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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뉴 Oct 09. 2024

브런치 팝업 전시를 다녀온 날

브런치 '작가의 여정' 팝업 전시회가 열리고 있는 곳은 성수동에 자리 잡고 있는 작은 스튜디오였다. 마음먹고 몇 걸음만 내디디면 홀의 끝에서 끝까지 성큼 건너갈 수 있을 것 같았던.



20대 청춘의 끝을 떠나온 지가 언제인지도 가물가물해지는 주부의 삶을 살고 있다 보니, '힙'하다는 것과는 심리적으로나 물리적으로나 멀어지게 되어, '성수동'에서 열리는 '팝업' 전시회라는 말에 처음에는 약간의 거리감이 느껴진 것이 사실이다. 짝꿍이 입버릇처럼 내뱉는, “흠.. 여기는 내가 올 곳이 아니군.."이라는 생각이 언뜻 스쳐 지나갔다고나 할까.

하지만 그것은 말 그대로 ‘언뜻’이었다. 결국 내 마음과 몸을 움직인 것은, 성수동에 대한 거리감보다 브런치와 글쓰기에 대한 애정과, 나와 같은 마음을 지닌 사람들을 만날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이었다.



기어이, 부탁하지도 않았는데, 함께 가주겠다며 따라붙은 짝꿍과 함께 전시가 열리고 있는 '토로토로 스튜디오' 앞에 도착한 건 예약했던 시간보다 10분 이른 일요일 오전 11시 20분경이었다. 점심이 되기 전이라 그런지, 휴일이었음에도, 아직 전시회장을 찾은 사람이 많지 않은 듯, 전시회장 주변엔 한적한 기운이 감돌았다.


  "내 이럴 줄 알았어. 사람이 많이 올 것 같지는 않더라니..."


짝꿍은 자신의 예감이 들어맞았다며 은근 자부심을 느끼는 듯했지만, 웬걸, 전시장의 입구로 들어서자, 글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온기, 애정하는 대상을 향한 열의와 책의 향기가 전하는 분주한 기운에, 금세 마음이 풍만하게 차오르는 느낌이었다.

11회 브런치북 대상 수상작들

본격적으로 전시물들을 만나기 전에 즉석 사진을 찍고 '작가 카드'를 만들었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내가 팝업 전시회장을 꼭 가보고 싶었던 이유에는 작가 카드와 브런치만의 모던한 블랙으로 디자인된 '마우스 패드'를 갖고 싶다는 세속적 물욕이 적지 않은 역할을 했다. 어린 시절, 곰보빵이나 쌈박한 학용품에 눈이 멀어 생애 처음으로 교회를 갔던 어느 날처럼.



처음으로 맞닥뜨린 것은 '11회 브런치북 대상' 수상작가와 작품들이었다. 브런치에서 파편적으로 읽었던 글들이 정교하고 아름다운 책의 형상을 입고 전시되어 있는 모습을 보자니, 감격스러움과 부러움과 알 수 없는 기대감이 절묘하게 섞인 듯한, 묘한 기분에 젖어들었다. ‘계속 쓰는 삶'을 살고 싶은 무명의 작가지망생으로서, 부러운 시선으로 나를 앞서가고 있는 동료들에게 박수를 보내주고 싶은 동시에, 언젠가는 나도 그들을 뒤따라 이 자리에 설 수 있는 날이 오면 좋겠다는 바람이 거세게 일기도 했다.

이런 내 마음을 알고 있기라도 한 듯, 전시회장 곳곳에는 글을 쓰는 마음을 보듬어주는 문구들이 시선이 닿는 곳마다에서 열렬히 빛을 발하고 있었다. 마치 ‘너, 지금 잘하고 있는 거야. 앞으로도 쭉, 우리와 함께 놀자.’라고 다정하게 말을 건네는 것처럼.



작가들이 내어놓은 귀한 소장품들을 보면서는, 브런치라는 광활한 글쓰기의 바다에서 선구자가 되어 나아간 이들의 손때 묻은 메모지 한 장, 아끼는 책 한 권, 글벗에게 건네는 귀한 말 한마디가 가슴 깊숙이 별처럼 와 박히는 것 같았다.

정혜윤 작가의 소장품과 인상적인 메모들
임홍택 작가의 글쓰기 연대기, 메모와 사진들

브런치가 개설된 2015년 즈음부터 활동을 시작한 '브런치 1세대' 선배들의 행보가 시간 순으로 기록되어 있는 벽을 마주한 순간, 내가 어쩌다 운 좋게 브런치에 흘러들어오게 되었을까, 괜스레 마음이 울컥해졌으나, 그것도 잠시, 이내 설렘 가득한 방랑자의 마음이 되어 전시장 구석구석을 거닐었다.



