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 둘.
학교에 의원면직 신청을 하고 얼마쯤 지났을까.
지역 교육청 장학사로부터 전화가 왔다. 개인적인 일로 장학사와 통화를 한 건 그때가 처음이었고 아마도 마지막일 거다.
장학사는 호기심 가득한 목소리로 내게 비슷한 질문을 계속 던졌다.
"학교를 왜 그만두려고 하시는 거예요...?"
그의 질문에서 '정말 궁금해 죽겠다'는 뉘앙스가 느껴졌다. 이제까지의 사회 통념상, 직업적 여성으로서 '여교사'의 신분은 결혼 전 여성에게는 배우자감으로 이상적인 조건이자, 결혼 후 육아를 하는 여성에게는 워킹맘으로서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지위로 인식되고 있는 실정이니, 장학사가 나의 결정에 의문을 가질 만도 했을 터다. 그도 그럴 것이, 그 당시만 해도 교사 중 의원면직하는 인원이 절대적으로 적은 때였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가장 큰 사유는 건강 문제 때문입니다. 제가 목이 많이 아파서 수업을 도무지 이어갈 수가 없네요. 교사에게 가장 중요한 게 수업인데, 그걸 제대로 할 수 없는 상황에서 어떻게 이 일을 계속할 수 있겠어요?"
내 대답을 들은 장학사는 어느 정도 수긍을 하는 것 같으면서도, 의구심을 떨치지 못했는지 잠시 후 내게 이렇게 물어왔다.
"혹시, 부당한 일을 당하셨다거나, 하신 건 아니고요...?"
10년 남짓한 기간 동안 학교에서 당한 부당한 일로 말하자면 한두 가지가 아니었지만, 그만두겠다며 사표를 쓴 시점에서 그걸 말해봐야 무슨 소용이 있을까 싶었다. 난 그저 학교에서의 안 좋은 기억 따윈 훌훌 털어버리고 새로운 직업적 삶에 씩씩하게 발 딛고 싶었다. 어쩐지 말끝이 희미해지는 장학사의 어조에서 '아니'라는 대답을 듣고 싶어 하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런 건 아닙니다."
난 결국 그렇게 대답하며 5분 남짓 이어졌던 통화를 끝맺었다. 전화를 끊고 나서 집요하게 떠오르는 기억이 하나 있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다시금 생생해지는.
그날은 내 생일이었다. 살을 파고드는 겨울바람은 차가웠지만, 방과 후 학급 아이들이 조촐하게 생일파티를 해 주겠다는 말에 마음은 따뜻했던 날이었다. 6교시였는지 7교시였는지 명확하진 않지만, 공강이었던 나를 교감이 작은 회의실에서 잠시 얘기를 나누자며 불러냈다.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교감이 무언가 좋지 않은 이야기를 꺼내리라는 것을. 교감의 불안정해 보이는 표정과 태도에 내 심장이 긴장으로 빠르게 뛰었다.
얼마 간의 시간이 흘렀는지 모르겠다. 교감이 일방적으로 내게 쏟아내던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정신이 아득해졌다. 그와 동시에 가슴이 무너져 내렸던 것 같다. 선명하게 기억나는 사실은, 회의실을 나서던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무덤덤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어디론가 숨어들어 실컷 울고 싶은 마음이었단 것이다.
교감이 한 말의 요지는 (행간을 분석해 보면), '나에 대한 학부모들의 불만 제기가 있으니 이번 인사 기간 동안 타학교로 전근을 해 달라'는 것이었다. 학교 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몇몇 학부모들이 내 '불안정한 목소리'를 문제 삼아 '아이들의 학습권' 운운하며 교장에게 담당교사를 교체해 주도록 요청을 한 모양이었다. 그렇게 했다는 건, 그들에게 교사 하나쯤 교체하는 건 문제 될 것도 없고, 그들의 힘으로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리라.
내 목소리에 문제가 있다는 건 나 스스로도 잘 인지하고 있었다. 당시 나는 성대 치료를 위해 병원을 다니고 있는 중이었고, 수업을 하면서도 때때로 목이 잠기고 큰 소리가 잘 나지 않는 경우가 있었기에, 마음이 아프면서도 한편으론 그런 민원이 이해가 가기도 했다.
내게 깊은 상처를 입혔던 건 교감이 이야기를 전달하는 방식이었다.
차라리 교감이 내게 솔직하게 말하고 부탁을 했더라면 나는 크게 억울한 맘 없이 학교 측의 요구를 납득했을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교감은 (돌이켜 생각해 보면) 상당히 폭력적인 형태로 내가 '전근을 신청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을 만들었다. 교감으로 대표되는 학교 측은 혹여라도 내가 버티고 있지 못하도록, 최대한 교사로서의 자존감을 뭉개는 내용을 고안해 낸 듯 보였고, 결과적으로 상황은 그들의 뜻대로 흘러갔다. 그 학교에 남아, 그런 학부모들의 자녀들을 가르치며, 그 관리자들과 함께 일하고 싶은 마음이 내겐 털끝만큼도 남지 않았다.
