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지뉴 Jan 29. 2024

9년간의 인연에 마침표를 찍으며

저출산에 대해 생각해 보다

구피가 우리 집으로 온 건 9년 전이었다.

같은 학교에서 근무했던 동료교사가, 새 집으로 이사하던 내게 이사 기념으로 자신의 집에서 키우던 구피 중 세 마리를 분양해 주었다. 물고기를 처음 키워본다는 내가 걱정스러웠던지, 동료는 이런저런 유의사항을 전하며 어여쁜 어항에 담긴 녀석들을 조심스럽게 나에게 넘겼다. 커피 향이 가득한 따뜻한 카페 안이었고, 알록달록한 녀석들의 자태와 그곳의 분위기 탓에 폭신폭신 솜사탕이라도 덧씌운 듯 기분이 둥실 떠올랐다. 새 집으로 이사도 했으니 새 마음 새 뜻으로 녀석들을 한번 잘 키워보자는 의지도 마구 샘솟았다.


동료는, '초보자도 키우기 쉬운 물고기종이 구피'라며 한번 잘 키워보라고 말했다. 미소 짓는 동료의 모습을 보고 있으려니, 구피 녀석들을 잘 돌보면 녀석들이 무럭무럭 잘 자라 자자손손 번성하고, 덩달아 우리 집 살림살이도 차곡차곡 늘어날 것만 같았다. 어쩌면 녀석들은 우리 집 '복덩이'가 되어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건 착각이었던 걸로 드러났다. 흠.)



그게 벌써 9년 전 일이다. 구피들과 10년 가까운 시간을 함께 지내며 신기한 경험들을 많이 했다.

가장 기억에 남는 건, 생명이 또 다른 생명을 탄생시키는 장면들과, 그렇게 태어난 생명들이 어항을 가득 채워가던 모습이었다. 듣던 대로 구피의 번식력은 어마어마했다. 그저 밥이나 던져주고 때 되면 어항 물 가는 게 다였던 나인데, 녀석들은 마치 정성스러운 돌봄을 받은 듯 쑥쑥 자라나 넓어 보였던 어항이 비좁아질 정도로 숫자를 불려 갔다. 처음 세 마리에서 시작한 구피가 열 마리로 느는 데에는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사람은 아이 하나 키우기 위해 피와 살이 마르는 듯한 날들을 보내야 하는데, 태어나자마자 저 혼자 유유히 물속을 헤엄쳐 다니는 구피 새끼들을 보며 부러운 마음마저 들었다. 그즈음 워킹맘으로서 유아기 아이 둘을 키우느라 전쟁 같은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던 나였기에.



스투키 같은 초보용 화초도 내 손 안에서 죽어나가는 마당에, 구피들이 하루가 다르게 자라 번식해 나가는 걸 보며 흐뭇했다. 나도 '사람 이외의 생명을 키워낼 수 있는 손'을 가졌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느 날인가부터 염려스러운 마음이 일었다. 불어나는 구피의 숫자를 어느 정도까지 감당할 수 있을지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계속해서 어항을 더 큰 것으로 갈아줄 수도 없는 노릇이었고, 개체가 늘면서 어항 물이 순식간에 더러워져 관리하기가 점점 더 버거워졌다. 내 새끼 뒤치다꺼리 하는 것도 제대로 못하고 헉헉대고 있던 때였으니, 생각했던 이상으로 늘어만 가는 구피들이 공포스럽기까지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어구밀도'가 늘면서 이따금 다른 구피를 공격하거나 잡아먹는 녀석들이 눈에 띄었다. 밥의 양이 부족해서 그런가 싶어 먹이양을 늘려보았으나 소용이 없었다. 그러니까, 밥의 양이 문제가 아니었던 것이다.



큰 어항으로 교체하고 난 얼마 후, 여름날이었다.

한여름 더위와 육아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있던 나는, 잠시 숨을 돌리기 위해 어항을 보며 '물멍'을 때리고 있었다. 파김치가 된 채로 눈알만 살살 굴리며 어항을 바라보다 살짝 지루해져, 구피가 정확히 몇 마리인지 눈으로 세기 시작했다. 요리조리 민첩하게 움직이는 녀석들을 시선으로 좇으며 수를 세는 것이 쉽지는 않았지만 그럭저럭 대략적인 개체수를 파악할 수 있었는데, 그 숫자를 인지한 나는 순간 기겁을 하고야 말았다. 세 마리에서 시작한 구피가 무려 '스물 네' 마리가 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큰 어항 공간이 왜 이리 좁아 보이는가 싶더라니, 내가 모르는 사이 구피수가 폭발적으로 늘어있었던 것이다. 더 이상 '생명을 키워내는 손' 운운하며 흐뭇해할 일이 아니었다. 넓지 않은 거실에 대형 수족관을 들여야 하는 사태가 발생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 더웠던 날 식은땀이 삐질 솟아 나왔다. '이 일을 어찌해야 하나..' 그렇다고 눈앞에서 살아 움직이는 구피를 굶겨서 개체수를 조정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런데, 내 걱정이 더 커지기 전에 희한한 상황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구피가 한 마리씩 픽픽, 죽어나가는 것이었다. 내 눈에 띄지 않은 채 친구들의 입 속으로 사라진 녀석들도 있는 듯했다. 밥을 더 줘도, 깨끗한 물로 갈아줘도 그러한 상황은 바뀌지 않았다. 어느 날 아침에는 한꺼번에 두 마리가 사체로 발견되기도 하였다. 숫자가 너무 불어난다고 걱정했던 일은 싹 잊어버린 채, 이제는 눈에 띄게 줄어드는 구피들에 나는 마음을 졸였다. 원인을 알 수 없어 불안은 더 증폭되었다. 이러다가 한 마리도 남아나지 않으면 어쩌나, 하는 걱정에 틈만 나면 어항을 들여다보기 바빴다. 신기하게도 구피는 한동안, 그토록 열심이었던 새끼 낳는 일마저 멈춘 것 같았다.



