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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뉴 Jul 17. 2022

피아노 연주를 좋아하세요?

피아니스트 임윤찬과 드라마 '밀회'속  피아노 이야기

나는 간헐적 클래식 음악 애호가다.

내 음악적 취향은 미식가'이기보다는 '잡식가'에 가깝다. 평소에는 주로 재즈나 가요, 팝송을 듣지만 때때로 미친 듯이 클래식에 빠져들곤 한다.


사실 중학교 시절에는 나름 클래식을 사랑하는 소녀였다. 친구들이 아이돌이나 팝 그룹에 빠져 있을 때 홀로 '객*'이라는 클래식 음악 잡지를 정기적으로 구입하고, 그 당시 핫한 바이올리니스트나 피아니스트의 음반을 사 모으며 만족감을 느꼈다. 지금 생각해보면 왜 그랬을까 싶기도 하지만, 클래식을 좋아하는 아빠의 영향이 컸던 것 같다.


요즘 난 다시금 피아노 연주에 미친 듯이 빠져들어 있다. 최근 나의 이런 '간헐적 클래식 성향'이 폭발한 계기가 있다. 근래에 뉴스를 본 이들은 익히 들었을 이름, 피아니스트 임윤찬의 '반 클라이번 콩쿠르' 연주 실황을 보고 난 후 머릿속이, 마음이 온통 뒤집어 엎어지는 듯한 충격을 받았던 것이 그 시발점이다.


자신을 '피아노 치는 학생'이라고 말하는 피아니스트 임윤찬은 이제 겨우 만으로 18살이다. 콩쿠르 시작 시에 연주자의 국가명과 나이가 화면에 뜨는데, 화면 아래를 가득 채우는 'South Korea, 18'이라는 문구가 어찌나 자랑스럽게 보이던지... 그런데 그의 연주를 끝까지 다 보고 나면 이 '18'이라는 숫자가 '108'이라고 느껴지는 신비한 체험을 하게 된다.


연주 실시간 댓글창을 비롯해 온갖 너튜브 댓글에서도 빗발치는 'GOAT(Greatest of All Time)'라는 표현이 전혀 아깝지 않을 만큼 훌륭한 그의 연주도 좋았지만, 나에게 더 인상 깊게 다가온 것은 흡사 도인의 경지처럼 느껴지던 그의 얼굴 표정과 재치 있고 카리스마 넘치던 제스처였다.


꽤 많은 피아니스트들이 연주 중에 부담스러울 정도로 과한 얼굴 표정을 보여준다. 그래서 어떤 때는 연주실황을 보기보다는 차라리 음반으로 연주자의 음악을 접하는 게 더 나은 경우가 있다. 그런데 아직 스무 살도 채 되지 않은 그의 얼굴 표정이 모든 것을 내려놓은 듯 초연하다. 고요하고 평화롭다. 그의 모든 감정은 오롯이 그의 손끝에 집약되어 다채롭게 펼쳐질 뿐이다. 그렇지만 그 감정과 마음이 차고 넘치도록 전달된다. 그러다 연주가 절정에 이를 때쯤 그는 '딱 필요한 정도'로 절제된, 그렇지만 열정적인 표정과 제스처로 음악을 끌어간다. 이 지점에서 난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절제된 열정(Restrained passion)'이라고 표현한 어느 평론가의 말에 전적으로 공감하며.


전체 연주에 걸쳐 보이는 그의 제스처 중 하이라이트는 연주 시작 후 28분 50초 지점에서 보인다. - 워낙 순식간에 지나가므로 집중력이 필요하다- 클라이맥스로 이어지는 다음 챕터로 넘어가기 직전, 임윤찬이 폭발적인 '쾅'하는 타건(건반의 두드림)과 함께 순간적으로 오케스트라 쪽으로 튕기듯 돌아앉으며 왼손으로 하는 손짓이 있는데, 그 모습이 마치 오케스트라 단원들을 향해 '자, 이제 저랑 본격적으로 달려 나갈 준비가 되어 있나요?'라고 말하는 것 같다. 비록 어린 친구이지만 오케스트라와 조화롭게 엮어 나가는 완벽에 가까운 호흡과, 그 와중에 간간이, 매우 적절한 때에 빛을 발하는 리더십이 보통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게 하는 지점 중 하나이다.


