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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뉴 Nov 06. 2023

아파트 건설 시행사 설명회를 다녀와서

후기 2. - 소름의 4단계

설명회를 다녀온 내가, 아이의 학급 학부모 단톡방에 메시지를 남기고 난 후, 한동안 난리법석 소란이 일어났다.

학부모들의 단톡방은 아이의 학교 관련한 소식이나 정보 공유를 하는 수단이자, 평소 도움 되는 정보를 얻기도 하는 곳이다. 이런저런 이유로 설명회에 참석하지 못한 같은 학급 학부모들을 위해 설명회를 다녀온 솔직한 소회를 짧게 남겼다. 설명회에 참석한 학부모들의 전반적인 분위기, 문제 제기된 사항들, 학부모로서 드는 생각과 우려 등등...



몇 분쯤 지났을까. 내가 올린 내용에 대한 한 학부모의 대답이 올라왔다. 그것을 보자마자 싸늘한 느낌이 들었다.


  '너무 부정적으로 생각하지 마세요.'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그대로 옮긴 내용이다. 이 짧은 대꾸에서 '너무'라는 단어가 유독 내 눈에 밟혔다. 아이의 보호자로서 충분히 들 수 있는 우려를 솔직히 말했는데, 내가 '지나치게' 부정적으로 생각한다는 것이었다. 정상적이고 상식적인 학부모라면 아이를 생각하는 걱정스러운 마음에 대해 과연 지나치다,라고 생각하고 표현할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그렇지만 세상에는 내가 도무지 납득하기 힘든 유형의 사람도 있는 것이니, 그리고 (얼굴은 모르지만) 어쨌든 아이 친구의 엄마이니, 가급적 원만하게 마무리를 지으려고 노력했다. 그런데 뒤이어 나온 그(녀)의 또 다른 답변에 나는 소름이 돋는 동시에 분노하고야 말았다.


  '괜히 선동하지 마시고 조용히 기다리는 게 아이들에게 더 도움 될 거 같아요.'


역시 있는 그대로 옮겨 쓴 그(녀) - 이후 A로 지칭 - 의 워딩이다. A는 솔직한 내 의견과 걱정을 타인을 '선동'하는 것이라는, 어디선가 익히 들어본 과격하고 그야말로 '선동적인' 단어를 동원해 내게 입을 다물 것을 요구했다. '~될 거 같아요'라는 나름 유한 표현의 탈을 쓰고 끝맺음을 했지만, 눈치 있는 사람이면 누구나 이것이 '괜히 다른 학부모들이 아이들의 안전에 대해 걱정하게 만들지 말고, 그냥 입 닥치고 조용히 있으라.'는 말이라는 걸 알 수 있을 거다.



불현듯 '가만히 있으라'는 얘기를 믿고 죽음을 맞이했던 아이들이, 오염수에 관한 우려를 표명하는 사람들을 향해 '괴담 유포자'라고 공격하는 어떤 이들이 떠올랐다. 나는 각자 의견이 다를 수 있지만, '선동'이라는 표현은 불쾌하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다른 학부모들로부터 나를 지지하는 발언들이 줄줄이 올라왔다.


 '괜한 선동이 아니라 당연한 우려인 걸요..'

 '시행사 측이 모든 요구 조건을 들어준다고 해도, 시공사 측에서 이행하지 않을까 걱정해야 할 상황인데요. 선동은 아닌 것 같습니다...'

 '공사가 시작되면 아이들 거의 모두가 공사펜스를 지나야 등하교가 가능한데, 걱정을 안 할 수가 없는 일인데요...'


이후 더 소름 끼치는 상황이 전개됐다.

잠시 조용하던 A가, '내가 쓰는 글이 아닌데 왜 내 이름으로 이상한 말이 올라가는지 모르겠다'는 의문을 제기하며, 위의 무례한 발언은 자신이 한 것이 아니니 믿어달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자 한 학부모님이, '여기에 같은 분이 두 분이네요.'라며 대화창 명단을 캡처해 올렸다

과연 대화창 명단에는 A가 두 명이었다. 그러니까, 학부모 단톡방에는 같은 프사에 동일한 닉네임을 쓰는 A가 두 명이었던 것이다. 분명 이중 한 명은 진짜 A를 사칭한 사기꾼, 아니 범죄자였다. 어쩐지, 같은 학급 학부모들로 가득한 대화방에서 공격적인 표현을 서슴없이 쓰는 게 이상하다 싶더라니.



 '어라, 누가 진짜예요?!'

놀라고 당황한 학부모들로 단톡방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새로이 등장한 A와 무례한 A 간에 '누가 진짜 A인지'로 공방이 펼쳐졌다. '당신 누구냐?!, 경찰서에 신고하겠다!'는 말들이 오가며 혼란스러운 와중에, 어떤 학부모는 탐정이 된 듯 상황을 지켜보며 진짜를 가려내고자 했고, 다른 학부모들은 이 사태를 해결한 방안을 저마다 제시했다.



더더 소름 끼쳤던 건, 처음엔 다소 말투가 달라 보였던 두 A의 말투가 점차 비슷해졌다는 거다.

분명 A를 사칭한 자가, 자신이 가짜임을 감추기 위해 진짜 A의 말투를 놀랍도록 빨리 습득해 유사한 형태로 진화해가고 있었던 것이리라. '이렇게 사기를 당하는 거구나'라는 생각이 드는 동시에 의구심이 솟아 나왔다.

사기꾼들은 본디 불법을 저지르면서까지 '얻고자 하는 목표, 특히 경제적인 것, 가 분명한 자'들이다.

학부모들이 학교 소식을 공유하는, 별다른 경제적 이득이 없을 이곳에서 그(녀)가 이뤄내고자 하는 목표가 무엇일까 곰곰이 생각해 봤다.



그러자 하나의 답이 도출되었다.

이 시점에서 사칭 A가 원하는 건, '아파트 건설에 방해되는 분위기가 조성되지 않는 것'이었다. 그리고 공사 현장 주변에서 그들에게 가장 큰 걸림돌이 되는 것이 바로 학부모들일 테다.

이 이야기를 짝꿍에게 건네자, 짝꿍이 툭 던지듯이 말했다.


 '그 사람, 건설사와 관련된 인물일 수도 있어.'


그 순간, 재개발을 위한 철거 공사를 앞두고 '힘'을 동원해 원주민들을 쫓아내는 업자들이 떠올랐다. 짝꿍의 생각은 충분히 납득이 가는, 합리적 추측 같았다.



결국, 학급 대표 어머님을 동원해 진짜 A와 유선 통화까지 하는 과정을 통해서야 사칭 A를 단톡방에서 쫓아낼 수 있었다.

일련의 사태를 통해 알게 된 결정적 소름 한 방.

'나를 사칭하는 당신을 경찰서에 신고하겠다!'며 부들거렸던 A가 사기꾼이었던 것으로 드러났다는 것이다. 그리고 잊고 있었지만, 이 단톡방은 비밀번호 네 자리를 입력해야 들어올 수 있는 곳이라는 사실.



무서운 세상이다. 정말 눈 뜬 채로 코 베일 지도 모를 일이다. 마음 무장이 필요해 보이는 지금, 아이를 위해서라도 정신 똑바로 차리고 살아야 하는 날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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