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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뉴 Feb 19. 2024

영화 <소풍>, <델마와 루이스> 그 후 30년

ft. 북페스타 참가 소식

오래전, 영화 <델마와 루이스>를 보고 '여성버디무비'를 좋아하게 되었다. 친구 사이 우정이니 의리니 하는 말이 오가면 으레 남성 간의 이야기를 떠올리는 현실에서, 주체적 여성 간 우정의 서사를 담은 '로드무비'가 상당히 신선하게 다가온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 테다.



그런 내게 최근 개봉한 영화 <소풍>은 몹시 반가운 작품이다. <델마와 루이스>의 30년 후 한국판이라는, 감독의 말이 흥미를 더 돋우었는데, 평소 보기 힘든, 노년의 두 여성이 주인공으로 나오는 버디 무비라 엄마와 함께 보면 딱이겠다 싶은 생각에 더 관심이 갔다. 참으로 이상한 것이, 엄마와 언성을 높이며 지지고 볶다가, 뒷모습도 보기 싫게 미워지다가도, 이런 작품을 보면 어김없이 엄마를 떠올리게 된다는 사실이다. 어느 때인가부터 들기 시작한, '이번이 엄마와 함께 할 수 있는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마음 한 구석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사실, 이것이 내가 <소풍>에 주목하게 된 이유의 전부는 아니다. 30대 후반 즈음부터 '죽음'이란 단어에 마음을 더 열어야겠다는 생각이 들면서, 엄마를 보며 미래의 내 모습을 조금씩 준비해야겠다는 다짐이 돋아나면서, 어르신들이 나오는 인쇄물이나 영상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76세에 그림을 시작했다는 모지스 할머니의 <인생에서 너무 늦은 때란 없습니다>란 책을 읽으며 그 어떤 상황에도 늦은 도전이라는 없다는 생각에 내 마음을 내어주고, 엄마에게는 그녀의 이야기를 들려주며 '체념' 대신 '시도'할 마음을 가질 용기와 에너지를 주고 싶었던 어느 날처럼 말이다.



나이가 들수록 원색을 좋아하게 된다는 어르신들이 이해가 잘 되지 않았는데, 언제부터인가 나도 조금은 그 심정을 알 것 같은 마음이 되었다. 내게 남은 길이 오직 소멸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면 나 자신도, 생명이 움트는 봄의 빛깔을 닮은 선명한 푸르름, 피어나는 개나리의 샛노랑, 따스한 남도에 지천으로 널렸을 동백꽃의 붉음이 자꾸만 보고 싶어질 것 같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이른 봄의 향기를 가득 담고 있는 듯한 <소풍>의 포스터를 보며 이런저런 생각들이 오갔다. 결국 이 작품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인생의 끝을 앞두고 있는 주인공들이 건네는 '늙음'과 '죽음'에 관한 이야기일  텐데, 그 와중에도 봄을 노래하는 찬란한 여유와 너그러움이 느껴졌다고나 할까.



불가피한 이유로 일찍 생을 마감하지 않는 이상 그 누구도 피해 갈 수 없는 것이 늙고 죽는 과정이지만, 우리 모두가 맞닥뜨려야 하는 그것들은 의도적이든 부지불식간이든, 삶의 뒤편으로 밀려난 채 머물러 있다. 영화 한 편 제작에도 결코 경제적 논리를 무시할 수 없는 현실이지만, 이 모든 것을 극복하기라도 하겠다는 듯, 여든이 넘은 주인공들과 감독이 의기투합해, 그들의 마음이 향하는 작품에 도전하는 모습이 영화를 보기 전부터 가슴 뭉클하게 다가왔다.

따스한 남해를 배경으로. (좌로부터) 금순, 태호 그리고 은심

<소풍>은 주인공 은심(나문희)이 중학교 동창인 금순(김영옥)과 함께 60년 만에 고향으로 내려가면서 펼쳐지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학창 시절 노래 잘하고 꿈 많은 소녀였던 은심은, 이제 파킨슨병으로 인해 약을 복용해야만 하는 하루하루를 버티며, 종종 죽은 엄마의 환영이 눈앞에 나타나는 삶을 살고 있다. 씩씩하고 활발한 성격을 지닌 금순은, 아픈 허리 때문에 화장실도 제때 갈 수 없는 상황에, 기저귀를 차고 자야 하는 서글픈 날들을 보내고 있지만, 그녀 특유의 유머감각만은 결코 잃지 않은 채 꿋꿋하게 생의 끝자락을 이어가고 있다.



