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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뉴 Jul 03. 2022

납량특집과 추리소설의 계절이 돌아왔다

더위를 물리치는 데 소소한 의지가 될 만한 소소한 추천들

물을 짜낼 것처럼 눅눅하고 습한 공기, 밤낮을 가리지 않고 들끓는 대지, 치솟는 불쾌지수, 열대야로 잠 못 이루는 날들, 자동적으로 이루어지는 '사회적 거리'. 이 모든 것들을 고집스럽게 품고 있는 막강한 계절, 여름이 돌아왔다.


극한의 열기와 습도 때문인지 여름을 싫어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 그러나 나는 이런 여름이 좋다.

여름은 내게 외할머니댁 뒷마당에서 끌어안고 먹던 다디단 수박, 할아버지 손 잡고 간 개천에서 발끝으로 느껴지던 시원함, 시골 친척 집에서 귀청이 터지도록 들렸던 매미들의 함성 소리, 그리고 납량특집과 추리소설로 기억되는 계절이다.

여름의 나는 며칠째 방치된 음식물 쓰레기통을 활보하고 다니는 구더기들을 보며 괜스레 추리소설 속 시체를 떠올리고, 습기 먹은 공기를 헤치며 휘영청 빛나는 달을 보며 '전설의 고향'속 처녀귀신을 생각한다.


즐거운 여름의 추억을 남겨준 할머니, 할아버지는 이제 내 곁에 계시지 않지만, 내가 맞이했던 수많은 여름과 함께 층층이 남아있는 납량특집과 추리소설들에 관한 추억들을 떠올려보며 무더위를 잊을 정보들을 소소하게 방출해보려 한다. 이 글을 읽는 이들이 이 여름을 버텨나가는 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수 있기를 바라며...




내 기억 속 가장 오래된 납량특집은 뭐니 뭐니 해도 '전설의 고향'시리즈다. CG라고는 없던 시절, 어슴푸레하게 비치던 파란 조명과 섬뜩한 효과음, 그리고 실제 귀신인 듯 놀랍도록 실감 나게 열연하던 배우들의 모습에 가슴 졸였던 기억이 생생하다.

전설의 고향 ‘내 다리 내놔’ 편에 등장한 처녀귀신

'전설의 고향'에는 일종의 클리셰 같은 장면이 있다. 우선 양반 남성이 홀로 방안에 있다. 이윽고 스산한 바람소리가 들려오며 방에 있던 촛불이 별안간 꺼진다. (밖에서 부는 바람이 방 안으로 들어왔을 리는 없는데 말이다..) 그때쯤이면 나와 동생은 이불을 뒤집어쓰고 반쯤 뜬 눈만 빼꼼 내민 채 화면을 흘끔흘끔 쳐다본다. 그러면 어김없이 '한 맺힌 처녀귀신' 의 드높은 웃음소리가 울려 퍼진다. 내 몸의 온갖 솜털들이 삐죽삐죽 솟아오르는 게 느껴진다. 그러면서도 나는 화면 속 남성이 어떤 표정을 짓고, 어떻게 될지 궁금해 차마 고개를 돌리지 못한다. 에어컨이 흔하지 않았던 시절, 한 시간 가량을 이렇게 쪼그라드는 가슴을 부여잡고 이야기에 집중하다 보면 신기하게도 더운 줄 모르고 시간이 지나갔다.


