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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뉴 Mar 05. 2024

오늘도 집에서 룸서비스 중입니다

단골 미용실에 다녀온 짝꿍이, 아마도 나를 위로한답시고, 에피소드 하나를 풀어놓았다.

미용실 원장님의 하소연에 관한 것이었다.

최근 미용실에, 마스크를 쓴 채 엄마와 함께 방문한 여중생 손님이 있었다고 한다. 커트를 하기 위해 온 아이는, 자른 머리칼이 마스크 속으로 파고들어 갈 수 있기에 마스크 탈착을 요구하는 원장님 앞에서, 짜증 섞인 반응을 보였던 모양이었다. 마스크를 절대 벗을 수 없다는 반응을 보인 아이에게, 원장님은 마스크를 벗는 대신에 마스크 속으로 들어간 머리카락들을 털어내라고 요청했고, 그 와중에도 아이는 아무에게도 얼굴을 보여주지 않겠다는 각오라도 한 건지, 고개를 바닥 쪽으로 바짝 숙인 채 머리카락들을 신경질적으로 털어냈다고 한다. 짝꿍은 이 얘기를 전하며 '코로나19'로 인해 아이들이 마스크 뒤로 자꾸 숨어 들려한다며 혀를 끌끌 찼다.



사실, 조금 위로가 되긴 했다. 개학을 앞둔 얼마 전, 나도 딸아이를 대동하고 같은 미용실에 다녀왔다. 방학 내내 자기 방에 틀어박혀 혼자만의 세상에서 지낸 아이라, 미용실에 (그야말로) 끌고 가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래도 어쨌든, 딸램은 자신이 애용하는 마스크를 순순이 벗었고, 원장님 앞에서는 히스테리칼한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방문을 걸어 잠그고 '은둔형 외톨이'처럼 지내는 아이가 우려스러워 속으로 '저게 커서 뭐가 되려고 저러나' 한탄했었는데, 내 아이가 유난 떠는 것은 아닌가 보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마음에 안도감이 밀려드려는 찰나, 문득 아이가 어렸을 적 사진들이 보고 싶어졌다. 옛 앨범을 뒤적이는 건, 꼬맹이적 딸램이 그리워질 때 내가 치르는 일종의 '의식'과도 같다. 시기순으로 사진들을 쭉 넘겨보던 나는 아래의 두 사진에서 시선이 멈췄다.



첫 번째 사진은 아이가 네 살 무렵, 우리 부부가 다른 커플과 함께 간 리조트에서 찍은 사진이다. 하루의 여행을 마치고, 어른들은 리조트 거실에서 술 한 잔에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고 있는 중이었다. 그 당시, 걷지도 못하는 아기였던 동생 외에 또래라고는 없던 상황이라 심심했던지, 딸아이는 계속 어른들 술판을 기웃기웃거렸다. 그 모습이 귀여워 내가 아이에게 제안했다.


"네안아, 우리 재미있는 사진 찍을까?" ('네안'이는 내가 딸을 부르는 별칭이다)


그러자 나온 포즈가 바로 아래 사진 속 모습이다. 직전까지 싱글벙글 장난기 가득한 표정이었던 네 살 꼬맹이는, 옆에 굴러다니던 초록빛깔의 소주병이 마치 트로피라도 되는 양 번쩍 들어 올리더니, 야무지고 진중한 시선으로 카메라를 노려보았다. 흡사, '나랑 소주 한 병 하실래요?'라고 말하고 싶어 하는 표정으로 말이다. 그 모습이 너무 깜찍해 아이를 옆에 끼고 한참을 웃고 떠들었던 기억이 난다. 그랬다. 아이는 카메라 앞에서 각종 포즈 잡기를 즐겼다. 어디서 그런 아이디어가 샘솟았는지, 즉흥적으로 콘셉트 잡는 것에도 능숙했다.

이 귀여운 꼬마숙녀는 도대체 어디로 간 걸까?ㅠ

집 앞 놀이터에 나가면, 딸램은 아이들을 데리고 나온 주부들에게 다가가 적극적으로 말을 붙이곤 했다.


"아줌마, 아기 너무 귀여워요!... 아줌마 이건 뭐예요?" 그러다 또래 친구들을 괴롭히는 녀석을 발견하면,


"너 그렇게 하면 친구 사귀기 힘들어."와 같은 충고를 거침없이 날리며 오지랖을 떨었다.