여태껏 여러 전시장을 다녀봤지만, 여기만큼 내 발걸음을 오래도록 붙든 곳은 없었던 것 같다. 평소의 나였다면 이 정도 규모의 전시장에서는 삼, 사십 분 정도 머무르는 게 다였을 텐데, 브런치 작가들이 건네는 다정한 말들에 마음을 홀딱 빼앗긴 나는 한 시간이 넘도록 있었음에도 그곳을 떠나오기가 아쉬웠다. 지난 일주일 먹고사는 일에 지쳐있던 내 몸과 마음이 가없는 위로와 격려를 받은 느낌에 오래도록 머무르고 싶어서였을까.

역대 브런치북 수상 작품들

이번 관람 중 개인적으로 가장 신기했던 지점은, '5인의 브런치 작가'들이 나를 브런치로 이끌어 준 듯한 느낌을 받았던 순간이었다. 브런치 작가가 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하고 있던 때, 교보문고 'VORA'의 북토크  행사장에서 만났던 임홍택 작가, '브런치북 수상작’이라는 타이틀이 덧입혀진 따뜻한 표지를 맞닥뜨린 순간 작가에 대한 그 어떤 정보도 없이 냉큼 서점 매대에서 책을 집어 오게 만든 <어서 오세요, 휴남동 서점입니다>의 황보름 작가, 독립출판을 준비하며 우연히 알게 된 <퇴사는 여행>의 정혜윤 작가. 그때를 돌이켜보자니, 그들 모두 내가 브런치와 인연이 닿을 수 있도록 앞에서 따뜻한 손을 내밀어 주었던 게 아닐까, 어쩌면 브런치와 나와의 인연은 우연보다는 필연에 가까웠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휴남동 서점에서 막 건너온 것 같은 정서의 식빵 수세미와 민준의 커피 그라인더

작가의 글쓰기 연대기에 시선을 담그며, 지금 내가 쓰고 있는 글 하나하나가 훗날 나의 글쓰기 역사로 남겠다는 생각에, 무엇 하나 허투루 해서는 안 되겠다는 마음을 다지게 되었다. 문장이 글이 되고, 글이 책으로 거듭나듯, 비록 지금은 미미하게 보일지라도 결코 포기하지 않고 묵묵히 나아가 보아야겠다는 다짐 또한. 그러다 보면 그 끝에 무언가 좋은 것이, 어제 보다 나은 내가 기다리고 있으리라는 기대감이 전시장에 머무르는 내내 나를 들뜨게 했다. 이제껏 그 어느 전시장에서 내가 이런 기분을 맛보았던가. 그것은 분명 브런치만이, 브런치의 이웃 작가들만이 내게 줄 수 있는 특별한 감흥이었다.

‘작가가 작가에게' 보내는 메모를 꾹꾹 눌러써 벽에 붙인 후, 다른 작가들의 메모를 눈으로 훑으며 그 앞에서  한참을 서성이며 서 있었다. 떠나오면 언제 또다시 이 장면을 볼 수 있을까, 하는 마음이 자꾸만 내 발걸음을 붙잡았던 것 같다.



아쉬운 마음을, 브런치 론칭 10주년인 2025년에 대한 기대감으로 희석시키며 전시장의 마지막 칸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마침내 손안에 받아 든 ‘브런치스토리 한정판 마우스패드’. 모던하고 깔끔한 디자인도 좋았지만 나는 무엇보다 그 안에 새겨진 글귀가 마음에 와닿았다. 글 쓰는 삶을 살고픈 내 마음에 용기를 불어넣어 끝내는 가슴이 웅장해지게 만들었던 C.S. Lewis의 문장이.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아무것도 없는 백색의 화면을, 위로와 공감을 건네고, 지식을 배불리 하며, 타인에 대한 이해를 깊이 있게 해 주는 공간으로 거듭나게 하는 것은 결국, 그 안을 자유로이 뛰어노는 글의 힘일 테다.



사차원을 넘어, 우주를 통틀어도 존재하지 않을 것 같은 오차원의 세계도 창조해 낼 수 있는 글쓰기의 바다. 그 드넓은 가능성의 공간에 발끝 하나라도 담그고 있다는 생각에 이르자, 마침내 가슴이 북받치도록 설레었던 시간.

아름다운 시월의 어느 날, 브런치 팝업 전시장에서 보낸 선물 같은 하루였다.

전시를 보고 나오는 길에 마주친 성수동의 신박한 가게들
팝업 전시장에서 데리고 온 녀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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