백 원 마안~!!'이라고 외쳤기 때문이다. 마치 통행료라도 받아내겠다는 듯이.
처음 아저씨를 맞닥뜨린 날, 십 년은 더 넘게 씻지 않았을 것 같은 외양과, 말로 이루 표현하기 힘든 쿰쿰하고 찌든 냄새에 나는 인상을 찌푸린 채 최대한 멀찌감치 떨어져서 지나쳐 갔다. 아저씨가 나를 보며 뭐라고 외치든 말든 간에.
그런데 역시 사람은 적응의 동물인 건지, 어느 순간인가부터 그런 아저씨가 별 다를 것 없는 내 일상의 한 부분이 되었다. 급기야 나는 아무렇지 않게 아저씨의 시커멓게 때로 물든 손으로 내 손을 가까이 들이밀며 백 원을 건네는 행인이 되었다. 아저씨는 절대 '고맙다!'란 말을 하지 않았다. 그저 씨익~, 의미심장해 보이는 미소를 지어 보일 뿐이었다. 아저씨의 "백 원만!!"이란 세 글자 외침에는 그 어떤 주저함도 비굴함도 없었다. 누구보다 우렁차고 씩씩한 목소리였다. 과히 그 지하도의 주인장이라 할 만한 당당한 태도였다.
아저씨는 일 년 내내 같은 옷을 입고 같은 모자를 쓰고 있었다. 본디 색이 어땠었는지 도통 알 수 없는, 무릎까지 내려오는 두툼한 점퍼에 기름진 머리를 어설프게 감싸고 있던 털모자를. 물론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여름날이면 외투를 한 꺼풀 덜어냈고, 외투 안에 자리하고 있던, 역시나 원래 빛깔을 잃은 티셔츠와 바지를 드러내 보였지만, 같은 옷을 사시사철 입고 있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다.
신기하게도, 코끝을 찌르는 구린 냄새와 초라한 행색에도 불구하고, 아저씨에게는 지하도에 밝은 기운이 서리게 하는 힘이 있었다. 당시에는, 그 묘한 분위기와 그에 반응하는 내 기분이 나로선 아리송했지만, 아저씨가 사라진 이후에 나는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밝음'을 만들어낸 가장 큰 힘은 아저씨의 당당함이었다. 사람을 가리지 않고 씩씩하게 건네던 그 외침 속에 묻어나던.
백 원만'이라는, 아저씨의 단골 표현은 그 자체로 행인들에게 던지는 '인사'였다. 아저씨를 처음 보는 이들에게는 그저 단순한 '구걸'처럼 비쳤을는지 모를 그 세 마디가, 나에게는 어느 순간부터 다정한 인사처럼 들렸다. 어쩌다가 아저씨가 보이지 않는 날이면, 그래서 '백 원만!'이라고 힘차게 건네는 말을 듣지 못하는 아침이면, 어쩐지 학교로 향하는 내 발걸음이 가볍지 않았다. '아저씨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걸까?' 하는 걱정마저 들었다.
아저씨는 이런 내 근심을 알아차리기라도 한 듯, 그다음 날이면 제 자리로 돌아와서는 눈을 마주치며 어김없이 '백 원만!'이라고 인사를 건넸다.
이따금 아저씨에게 백 원을 전해주는 행인들을 보며 나는 생각했다. '왜 굳이 백 원일까? 오백 원도 천 원도 아니고...' 아저씨에게 동전을 건네던 대다수 행인들의 손에는 정말로 '백 원'만 쥐어져 있었다. 아무리 '티끌 모아 태산'이라고는 하지만, 나는 그렇게 열심히 모아봐야 밥값이나 제대로 나오려나, 하는 오지랖이 앞선 염려가 들곤 했다.
그런데, 곰곰이 돌이켜보니 아저씨는 실로 똑똑한 사람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큼지막한 오백 원짜리 동전은, 그래도 명색이 지폐인 천 원은, 그저 지나치는 행인이 기꺼이 건네기엔 다소 부담스러울 수 있는 금액인 것이었다. 평소에 하릴없이 사람들 주머니 속을 굴러다닐 법한, 기꺼운 맘으로 내어줄 수 있는 가장 이상적인 금액이 (십 원도 오십 원도 아닌) 바로 백 원이었다! 백 원이라는 금액은, 아저씨 나름대로 철저히 계산해 고안해 낸 '박리다매'를 위한 효과적인 수단이 아니었을까.
내가 목격한 바로는 실제 꽤 많은 사람들이 아저씨에게 백 원을 전했다. 그 지하도를 지나다니는 행인들 수를 생각한다면 하루에 대략 50명가량의 사람이 아저씨의 '백 원만 행렬'에 동참했을 테고, 개중엔 더러 지폐를 건네는, 자비로운 마음의 천사 같은 이들도 있었으니, 하루에 만 원은 가뿐히 넘게 수익을 올리지 않았을까, 나는 추측한다.
당시 대학생 과외 알바로 한 달에 30만 원 정도 벌었던 걸 고려한다면, 아저씨의 수입은 웬만한 알바만큼은 되었을 터였다.