중학교에 들어가면서 추리소설의 세계에 빠졌다. 특히 여름방학이면 '해*출판사'에서 나온 새빨간 표지의 아가사 크리스티 소설들을 방 한구석에 탑처럼 쌓아놓고, 마치 내가 '포와로'나 '미스마플'이라도 된 듯한 착각에 빠져 이야기 속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다.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도 재미있게 읽었지만 개인적으로는 아가사 크리스티 작품 중 '0시를 향하여'를 가장 좋아한다.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짙푸른 밤바다와 광기에 휩싸인 듯한 절벽의 생생한 이미지가 사춘기 소녀였던 내 상상력을 극도로 자극했던 것 같다. (작품이 너무 좋았던 나머지 급기야 반 친구들에게 '이건 꼭 읽어봐야 해!'라며 책을 돌렸는데, 나중에 내 수중으로 다시 돌아온 책은 십 년 묵은 책처럼 너덜너덜해져 있었다. 그래도 흐뭇했던 기억이...^^)


아서 코난 도일의 '셜록홈즈'에게서는 아가사 크리스티 작품 속 탐정들과는 또 다른 매력이 느껴졌다. '포와로'나 '미스마플'이 사건이 해결되는 마지막 순간에 범인을 찾아낸 과정과 이유를 장황하게 설명하는 쪽에 가깝다면, '셜록홈즈'는 등장인물들을 날카롭게 관찰하고 그 관찰로부터 파악한 정보들을 미끼 던지듯 중간중간 계속 투척한다. 코난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셜록홈즈의 놀랍도록 철저한 관찰력에 혀를 내두르며 나도 모르게 작품 속으로 빨려 들어가게 된다.

셜록 홈즈 시리즈 중에 장편보다 단편을 더 선호하는데, 단편 중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 깊게 읽었던 것은 '얼룩 끈'이다. 이 작품은 의문의 살인사건이 일어난 19세기 영국 시골의 한 대저택을 배경으로 사건을 진행시키며, 독자가 마치 그 현장에 함께 있는 것 같은 생생함을 불러일으킨다. 단편이라 길이도 얼마 되지 않기 때문에 무더운 여름밤 가볍게 읽기 좋은 작품이다.


영드 ‘셜록’ 시즌1 속 셜록 역의 데이비드 컴버배치

책보다 영상을 더 즐기는 이라면 2010년부터 영국 BBC에서 방영된 드라마 '셜록'을 추천하고 싶다. 19세기를 배경으로 한 코난 도일의 원작 소설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해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이 드라마는, 주인공 셜록을 연기한 '데이비드 컴버배치'의 독특한 머리 스타일과 그에 어우러지는 지적이고 냉철한 연기가 치명적으로 매력적인 작품이다. 우리의 두뇌회전을 적절히 자극하며, 입이 떡 벌어지도록 숨 쉴 틈 없이 이어지는 대사가 드라마의 매력적인 한 '축'을 이루고 있다. 시즌 4까지 방영되었지만 시즌2까지의 이야기가 쫀득쫀득하고 탄탄하며 그 이후로는 다소 느슨해지는 느낌이 있다.


20대에 들어서면서 일본 추리작가들의 작품에 끌리기 시작했다. 제일 처음 접했던 작품은 추리소설계의 명작인 '히가시노 게이고'의 '용의자 X의 헌신' 이었다. 내가 읽었던 추리물 중 이 작품 이상으로 충격적인 반전의 결말을 품고 있는 이야기는 없었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 중 개인적으로 최고라고 생각한다.

그다음 접한 작가는 '미야베 미유키'였다. 우리나라에서는 영화 '화차'로 유명한 작가인데, 나는 3권으로 이루어진 '모방범' 시리즈가 무척 재미있었다. 작품을 읽으며 머릿속에 영화처럼 영상이 선명하게 그려지는 이야기를 선호하는 편인데, 미야키 작품 중에는 '모방범'을 읽으며 가장 생생한 그림이 머릿속에 들어왔던 것 같다.

마지막으로 얘기하고 싶은 일본 작품은 기리노 나쓰오의 '아웃'이다. 2권으로 이루어진 이 작품은 토막 연쇄살인을 다루고 있는데, 작가가 직접 토막살인을 저질러본 것이 아닐까 싶은 의심이 강하게 드는, 극악할 정도로 펄펄 살아 날뛰는 상황 묘사가 압권이다. 그러므로 비위가 약한 사람들에게는 그다지 추천하고 싶지 않다. 그러나 어느 정도 내성 있는 비위를 갖춘, 밋밋한 일상에 지쳐 강렬한 자극에 쫀득쫀득 해지는 심장을 느껴보고 싶은 이들에게 권하고 싶다.


