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나는 마음들이 머물고 있는 곳
얼마 전까지 저는, 제 첫 책을 독립서점에 입고하기 위해 분주히 돌아다녔어요.
그래봤자 겨우 다섯 군데였지만, 입고를 위해 수많은 서점들 중 제 마음이 끌리고 제 책과 결이 맞을 것 같은 입고처를 성실히 물색한 후, 정성 들여 입고 제안 메일을 보내고, 뿔뿔이 흩어져 있는 서점을 직접 방문해서 책을 입고하는 것은 꽤 품이 드는 과정이었지요.
하지만 그 과정은 제게 또 하나의 진기한 경험을 선사해 주었어요. 불과 작년까지만 해도 독립출판물, 독립서점과 그 영역을 아름답게 지키고 있는 사람들에 관해 알지 못했던 제가 새로이 눈을 뜨는 계기가 되었고요.
경제적 논리가 결코 배제될 수 없는 이 지독한 자본주의 시장에서, 불문법처럼 여겨지는 많은 명제들을 거스르며 자신이 사랑하는 것에 기꺼이 몸과 마음을 다하고 있는 이들을 만날 수 있었어요. 이제껏 이런 세상을 모른 채 살아왔던 제가 부끄럽기도, 이제라도 알게 되어 참 다행이다, 싶기도 했어요.
어느 날은 햇살이 따스했고, 또 어떤 날은 후드득 내리는 비에 옷깃이 젖기도 했지만, 그 끝에 마주한 독립서점들은 각각의 매력으로 빛나고 있었습니다. 수줍게 맞아주시는 서점지기도, 인생 선배로서 아낌없는 조언을 주시던 대표님도 그 눈과 마음에는 책을 향한 사랑이 가득했어요. 따뜻한 커피에 마음을 담아내어 주시는 분도 계셨고, 오히려 제 책 덕분에 서점 분위기가 밝아졌다며 예쁜 아이를 맞아들이듯이 제 책을 보듬어주신 분도 계셨어요. 그 마음들이 너무 소중하고 감사했어요.
그래서인지, 서점 하나하나에 얽힌 추억을 여기에 온전히 남겨두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혹여 독립서점에 관심이 있는 분이라면, 제가 여기에 소개하는 서점과 그리 머지않은 곳에 사시는 분이라면, 한 번쯤 들르실 수도 있지 않을까 싶기도 했고요. 이번 '입고 여행'을 하며 계속해서 들었던 생각은, 이분들이 책을 많이 많이 팔 수 있는 사회가 되면 참 좋겠다, 였어요. 그런데, 작은 동네서점들을 위한 내년 예산이 많이 삭감되었다고 하여 걱정이 큽니다. 분명 숫자로만 따질 수 없는, 가없는 값을 지닌 것들이 이 세상에 있는데, 세상은 자꾸 숫자로만 존재 가치를 매기려고 하는 것 같아 씁쓸하네요.
누군가의 눈에는 제대로 보이지 않는 가치를 알리고 싶은 마음에, 그 가치를 꿋꿋이 지탱해가고 있는 이들과 장소를, 제 자그마한 능력이 닿는 범위 안에서 소소히 기록해 보았습니다.
1. 스토리지앤북필름 로터리점, 서울 용산구
스토리지앤북필름은 독립서점 1세대의 대표주자라고 할 수 있는데, 본점인 해방촌 지점과 로터리점 2곳이 있어요. 저는 로터리점에만 입고를 했는데, 두 곳 모두 방문해 본 입장에서는, 언덕을 한참 올라가는 본점보다 여기가 (위치적으로는) 접근성이 좋았어요. 본점은 본점 나름대로의 형님 같은, 듬직한 매력이 있었고요.
스토리지앤북필름은 무엇보다 비치하고 있는 독립출판물의 종류가 무척 다양했고요, 대표님이 매장 내의 향이나 조명, 분위기에도 신경을 많이 쓰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제가 갔을 때 젊은 남녀 한쌍이 이런저런 책들을 사이에 두고 얘기를 나누며 평화로운 데이트를 하고 있었는데, 곁에서 슬쩍 훔쳐보기만 해도 왠지 기분이 좋더라고요. (아무래도 비밀스럽게 무언가를 하는 것에서만 느낄 수 있는 즐거움이...^^) 출판 시장이 점점 쪼그라들고 있는 시대에, 이렇게 책을 매개로 사랑을 속삭이는 청춘 남녀를 보고 있으려니 흐뭇한 엄마(?) 미소가 절로 나왔어요. 여기에서 와인 관련된 책 한 권을 사들고 돌아왔는데, 포장 봉투에 찍힌 서점 마크가 마음에 쏙 들어 시간이 꽤 지난 지금도 차마 내다 버리지 못하고 있네요.