임윤찬은 결선에서 러시아 작곡가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3번을 연주했다. 영화 '샤인(1997)'에서 '미치지 않고서는 연주할 수 없다'라고 언급되었던 바로 그 작품이다.

개인적으로 러시아 작곡가의 곡을 좋아한다. 러시아 작곡가들 특유의 가슴 절절하게 만드는 드라마틱한 감성이 내 취향을 제대로 저격하기 때문이다. 그들의 작품은 단조의 느낌이 강하게 들며(심지어 장조인데도 단조의 느낌이 난다), 그래서 더욱 삶의 깊은 애환, 페이소스 같은 게 느껴진다. 특히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2번과 3번이 그 정점에 있는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 드라마틱한 곡을 너무도 환상적으로 더 드라마틱하게, 그렇지만 절제된 열정으로 연주한 장면을 목격하고 나니 무어라 표현하기 힘든 감정이 북받쳐 올랐다. 충격적인 것은, 이런 감동을 주는 연주자가 앞날이 무한히 창창한, 이제 겨우 열여덟 살 소년이라는 거다. (나는 도대체 그 나이 때 무얼 하고 지낸 건지, 하는 생각에 자괴감마저 들 정도이다)


결선 곡인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헙주곡 3번의 클라이맥스를 연주중인 피아니스트 임윤찬의 모습. 질주하는 피아노 선율과 함께 격정적인 춤을 추듯 찰랑이는 머리에서 카리스마가 폭발한다

임윤찬의 손끝을 거쳐 나온 음표들은 건반 위를 또르르르~ 굴러 피아노를 잔물결이 이는 호수로 만들었다가 이내 폭풍우가 몰아치는 바다 한가운데로 사정없이 내몬다. 그 와중에도 임윤찬은 음 이탈 하나 없이 완벽하게 곡을 조율해낸다. 이쯤 되면 내달리는 그의 연주와 함께 내 마음속에도 회오리바람이 휘몰아친다. 아직 그의 결선 영상을 보지 못한 이들은, 시간상 전곡을 들어보기 힘들다면, 43분 여의 연주 중 마지막 5분 정도만이라도 한번 보라고 제안하고 싶다. 절제되었지만 폭발하는 열정을 잠시나마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마치 이런 느낌이다. 백 미터를 전속력으로 질주해 10초로 뛰었는데, 그다음 백 미터는 9초, 그다음 백 미터는 8초로 신들린 듯 달려 나가는 기분. 비행기가 이륙하듯 금방이라도 날개를 펼치고 날아오를 것 같은 느낌. 저러다가 피아노 건반이 산산이 부서져 흩어져버리는 건 아닐까 걱정이 될 지경으로 임윤찬의 손끝에서 건반들이 격정적으로 내달린다. 음표 하나하나가 생동감 넘치게 살아 움직인다. 임윤찬은 그 모든 과정을 악보 하나 없이, 오롯이 뼈를 깎는 노력을 통해 체화되어 있는 '머슬 메모리(muscle memory)'로 질풍처럼 끌고 간다. 그가 이끄는 대로 따라가다 보면 가슴 벅찬 전율이 일어나다 궁극에는 마치 천상의 세계에 이르는 듯한 감동이 걷잡을 수 없이 밀려들어온다. 한 콩쿠르 심사위원이 얘기했듯,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3번이 오롯이 ‘임윤찬의 것’이 되는 감격스러운 순간이다.

내가 때때로 클래식 음악에 미치는 이유가 바로 이런 것 때문이 아닌가 싶다. 이 세상의 것이 아닌듯한,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초월적 감동'을 느껴보고 싶어서 말이다.