그렇게 스무 마리를 훌쩍 넘겼던 구피는 한 달쯤 후엔 열 마리 남짓한 개체수로 줄어들었다.

그러자 또다시 상황은 내가 생각지도 못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아침이면 사체로 발견되는 구피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다른 구피를 잡아먹는 녀석도 눈에 띄지 않았다. 마치 이 날을 약속이나 한 듯, 다 함께 기다려왔다는 듯, 서로 잡아먹고 먹히고, 공격하여 죽이고 죽고 하는 전쟁 같은 날들을 뒤로하고, 어항에는 '평화'가 찾아왔다. 너무도 급작스러운 평화가. 어항에서는 이제 다른 세상이 펼쳐지고 있었다. 마치 냉전 시대에서 한 순간에 평화의 시대로 도약한 것 같았다. 도망치듯 전투적으로 헤엄쳐 다니던 구피들의 몸짓에도 평온이 깃들었다. 녀석들은 그야말로 물속을 '유유자적’ 유영하고 있었다.



그 이후로 7년이 넘는 기간 동안, 구피는 자연스럽게 개체를 (조금씩) 불렸다 또 감소시키기를 반복하며 세대를 이어왔고, 마지막으로 남아 있던 한 녀석이 며칠 전 하늘나라로 갔다.

마지막 구피를 지켜보며 또 한 가지 신기한 점을 발견했다. 녀석은 자신이 최후의 개체임을 잘 인지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고, 마치 '도인'과도 같은 포스를 풍겼다는 점이다. 녀석은 무려 넉 달도 더 넘게 홀로 어항을 지키고 있었는데, 움직임을 최소화하며 생명을 오래도록 유지시키려는 것 같았다. 때론 바닥에 깔린 돌멩이 틈에서 며칠씩 잠행을 하기도 했다. 친구들과 함께 있었을 때는 활발히 헤엄쳐 다니던 녀석이었는데, 홀로 남은 기간 동안에는, 어항 바닥 가까이 머무르면서 지느러미와 꼬리를 살랑살랑 움직이는 정도로 하루의 대부분을 보냈다. 물론, 먹이 챙겨 먹는 것은 잊지 않았지만, 그것도 많은 양을 섭취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인테리어 조명으로 남은 어항

마지막 구피를 떠나보내며, 9년간에 있었던 일들을 되돌아보았다.

그러다 급격히 줄어드는 구피 개체수에 염려했던 내 마음이, 저출산에 대한 지금 우리 사회의 걱정과 불현듯 겹쳐 보였다. 물론, 감당하기 힘든 집값과 아이들 밑에 들어가는 어마어마한 교육비, 긴 노동시간 같은 것이 저출산의 요인이기도 하겠지만, 이 좁은 국토에서 인구가 이제 그 한계치에 도달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치열한 경쟁사회라는 것도 결국 따지고 보면, 좁은 국토에 지나치게 많은 인구가 모여 사는 것이 주요한 이유이기도 할 터이니, 어쩌면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 스스로가 좀 더 평화롭게 살기 위한 쪽으로 사회를 만들어가고 있는 것이 아닐까, 저출산은 그러한 과정에 필연적으로 수반될 수밖에 없는 현상이 아닐까 하는... 우리 집 구피들의 세상에서처럼 말이다.



나의 조바심이 무색하게 어느 순간 어항에 평화로운 세상이 왔고, 그 달라진 환경에 적응해 살아가는 구피들이 있었던 것처럼, 지금 우리도 그러한 길을 가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인구가 줄어든다고 이토록 애간장 닳아하지 않아도, 이러다 나라가 소멸한다고 호들갑 떨 필요도 없을 것이다.
물론, 마지막 구피가 덩그러니 빈 어항을 남기고 세상을 떠난 어느 아침처럼, 언젠가는 우리가 사는 세상에도 그런 날이 도래하겠지만, 타 생명체의 희생을 감수하고서라도 스스로를 돌보는데 아낌이 없는 인간들에게 그런 상황은 구피의 세상에서보다 까마득히 먼 훗날 찾아올 것일 테고..

매거진의 이전글 겨울의 코인 빨래방에서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