교감이 말했다. '내 수업이 문제가 많다'라고. - 나를 전근시킬 구실을 만들기 위해 교감은 몇 날 며칠 내 수업을 몰래 지켜본 것 같았다 - 그런데 그가 구구절절 예시를 들었던 상황들은 별다를 것 없이 이어져 온 남자 중학교의 교실 풍경이었다. 비단 내 수업뿐만이 아니라, 교무실에서 동료교사들과 한탄하며 나누었던 일상적 교실 풍경 말이다. 수업 시간에 엎드려 자는 아이들, 수업에 집중하지 않고 떠드는 아이들 등등, 학급마다 학년마다 조금씩 다르기도 한 모습들...
도무지 납득하지 못하는 내 표정을 보면서도 교감은 'O선생이 아이들 생활지도를 못한다'라고 나지막하지만 질책하듯 말했다.
내가 수업을 담당한 학급이 성적이 떨어지는 것도, 특별히 문제를 일으키는 것도 아니었다. 설득되지 않는, 너무나 상처받는 방식으로 그 학교를 떠나 달라는 요청을, 아니 모든 것을 결정해 놓고 일방적으로 통보하는 강압에 가까운 지시를 받은 그 순간의 나는 교사로서의 자존감이 송두리째 파괴되어 갈곳 없이 너덜너덜해지는 느낌이었다.
당시에는 그것이 '폭력'의 한 형태라는 걸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다.
회의실을 나선 후 빈 교실에서 홀로 눈물을 쏟아냈을 때도, 친한 동료교사 (한 명)에게 벌게진 눈으로 하소연을 하면서도, 회식 자리에서 교장이 내게 '교감 선생님이 O선생에게 실수를 한 것 같다. 괜찮으시냐?'라고, 마치 자신은 아무 연관이 없는 사람처럼 유체이탈 화법으로 너스레를 떨 때도, 일주일이 넘도록 무너진 자존감에 정신 못 차리고 아파트 주차장에서 일상적인 주차를 하다 옆차를 들이박았을 때도 말이다.
일주일이 넘어가자 정신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그러자 억울하고 분한 마음이 주체하기 힘들 정도로 올라왔다. 20대 신규 교사들로 가득한 곳에서 (연차가 부족했음에도) 교과부장으로 애썼던 기억, 아픈 목을 만회하고자 더 부지런히 아이들과 소통하고 마음 썼던 그 모든 날들이 허무하게 느껴졌다. 나 자신을 돌봐야겠다는 생각이 커져갔고, 얼마 후 나는 중학교에서 인근 고등학교로 전근을 하는 동시에 곧바로 육아휴직에 들어갔다. 휴직 기간 동안 나는 살림을 하고 아이들을 돌보며 앞으로의 내 삶에 대해 생각할 시간을 많이 가졌고, 9급 공무원을 향한 길로 접어들게 되었다.
이 모든 이야기를 어찌 장학사에게 할 수 있었겠는가.
어차피 대부분의 장학사들은 조금이라도 일찍 학교의 관리자가 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라, 일개 평교사보다는 학교 관리자의 입장을 더 헤아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게 그건 분명 폭력이었다. 주먹이 오가는 '눈에 보이는 폭력'은 아니었지만, 어쩌면 그보다 더 큰 상처를 입히는, 자신의 지위상 우위를 활용한 '마음의 폭력'. 결국 한 사람이 극단적 선택에 이르게 하는 대다수의 폭력들이 이러한 형태로 이루어지고 있는 게 아니던가. 치유 불가능할 정도로 깊이 꽂히는 날카로운 가시들을 어쩌지 못한 가련한 사람들을 최후의 길로 내모는 얼굴 없는, 잔인한 폭력 말이다.
그 학교를 떠나고 얼마 후, 교감에게서 카톡 문자가 왔다.
교무실, 회의실 등에 한글과 영어를 병기한 새 표지판을 설치할 예정인데, 적절한 영어 표현을 알려달라는 내용이었다. 그때쯤의 나는 어느 정도 마음을 회복한 상태였고, 교감의 문자를 보고는 실소와 함께 욕지기가 올라왔다. 말 한마디 제대로 하지 못하고 떠나온 게 억울했는데, 조금이나마 억울한 마음을 위로할 '한 방(?)'을 날릴 기회를 준 교감에게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은 지경이었다.
나는 교감이 보낸 카톡을 꼼꼼하게 읽어본 후 아무 말 없이 그냥, 씹었다.
당황한 건지 괘씸했던 건지, 그 이후로 교감에게서 더 이상의 연락은 없었다.
혹여라도 (이젠 이름도 생각나지 않는) 그를 다시 마주한다면 썩은 미소를 날리며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
"당신, 인생 그렇게 살지 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