60년 만에 다시 내려간 고향에서 학창 시절 자신을 짝사랑했던 태호(박근형)를 만난 은심은, 잊고 지냈던 소녀 시절의 추억과 감성을 떠올리며, 이제는 곁을 든든하게 지켜주는 친구가 된 태호, 금순과 마지막으로 아름다운 추억을 함께 나눈다. 하지만 그러한 날도 잠시, 태호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그들의 즐거운 추억 여행에도 충격과 어둠이 드리운다.

마지막 하나 남은 엄마의 재산인 집을 담보로 사업장의 위기를 극복하려는 아들(류승수)을 둔 은심도, 아픈 다리를 짊어진 채 그녀에게 분노와 증오를 쏟아내는 아들을 둔 금순도, 이제 '집도 절도 없는' 신세로 얼마 남지 않은 희망마저 사그라드는 신세지만, 결코 웃음을 잃지 않고 서로를 의지하며 푸른 물결이 일렁이는, 봄기운 가득한 남해를 향해 마지막 소풍을 떠난다.

 여성버디무비의 대표작 <델마와 루이스>(1991)
<델마와 루이스>의 마지막 장면

<델마와 루이스>에 델마에게 용기를 북돋워주는 씩씩한 루이스가 있었다면, <소풍>에는 은심에게 웃음을 선사해 주는 금순이 있다. 미 대륙의 광활한 사막 위로 끝도 없이 이어지던 도로는 남도로 향하는 소박하고 따스한 길이 되었다. 델마의 눈길을 사로잡았던 사기꾼 제이디(브래드 피트) 대신 은심에게는 순정남이자 든든한 친구인 태호가 함께 한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

델마와 루이스가 날아오르던 그랜드 캐니언의 황톳빛 장엄한 절벽은, 푸르름 가득 안은 남해의 절벽으로 변모했다. 기깔나는 스포츠카 한 대 없지만, 은심과 금순이 꼭 맞잡은 두 손에서는 그 어떤 관계에서보다 아름답고 멋진 아우라가 뿜어져 나온다. 바다를 향해 뒤돌아선 그들의 뒷모습도, 잠시 카메라를 향해 미소 지어 보이는 그 얼굴도, 서로의 오랜 세월을 마음으로 품어 온 그들이 함께 만든 선택이기에 그 자체로 고귀하고 성스럽다.



영화는 확실한 결말을 보여주지 않는다. 마침내 은심과 금순이 향한 그곳이 어디인지는, 그녀들의 마지막 미소를 마주했던 우리가, 어쩌면 오랫동안, 고민해 봐야 할 지점이다. 언젠가 훗날, 우리의 미소도 절벽 끝에 서 있던 그녀들의 미소와 닮아 있는 순간이 올지도 모를 테니.



p.s. 엄마의 후기를 들어 보니, 70대 여성의 입장에서 공감이 많이 가는 영화라고 합니다. 쓸쓸함에 관해서도 생각하게 된다고 하고요. 특히, 키오스크 사용에 애를 먹는 장면들 같은 세심한 에피소드들에 몹시 공감하며 흥미롭게 감상하시는 것 같았어요. 극장이 어둠에 잠긴 뒤, 지팡이를 짚고 뒤늦게 입장하시던 어르신이 기억납니다. 계단 하나 오르시는 것도 무척 힘겨워 보였는데요, 그럼에도 이 영화를 보고자 극장까지 찾아오시는 그 마음이란 어떤 것일까, 잠시 생각에 잠기게 만든 광경이었어요. 비슷한 연배의 부모님이 계시다면 함께 보러 오시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이번 금요일부터 일요일까지(2월 23~25일) 홍대입구역 2번 출구, 청년문화센터 JU에서 열리는 '각양각책' 북페스타에 참가하게 되었어요. 제가 만든 물건을 직접 전시하고 판매하는 경험은 처음인지라 긴장되기도, 설레기도 하네요.
시중에서 쉽게 볼 수 없는 다양한 독립출판물들을 선보이는 자리라, 책에 관심이 있으신 분들이라면 즐겁고 뜻깊은 자리가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북토크 등의 책 관련 행사도 다채롭게 펼쳐질 예정이라고 하니, 싱그러운 봄을 코앞에 둔 주말, 사랑하는 이와 함께 (혹은 자유로운 영혼으로) 오셔서 몽글몽글 마음 충만해지는 시간 가져보시는 건 어떨까요.

주말 즈음 홍대일대를 거닐 계획이 있으시다면 오셔서 잠시 노닐다 가세요. 브런치에서 보고 들렀다 말씀 주시면 소소한 선물도 드릴까 합니다.

참고로, 제 부스 위치는 5층 D-19, '망고의 책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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