그런데, 그렇게 일 년 넘게 (나 홀로) 정들어가던 백원만 아저씨가 어느 날부터인가 보이질 않았다. 한창 인근에 재개발이 들어가니 어쩌느니 말들이 무성한 시기였다.
나는, '동네 이미지에 해를 끼친다고 재개발 업자들이 미리 아저씨를 쫓아내기라도 한 걸까?' 하는 질문과 함께, 아저씨가 정들었던 이곳을 떠나 어디에서 어떻게 지내고 있을지 몹시 궁금해졌다. 며칠이 지나면 그전처럼 아저씨가 다시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돌아오지 않을까, 기대했지만 그 이후 나는 아저씨의 모습을 더 이상 볼 수 없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내 궁금증은 점점 걱정이 되어갔고, 나는 급기야 아저씨가 혹시 유명을 달리한 건 아닐까, 하는 생각에까지 이르렀다. 그즈음, 공중파의 한 재연 프로그램에서 '자신의 묵은 발냄새에 중독된 노숙자가 사망했다'는, 믿거나 말거나 하는 영상을 보고 난 후 내 걱정은 증폭되어 갔다 (한 곳에 생각이 깊어지다 보면 걱정으로 흘러가는 경우가 잦은 듯하다).
그러던 차에, 친구로부터 위로가 되는 이야기를 들었다. 내가 아저씨에 대한 걱정을 토로하자 친구는 기가 차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야! 그런 사람들이 알고 보면 우리보다 더 부자일 수도 있어. 내가 들었는데, 지하철에서 물건 판매하는 사람들 중에 외제차 끌고 다니는 경우도 있다더라. 지하철에서 그날의 판매가 끝나면, 지상에 주차되어 있는 자신의 외제차를 끌고 유유히 집으로 사라진다던데?…”
믿거나 말거나, 그 친구의 이야기에 내 걱정이 조금은 덜어진 게 사실이다.
친구의 말처럼 잘 살고 있으리라 여기며 오래도록 잊고 지낸 백원만 아저씨가 최근에 다시 생각난 이유는, 내가 생애 처음으로 준비하고 있는 '(출판) 프로젝트' 때문이다.
공모전에 도전하고 출판사에 - 비록 많은 곳은 아니었지만 - 투고도 해보며 내가 내린 결론은, 아무래도 내 이야기는 '독립출판'을 하는 게 맞겠다는 거였고, 나는 출판 크라우드 펀딩으로 잘 알려진 '텀블벅'을 통해 내 책을 이 세상에 내어놓아보자고 마음먹었다. 그렇게 꽤 오랜 시간 준비해 맘 졸이며 기다린 프로젝트가 다음 달이면 마침내 문을 연다.
요즘 설렘과 두려움 사이 어딘가에서 불안한 마음이지만, 이왕 시작한 거 씩씩하게 한번 해내 보자고, 잘 마무리할 수 있으리라고, 스스로를 다독이며 지내는 가운데 불현듯 백원만 아저씨가 내 머릿속에 소환된 거다. 특히 프로젝트 오픈 전 보름동안 이어지는 ‘공개예정' 기간 동안에 나는, 그 시절의 백원만 아저씨처럼, 프로젝트 성공을 위해 여기저기 '알림 신청'을 구걸하고 다녀야 하는 입장이 되었다. 내 생애 '무엇인가를 절실히 구걸'하는 일이 생기게 되리라는 생각을 단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나는, 자꾸 소심해지고 부끄러워지는 이 마음을 어찌해야 하나, 걱정하던 와중에 백원만 아저씨를 희망처럼 떠올린 것이다. 주저함 1도 없이 세상 당당한 아우라를 뽐내던 아저씨를.
그러고 보니, 내가 구걸하는 ‘알림 신청’도 백원만 아저씨의 ‘백 원’처럼 상대방에게 그리 큰 부담이 되지는 않겠다 싶었다. 그저 해당 페이지에 들어가서 '알림 신청 버튼' 한 번만 꾹, 눌러주면 될 일이니 말이다. 그럼에도 일부러 들러준다는 사실 자체가 다소 귀찮은 일이 될 수는 있으므로, 번거로운 와중에도 기어이 들러 버튼을 눌러주고 가는 자비로운 분들이 있다면 ‘복 받으실 거’라고 진심 어린 덕담을 돌려드리고 싶다.
이리하여, 그 시절 백원만 아저씨에게 빙의한 나는 용기 내 당당하게 소리쳐 본다.
"(자비로운 마음으로 '알림 신청') 버튼 한 번만 (눌러주세요)~~!!”
이렇게 말하는 내 간절한 표정을 함께 보여주지 못해 아쉬울 따름이다.
이런 용기를 낼 수 있게 해 준 백원만 아저씨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하며, 아저씨가 건강하고 무탈하게 잘 지내고 있기를 간절히 소망해 본다.
* 텀블벅 프로젝트 주소: https://www.tumblbug.com/mangoa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