가장 최근에 읽었던 작품들 중에는 '피터 스완슨' '죽여 마땅한 사람들'과 '여덟 건의 완벽한 살인'을  추천하고 싶다. 피터 스완슨의 작품들은 독자에게 '대리만족'의 쾌감을 안겨준다. 작품 제목에서도 드러나듯이, '이 사람 좀 제발 죽어줬으면 좋겠다.'싶은 생각이 드는, '인간'이라고 불러주기도 아까운 쓰레기 같은 인물들이 하나 둘 픽픽 쓰러져 죽어나가는 동안 가슴이 뻥 뚫리는 듯한 통쾌함을 느끼게 된다. 사실 현실 세계에서도 그런 생각이 들게 만드는 인물들 몇 번쯤 마주치게 되질 않나...? 그렇지만 소설이 아닌 현실에서는 '법'이라는 미심쩍은 제도 덕분에 그런 쓰뤡 같은 인간들 중 죗값을 치르기는커녕 큰 소리치며 잘 사는 경우도 허다하다. 얼마 전 편안하게 장수를 누리다 저세상으로 간, 광주와 인연이 깊은 전** 도 그런 인물들 중 하나이지 않은가…!

피터 스완슨의 이야기는 억지스러움과 군더더기가 없다. 게다가 탁월한 '페이지 터너'이다.  '여덟 건의 완벽한 살인'의 경우엔 작가가 오마주 하는 대표적 추리소설 작품들이 곳곳에 퍼레이드처럼 등장하는데, 이들을 알아가는 재미 역시 쏠쏠하다. 추리소설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지적 호기심을 만족시켜주는 데에도 더없이 좋은 작품이 아닐까 생각한다.


하고 싶은 말이 많다 보니 원치 않게 점점 긴 글이 되어가는 것 같아 이쯤에서 멈춰야 할 것 같다.

마지막으로 세 가지만 간단하게 언급하고 싶다.

1. 90년대 후반 텔레비전 예능 '돌아보지 마'(너튜브에 영상들이 올라와 있다) -  당대 최고로 잘 나가던 여자배우들의 담력 테스트. 그들의 반응을 훔쳐보는 재미가 있다. 왜 그런 때 있지 않나, 영화관에서 공포영화를 볼 때 영화를 보고 놀라기보다 옆 친구의 비명소리에 더 놀라 가슴 쓸어내렸던 기억들이...


2. 한국 작가 유현산의 '살인자의 편지' - 개인적으로 공모전 수상작 중 가장 재미있게 읽었던 작품.(사실 공모전 수상작들은 대체로 노잼이다. -_-) 가상의 도시 영흥시를 배경으로 한국의 군대문화와 비주류 인생들의 이야기가 흥미진진하게 펼쳐진다. 작품 전체를 아우르는 음산한 분위기가 여름철 열기를 식히는 데 도움이 돼 줄지도...


3. '진 필립스'의 '밤의 동물원' - 동물원이라는 한정된 공간이 작품의 배경이지만 이야기가 결코 늘어지거나 긴장감이 떨어지지 않는다. 읽고 나면 마치 한 편의 잘 짜인 스릴러물을 보고 난 느낌이 들 것이다. 소설 속 주인공의 시선으로 장면 장면마다 내가 들어가 있는 듯한 현장감에 엄지척을 해주고 싶은 작품.


올여름 많이 더울 것이라는 예보가 있다.

아무쪼록 내 소소한 추천들이 더위를 이겨내는 데 자그마한 팁이 될 수 있기를 바라며 글을 마칠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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