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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뉴 Dec 27. 2023

겨울의 코인 빨래방에서

밖엔 소리 없이 눈이 내린다.

온기 가득한 곳에 앉은 나는, 문 너머 하얀 세상을 몽글몽글한 마음으로 바라본다.

실내에는 향긋한 내음이 기분 좋게 부유하고, 딱 적당한 정도의 온도가 유지되고 있다.

흡사 봄의 한가운데로 다시 돌아와 있는 듯하다.

나는 봄 위에 앉아, 계절의 관광객이 되어 겨울을 관찰한다.



어린 시절 할아버지의 무릎을 베고, 할아버지가 들려주는 동화책을 느긋하게 듣고 있는 아이와도 같은 마음이 된다.

빙글빙글 빨래가 돌아가는 경쾌한 소리, 봄의 향기를 담은 듯한 공기가 나의 오감을 편안하게 해주는 이곳, 겨울의 코인 빨래방이다.



건조기가 없는 우리 집은, 궂은날이면 빨래가 잘 마르지 않는다.

그럴 때면 짝꿍과 나는 커다란 통 가득히 세탁물들을 담아 이곳을 찾는다.

두런두런 수다를 떨고, 리듬감 있게 오르내리는 세탁물들을 보며 멍을 때리다가,

문득 지루해지면, 흘끔흘끔 타인들의 세탁물을 엿보기도 한다.

다른 이들의 일상을 훔쳐보는 관음증 환자로서 느낄 법한 즐거움을 맛본다.

그러나, 여기엔 어떤 비난도 끼어들지 않는다. 공범자가 된 이들의 시선만이 비밀스럽게 오갈 뿐이다.



빨래는 돌고 또 돈다. 마치 세탁물들이 재미있는 놀이기구를 타고 있는 것도, 몸을 푹 담근 채 시원하게 목욕을 즐기고 있는 것도 같다.

돌고 도는 세상은 마음을 어지럽히지만, 이곳에서 돌아가고 있는 모든 것에는 유쾌한 박자가 실려있다.

박자에 몸과 마음을 싣다 보면 간질간질한 기분이 된다.

재촉하는 이 하나 없는 이곳에서, 나는 아무런 거리낌 없는 한량이 되고야 만다.



나는 알고 있다.

바깥은 마음마저 주춤하게 만드는 추위로 얼어붙었지만,

곧, 때 묻은 채 늘어져 있던 세탁물들이 뽀송뽀송, 향기마저 달콤한 상태로 내게 돌아오리라는 것을.

나는 그저 내게 올 행복한 시간을 부자의 마음으로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는 것을.



오백 원짜리 동전 여덟 개면 이 모든 것을 즐길 수 있다.

여덟 번 노크를 두드리면, 나는 혹독한 겨울에서 문 너머의 따스한 봄으로 들어간다.

사랑스러운 이 시간이 오롯이 내 것이 된다.



짧지도 길지도 않은, 딱 좋은 시간을 누릴 수 있는 이곳은, 겨울의 코인 빨래방이다.

혹 지금 당신의 마음이 가라앉는다면, 더러워진 세탁물을 곁에 끼고 집을 나서보자.

리듬마저 씩씩한, 겨울의 코인 빨래방이 당신을 기다리고 있을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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