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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뉴 Nov 17. 2023

우리 가족 방구석 1열

어린 시절 무더운 여름날 밤이면, 친척들과 작은 텔레비전 앞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함께 '전설의 고향'을 보던 게 가장 큰 오락거리였다.

누군가는 이불을 뒤집어쓴 채 눈만 빼꼼 내밀고, 또 누군가는 얼굴의 몇 배는 될 법한 베개를 끌어안은 채 언제든 그 뒤로 숨을 태세를 갖췄다. 무서운 걸 보겠다며 다 같이 모였지만, 정작 두 눈 부릅뜨고 무서운 장면을 직면하고자 하는 아이는 없는 듯했다.



그 시절 티브이는 동네방네 흩어져 놀던 우리들을 한 곳으로 끌어모으는 역할을 했었고, 우리는 작은 티브이 앞에 오글오글 모여 더위를 몰아내는 듯한 오싹한 감각을 공유하는 순간이 마냥 즐거웠다.

그러다 누군가 갑자기 등장한 처녀귀신의 모습에 괴성을 지르면, 이불속에 숨어 있던 아이도 베개 뒤에 얼굴을 묻고 코만 벌름거리고 있던 아이도, 흡사 소리의 파도를 타듯 저마다의 고함을 내질렀고, 이내 방안은 키득거리는 웃음소리로 가득했다.



드라마가 끝나고 나면 우리는 드라마의 어느 지점이 가장 소름 끼쳤는지, 누구의 비명소리가 자신의 간담을 서늘케 했는지 이야기를 나누느라 한참을 쫑알쫑알거리다, 어른들의 잔소리를 듣고서야 겨우 잠자리에 들 채비를 했다. 하지만 오래지 않아 시리즈가 종영되면서 우리의 시간도 점점 추억 속으로 잊혀갔다.



그런데 '전설의 고향'이 막을 내리면서 오랫동안 잊고 있던 기억이 요즘 다시금 재현되는 것 같다.

때때로, 무서운 것을 좋아하는 취향에도 DNA가 작동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귀신, 괴물, 좀비를 보면 인상 찌푸리고 피하기 바쁜 사람도 많건만, 어찌 된 게 우리 가족은 어른도 아이도 귀신과 괴물이 등장하는 프로그램에 유독 애착을 보인다. 이런 우리의 취향에 딱 들어맞는 프로그램이 매주 화요일 밤이면 어둠 속에서 화면을 밝힌다.



화요일 10시가 다가오면 그 옛날 동네 골목길에 뿔뿔이 흩어져 있던 아이들이 티브이 앞으로 몰려들듯, 우리  가족도 하나 둘 거실로 모여든다.

컴퓨터 삼매경이던 막내는 망설임 없이 전원을 끄고 시청하기 좋은 자리를 선점한다. 방문을 걸어 잠그고 있던 사춘기 딸램도 자신의 빈백을 질질 끌며 복도를 건너온다. 안방에 있던 짝꿍과 나도 하던 일을 접고 재빨리 거실로 나선다.



주름살이 하나 둘 늘어가는 어른이 된 그 시절 아이들과 21세기의 아이들이 기꺼이 하나의 관객으로 뭉치는 이 시간, 불 꺼진 거실에 홀로 번뜩이는 티브이는 4차원의 세계로 안내하듯 관객의 시선을 화면 속으로 빨아들인다. 이 시간만큼은 마음껏 소리 질러도, 저도 모르게 '우씨' 욕지기가 흘러나와도 눈치 주는 사람이 없다. ‘갑툭튀’ 장면을 맞닥뜨린 내가 내지른 소리에 놀란 아이가 비명을 발사하는 순간에도, 빈백 위에 이불을 둘둘 말고 미동 하나 없이 유령처럼 앉아 있는 아이 모습에 순간 놀라다가도 괜스레 웃음이 나온다.



그러다 문득 티브이 속 귀신에게 고마운 마음마저 든다. 그 어떤 노력과 시도에도 움직이지 않던 아이가, 제 발로 걸어 나와 같은 것을 보며 동일한 감각을 나누게 만드는 이 시간을 선사해 주었으니 말이다.

비록 1주일에 한 번, 한 시간 남짓한 '가족 합체'의 시간이지만, 수많은 나날 중 그 어떤 때보다 지금이 즐겁고 소중하다.

화면 속 귀신보다 네가 더 무섭다. 1시간을 미동도 없이 이 자세로 앉아있다니.;;



오래간만에 김치 소식 전합니다.

김치는 이제 태어난 지 만 2개월이 다 되어가요. 예전 사진과 비교하면 확실히 닭의 느낌에 가깝다는 걸 알 수 있으시겠죠? 그리고 (다행히) 암컷으로 판명되었습니다. 날개와 꽁지깃이 길고, 벼슬의 모양과 위치로 봤을 때요.. 수컷은 우렁찬 소리때문에 아파트에서 키우기가 몹시 난해 하다더라고요.

김치와 오랫동안 함께 하고 싶어 하는 우리에게는 희소식이지요.^^


김치와 두 달 가까이 동거하다 보니 김치가 무얼 좋아하는지, 또 무얼 싫어하고 무서워하는지가 눈에 들어옵니다.

김치는 특히 이불 위에서 노는 걸 좋아해요. 폭신한 이불을 놀이터 삼아 뎅구르르 구르고, 몸을 부벼대고 좋아서 난리도 아니랍니다. 그때 떨어지는 무수한 '파우더'(깃털을 방수시켜 주는 파우더. 사람 비듬처럼 생겼음)는, 그 광경을 즐겁게 지켜보는 사람 관객들이 지불해야 하는 '값'과도 같습니다.


즐겁게 놀고 있는 김치를 보면 자꾸만 드는 생각이 있습니다. 양계장에 있는 이맘때쯤의 병아리들은 어떤 나날들을 보내고 있을까, 하는 생각이요. 닭공장에서는 병아리들이 빠른 속도로 성장하게끔 처리된 사료를 먹인다고 들었어요. 그렇게 두세 달이 지나 포동포동 살이 오른 병아리들을 죽여 사람들이 먹는 식품으로 만든다고도요.


김치는 마트에서 파는 계란에서 나온 아이니까 다행히 그런 끔찍한 과정을 겪을 새가 없었지만, 기적처럼 우리에게 온 이 아이에게 좋은 기억을 많이 안겨 주고 싶다는 마음입니다. 물론, 그 이상으로 김치가 우리 가족에게 주는 게 더 많지만요. 지금도 그렇고요..

거실에서 뛰노는 김치를 보면 흡사 우리 집 거실이 전원 속 너른 마당이라도 된 듯한 기분이 들어요..ㅎㅎ

(좌)'이불은 사랑입니다' (우) 김치의 늠름한 자태

* 발행 버튼을 누르려는데 올해 들어 (제가 보는) 첫눈이 내리네요. 다들 편안하고 즐거운 주말 맞으시길 바라요. 왠지 'Happy Christmas!'라고 외치고 싶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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