사실, 책만으로 매출을 올리기 힘든 독립서점들은 각각의 특색을 살린 부가 업무들을 병행하고 있어요. 스토리지앤북필름은, 대표주자답게 독립출판물 '북페어' 등 독립출판인들을 위한 각종 모임과 행사를 주최하고 있답니다. 척박한 환경 속에서도 10년 가까운 시간을 버텨내고 있기란 분명 쉬운 일이 아닐 텐데, 작지만 강한 스토리지앤북필름이 앞에서 든든하게 지켜주고 있는 덕분에 다른 후발 주자들이 힘을 얻지 않을까 싶어요.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고 싶다는 이곳 대표님의 소망이 언젠가 꼭 이루어졌으면 좋겠습니다.^^
2. 위드위로, 일산
위드위로 서점은, '위로와 함께'라는 서점 이름처럼 따뜻한 위로가 가슴 가득 느껴지는 곳입니다.
조용한 아파트 단지 근처의 작은 도로가에 위치한 위드위로는, 맛있는 디저트와 커피가 일품인 곳이기도 합니다. 대표님이 커피와 디저트에 진심이셔서 입안에서 살살 녹는, 신선한 디저트들이 항시 준비되어 있어요.
몇 해 전에 독자로서 방문했다가 이번에 작가의 입장이 되어 다시 가게 되었는데, 오래간만에 갔음에도 저를 기억하시고 반갑게 맞아주셔서 감동이었어요. 심지어 서비스로 맛난 커피를 주시기까지...
꽤 입소문이 났는지 근처 주민들이 (책은 안 보더라도) 커피와 디저트에 수다 한 스푼 곁들이러 많이들 오시는 것 같았어요. 방문객들이 꽤 있어 보여서 좋았지만, 한편으로는 저분들이 책도 좀 읽고 사가시면 좋을 텐데, 하는 생각도 들었어요.
재난생존자이기도 한 대표님은, 현재를 지배하려는 끔찍하고도 끈질긴 기억을 가까스로 극복하고 있으면서도, 결코 책을 사랑하는 마음을 포기하지 않고 자신만의 노하우를 쌓아가고 있는데요, 그 모습이 애잔하면서도 불굴의 의지가 참으로 멋져 보였어요. 세심하고 인간적인 배려와 커피만큼이나 따뜻하게 건네던 말들도요.
3. 빛나는 친구들, 부천
'빛나는 친구들'은, 제 신혼시절의 추억이 묻어 있는 도시, 부천의 오랜 역사가 있는 고등학교 앞에 위치하고 있어요.
제 소설이 '덕질'을 다루고 있는 이야기라 대표님이 관심을 주신 것 같아요. 대표님의 친한 언니가 아이돌 팬이고, 대표님 본인도 오랫동안 개그맨 전유성 님 덕후라고 하네요. 그리하여, 서점 한켠에 전유성 님이 기증하신 책들이 꽤 많이 비치되어 있어요. 저도 그중 처음 보는 추리소설 한 권을 단돈 4천 원에 사들고 왔답니다.
전유성 님의 오랜 팬이 될 만큼, 재미있고 웃음주는 것들에 진심인 주인장은, 인생을 진정 즐길 줄 아는 분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학창 시절에는, '유머 감각'을 인간이 갖춰야 할 매우 중요한 재능으로 여기는 서양 문화를 이해하기가 힘들었는데, 세월을 겪어오면서 점점 더 그 연유를 알 것 같아요. 힘들게 버텨내는 삶일수록 잊지 말아야 할 것이 바로 웃음을 잃지 않는 건강한 마음과, 나아가 사람들의 미소를 자아낼 수 있는 능력이 아닐까 싶어요. 귀중한 만큼 가지기 쉽지 않은 재능일 테죠. 평소 '웃음 욕심'이 남달라, 어떻게 하면 회사 사람들을 빵 터지게 만들 수 있을까, 고심하고 있는 짝꿍을 보면 철없는 아이취급을 하곤 했는데, 앞으로는 격한 칭찬은 물론, '남들 웃기기 위해' 더 열심히 연구해 보라고 등 팍팍 밀어줘야겠다 싶어요.
이곳은 위치상 학생들이 많이 오기 때문에 떡볶이 등의 분식류도 판매하고, '스탠딩 코미디' 같은 재미있는, 북토크 형식의 행사도 자주 열리고 있어요. 그래서인지 대표님의 미소가 여고생의 그것을 닮아있답니다.
4. 쑬딴스 북카페, 파주
쑬딴스 대표님은 꽤 오랜 시간 국내 굴지의 제과업체 영업사원이었어요. 그러던 어느 날, 도저히 이대로는 못 살겠다, 내 삶을 바꿔보겠다는 의지로 회사를 박차고 나와 글을 쓰고, 서점지기가 되고, 이제는 출판사 사장님까지 겸업하고 있는 중이에요.