예술에 온전히 자신을 쏟아붓는 그의 순수한 열정에 경의를 표하고 싶다. 비록 콩쿠르라는 공식적 경쟁의 자리였지만, 그런 조건을 넘어서 오로지 음악에로의 열정을 보여주며 많은 이들에게 큰 감동을 안겨 준 그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하고 싶다.

피아노를 적실 정도로 흘러내리던 그의  땀방울 하나하나가 소중하다. 결선에 오르기까지의 매 연주 후에 눈물을 흘렸다는 그의 어머니의 마음이 십분 이해된다. 오죽하면 노장 지휘자마저 '임윤찬과의 이번 협연이 자신의 인생에서 최고의 하이라이트' 였다고 말하며 감격의 눈물을 훔쳤을까...

또 한 명의 위대한 연주가의 탄생을 목격하게 되어서 행운이라는 생각이 든다. 특히 그 연주가가 우리나라 사람이라는 사실에, 같은 경기도민-임윤찬은 시흥 출신이다. 이렇게라도 엮어지고 싶어지는 마음이란...-이라는 것에 더욱...  앞으로 음악을 향한 그의 순수한 열정을 멀리서, 오래도록 응원하고 싶다.




피아노 연주에 빠져들다 보니 생각나는 드라마 하나가 있다. 8년 전 Jtbc에서 방송됐던 드라마 '밀회'이다.

'밀회'는 드라마 포스터에서도 그 분위기가 물씬 풍겨 나듯 소위 '불륜 드라마'다. '불륜'이라는 금지된 사랑의 관계에 이르게 된 주인공들-이선재(유아인 분), 오혜원(김희애 분)-의 심리에 심히 공감이 가고 드라마의 미장센 또한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하지만, 소재가 주는 거부감 때문에 사실 처음에는 보고 싶은 마음이 그다지 들지 않았던 작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 드라마에 빠져들 수밖에 없었던 것은 드라마 전편에 걸쳐 때로는 화려하고 때론 아련하게 넘쳐흐르던 아름다운 피아노 선율 때문이었다. 이 작품을 보다 보면 이야기에 매력을 더하는 데 음악이 얼마나 큰 역할을 하는지 확실히 알 수 있게 된다.


그중에서도 가장 기억에 남는 음악과 장면을 꼽으라고 한다면, 2회의 선재와 혜원이 함께 피아노 치는 장면-제일 윗 상단의 사진 참고-과 마지막 회에서 모차르트의 피아노 선율에 더해져 흘러나오는, 선재가 혜원에게 보내는 내레이션 부분이다.


2회의 선재와 혜원이 슈베르트의 '네 손을 위한 환상곡'을 치는 장면에서 나는 마치 심장에 어퍼컷을 맞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이 장면은 내가 이제껏 봐 왔던 그 어떤 영화나 드라마 장면보다 에로틱하고 성적인 긴장감이 농밀하다. 드라마는, 앞으로 펼쳐질 그들의 금지된 사랑이 격정적이면서도 부드러운 슈베르트의 피아노 곡 뒤에 숨어서 슬쩍슬쩍, 보일 듯 말 듯 비치는 이 장면을 통해 일명 '귀르가즘'이 어떤 것인지 제대로 보여준다. 이 장면에서 그들은 그 흔한 속살 하나 보여주지 않고 손 한 번 잡지 않는다. 그럼에도 음악에 대한 열정으로 한 몸이 되어 격렬하게 치닫는 그들의 감정선을 따라가다 보면 오르가슴을 넘어서는 '그 무엇'이 느껴진다. 남녀 간의 사랑을 이보다 더 고상하면서도 섹시하게 그려낼 수 있을까, 하는 생각마저 들게 하는 장면이다.