이 장면을 목격한 우리 커플은, 우리는 전혀 그렇지 않은데 아이의 저 과도한 붙임성은 어디에서 온 걸까, 의아해했다. 그리고 생각했다. 아이의 이러한 적극성은 어떠한 연유로든 타고난 것임에 틀림없다고, 사춘기가 도래한들 크게 바뀌진 않을 거라고. 저토록 사람을 좋아하고 활발한데 변해봐야 얼마나 달라지겠나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우리의 대단한 착각이었다. 십 년이 흐른 후, 아이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



아래 사진은 작년 초가을, 담임 선생님께 제출할 체험학습 보고서'를 위해 찍은 컷이다. 취학 아동을 둔 학부모들은 알겠지만, 체험학습 보고서는 현장에 다녀왔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한 자료다. 그 사실이 객관적으로 확인이 되어야 결석을 하더라도 '출석인정'을 받을 수 있다. 그런데 아이는 이런 상황에서도 카메라에 결단코 자신의 얼굴을 내어줄 수 없다고 했다. 아니, 아예 사진 찍는 것 자체를 거부하려 들었다. 한참 동안 애걸복걸 구슬리고 얼러 겨우 건져낸 사진이 바로, 누구인지 분간도 되지 않는, 시커먼 뒤통수만 보여주는 아래 사진이다. 보고서는 내야겠고, 얼굴이 나온 사진은 없고 해서 '에라, 모르겠다'하는 심정으로 이 사진을 보고서 뒤에 붙여 담임 선생님께 제출했다. 보고서를 받아 든 선생님은 아마 기가 막히셨을 거다. 당연히 그랬으리라. 체험학습 보고서에 뒤통수 사진을 첨부한 경우는 아마 딸램이 유일무이하지 않았을까. 그리고 예상대로, 아이는 거절당한 보고서를 집으로 되가져왔다.


"선생님이 다른 사진으로 바꿔오라셔."

"네안아, 너도 알다시피 우리에게 다른 사진은 없어."

"아, 그렇지... 그럼, 어쩌지?"

"그래서 엄마가 얼굴 나오는 사진 단 한 장만이라도 찍자고 했잖아!"


내 말에 뚱한 표정이 된 아이는 더 이상 대화를 나눌 생각이 없는지 입을 굳게 닫았다. 그 후로 일이 어떻게 마무리되었는지는 모르겠다. 딸램의 담임 선생님도, '하는 수 없지'하는 생각으로 결재자에게 이리저리 변명하느라 힘드셨을는지도. 새삼 죄송스러운 마음이 인다.

딸아~~ 제발, 그 얼굴 좀 보여다오!

도대체, 이놈의 사춘기 호르몬에는 무엇이 들어있기에 아이를 이 지경으로 만든단 말인가! 무난한 청소년기를 지나 온, '말 잘 듣는 모범생'이었던 나로서는 이렇게 생각하고 저렇게 돌려 생각해 봐도, 딸의 행동들이 도무지 이해가 되질 않는다. 전에 없던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설득해 보아도, 소리 높여 나무라도 먹혀들지 않는 이 상황이 불가사의하다. 모든 상황의 최종 선택권은 오로지 아이에게 주어져 있다. 간간이 아이가 미소 지으며 내게 다가오면, 완벽한 '을'인 이 엄마는 그저 황송해할 따름이다. '이제 우리 네안이가 좀 달라지려나?' 하는 부질없는 희망고문에 시달리며, 용돈을 요구하는 딸램의 말마저도 반갑게 맞이한다.




"똑, 똑!"

"왜, 무슨 일인데?"


오늘도 철벽처럼 닫혀있는 딸아이의 방문 앞에서, 나는 마치 호텔 룸서비스를 하는 직원이 된 자세로 대답한다.


"너 빨래 다 된 거, 옷장에 챙겨 넣으라고.”

"알았어. 문 앞에 두고 가."


아무리 상냥한 목소리로 두드려도 이 문은 나에게 쉬이 속을 보여주지 않는다. 그러고 보면, 딸아이를 망부석처럼 기다리며 문고리를 사수하고 있는 앵무새 자몽양이나 나나 처지가 별반 다르지 않다.

이렇듯 나는, 나의 집에서 성실한 '호텔 직원'이 되어 살아가고 있다.

어느 날, 내가 원하지 않았던, 하지만 거부하기 힘든 ‘부캐'가 내게로 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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