'쑬딴스'는 우리가 흔히 '술탄'이라고 알고 있는, 이슬람의 정치 지도자를 뜻하는 단어에서 따온 것인데, 작가님이시기도 한 대표님 책에 사인을 해달라고 하면, 흡사 '아랍 문자'처럼 생긴 특이한 형태의 한국어로 근사하게 서명을 해주십니다. 어찌나 멋져 보이는지 기념품으로 평생 간직하고 있어야겠다 싶을 정도예요.
술을 무척 좋아하는 대표님은 북카페에서 커피와 함께 막걸리, 와인 등의 술도 함께 취급하고 있어요. 차를 가지고 가지 않는다면, 술 한 잔 기울이며 대표님에게서 재미있는 이야기와 삶에 유익한 조언들을 무료로 들을 수 있는 기회를 놓치지 마세요. (참고로, 얘기 나누는 걸 무척 좋아하고 자유로운 영혼을 지니고 있는 대표님은, 서점에 붙박여있지 않는 경우가 종종 있어서, 대화를 나누고 싶은 경우에는 미리 확인을 해보고 가시는 걸 추천드립니다)
여기에는 '탄이'라고 불리는 네 살 골든 레트리버 친구가 있어요. 사람을 무척 좋아하는, 송아지만 한 크기의 친구인데, <세상에 나쁜 개는 없다>에 출연하여 꽤 유명해졌다고 합니다.
맞은편에 Cj 스튜디오가 있으며, 공개녹화가 있는 경우에 수많은 팬들이 이곳을 들렀다 가곤 한다네요. 몇 달 전 BTS 지민이와 뷔가 촬영차 왔을 때 국내외 아미들이 쑬딴스 매출을 엄청 올려줬다는 후문이 있어요. 그때 대표님 지인의 노동력이 총동원되었는데, 코피 터질 만큼 힘들었지만 마음만은 즐거웠다고 합니다. 역시, 돈을 많이 번다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이에요.
파주 헤이리를 방문할 일이 있으시면, 책을 사랑하신다면 한 번 방문해 보실 것을 추천드려요. 술을 몹시 사랑하지만, 인생을 해탈한 도인과도 같은 풍모의 서점지기를 만날 수 있을 거예요.
5. 스페인 책방, 서울 충무로
마지막으로 방문한 스페인 책방으로 가는 길에는 겨울비가 함께 했어요. 우중충한 날씨에 잠시 길을 헤매다 보니, 비에 젖은 옷깃만큼이나 발걸음이 무거워지는 것 같았어요.
'스페인'이라는 이름이 제게 주는 이미지가 있어요. 그건 바로 '열정'이지요. 강렬한 태양, 다혈질의 사람들, 플라멩코 무희의 치마 끝에서 느껴지는 역동성, 그리고 롤러코스터를 타고 오르내리는 듯한 스페인어의 변화무쌍한 악센트까지.. 그래서인지, 스페인책방까지 이르는 길은 조금 실망스러웠어요. 날씨뿐만 아니라, 서점이 있는 3층까지 올라가던, 갑자기 쥐 한 마리가 달려든다고 해도 전혀 이상할 것 없어 보이던, 낡은 계단도요. 함께 간 짝꿍도 같은 마음이었던지 가벼운 한숨소리를 내뱉었어요.
그런데 서점 앞에 도착하자, 마치 어둡고 긴 터널 끝에서 천국으로 향하는 문을 마주한 것 같았어요.(대문 사진 참고) 창 너머로 엿보이는, 스페인책방이 내뿜는 따스한 빛이 저에게, '여기까지 오느라 수고했어. 어서 와~'라고 반겨주는 듯했어요. 그리고 문을 열자, 잔잔한 미소와 함께 반갑게 저를 맞아주신 대표님까지.. 비를 뚫고 이곳까지 오길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이었어요.
스페인책방의 서가는, 스페인 향기 물씬 나는 책 구성도 좋았고, 특히 독립출판물들이 존중받고 있는 듯한 분위기가 소중했어요. 장강명 작가 - 개인적으로는 팬입니다만 - 의 <재수사>가 오히려 변두리 아웃사이더처럼 보였는데, 그 순간 알 수 없는 즐거움과 짓궂은 쾌감이 느껴졌네요. ㅎㅎ
스페인에 관심이 있는 분이라면 이곳을 꼭 한 번 방문해 보라고 말씀드리고 싶어요. 스페인에 관해 없는 것 빼고는 다 있는, 멀리 남산이 내다보이는 분위기마저 '감성 한도 초과'인, 서울 도심 속에 숨어있는 스페인을 발견할 수 있을 테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