혜원을 그리워하며 모차르트의 곡을 피아노로 매만지듯 연주하는 선재

마지막 16회에서는 선재가 감옥에 간 혜원을 생각하며 모차르트의 '피아노 론도 A단조'를 연주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리고 이내 모차르트의 선율을 타고 혜원에게 바치는 선재의 아련한 내레이션이 흐른다. 선재가 얘기하듯, 이 장면에서 모차르트의 곡은 피아노로 '치는' 게 아닌 '만지'는 대상이 된다. 여기에서 선재는 피아노를 매만지며 혜원의 몸을, 그녀와의 뜨겁고 애틋했던 정사의 순간들을 떠올리며 혜원을 가슴 시리도록 그리워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래서인지, 대부분의 모차르트의 작품들이 그렇듯 잔잔한 물결이 일듯 서정적인 이 곡이 매우 강렬하고도 절절하게 다가온다. 선재가 '겁나 섹시한 당신'이라고 칭하는 혜원을 떠올리며 피아노를 '만진다'는 느낌이 어떤 건지 조금은 알 것 같은 기분이 된다.


뮤직비디오를 보면 사랑 노래가 더 가슴 아리게 다가오듯, 드라마 '밀회'를 보면 조금은 어렵고 멀게 느껴질 수도 있는 클래식 피아노 곡들이 머리에, 가슴에 쏙쏙 들어와 박힌다. 밋밋한 일상에 지쳐 애끓는 사랑 얘기에 더해진 클래식이 선사하는 '귀호강'을 마음껏 느껴보고 싶은 이들에게 추천하고 싶은 드라마다.


여담으로, 2013년 MBC에서 방영된 '하늘재 살인 사건'이라는 단편 드라마에 대해 잠시 언급하고 글을 마칠까 한다. 탤런트 서강준과 문소리 주연의 이 드라마는 1950년대를 배경으로 한 일종의 시대극이다.

여기에 등장하는 피아노 곡 또한 마음을 찢는 듯 감성이 폭발한다. 비주얼에 더해진 음악적 감동이 가장 큰 지점 중 특히 기억에 남는 두 장면이 있다.

리즈 시절 서강준의 외모를 더 빛이 나게 품어주며 흘러나오는 피아노 연주를 듣다 보면, 가뜩이나 멋진 주인공의 외모에 환상적인 음악적 후광이 더해져 (여성) 시청자들은 비주얼 쇼크(visual shcok)'에 빠지게 된다. 개인적으로 이 작품에서의 서강준 역할이 그 어떤 작품에서보다 가장 멋있었다. 그건 아마도 음악의 힘이 크지 않을까 싶다. 자세한 건 아래 사진에 덧붙여 소개하고자 한다.

텔레비전 채널을 돌리다 우연히 이 장면을 맞닥뜨리고 채널을 고정할 수밖에 없었다. 심금을 울리는 피아노 반주에 더해진 1차 비주얼 쇼크 지점
가슴을 후벼 파는 듯한 엔리오 모리꼬네의 영화 ‘러브 어페어’ 주제곡이 피아노 선율을 따라 흐른다. 이 미친 비주얼과 음악에 사정없이 나대는 심장을 어이하리오…ㅠ




하고 싶은 말이 많아서인지 이번 주는 예전과 달리 글이 심각하게 길어진 것 같다. 글을 읽고자 들어온 이들 대부분이 중간에 끊고 나갈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지만, 어쨌든 여기까지 글을 읽는 누군가가 분명히 존재할 테니 글을 끝까지 끌고 나가 마무리지어야겠다. 피아노 연주곡에 대한 애정이 있는 그 누군가를 위해서….

내 마음과 통하는 동지가 되어 준 그(녀)에게 시간 내어 여기까지 글을 읽어주어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클래식에 너무 빠지다 보니 최근 내 몸이 공중 부양해 있는 듯한 기분이 든다. - 클래식에 지나치게 빠질 때 나타나는 부작용이다 - 이제 현실 세계로 다시 내려와 지상에 발 디뎌야 겠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은 ‘FT아일랜드’의 가슴 절절한 사랑 노래에 내 감성을 푹 담가보려 한다. 인생의 어떤 영역에서든지 적당한 균형을 유지한다는 건 매우 중요한 일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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