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t 2. 북토크 (feat. 박상영 작가)
절정에 달한 찜통더위로 인해 지하철에서 숨을 들이켜는 것조차 답답하게 느껴지던 날이었다.
노상에서 단 몇 분 만 걸어도 등에서 마르지 않는 육수가 샘 솟아나기라도 하듯 땀이 줄줄 흘러내렸지만, 새로 나온 작품에 대한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 말겠다는 일념으로 지친 몸을 이끌고 북토크장으로 향했다.
목구멍에 가뭄이라도 난 듯 격하게 올라오는 갈증을 참지 못하고 편의점에서 탄산수 한 병을 사들어 마침내 북토크장에 도착했을 때, 나도 모르게 안도의 깊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마치 천국에라도 들어선 사람처럼 기쁜 마음으로 탄산수 병뚜껑을 씩씩하게 땄다.
"취~이익!!!"
나도 모르게 병을 흔들어대며 온 건지 그 순간 탄산수가 활화산처럼 폭발했고, 내 상의는 터져 나온 탄산수로 인해 흠뻑 젖어버렸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있던 앞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내게로 쏠렸다. '이 사람 뭐야?'라고 말하는 듯한 낯선 눈빛들에 몹시도 창피했지만,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들고 있던 가방으로 슬그머니 상의를 가렸다.
더위를 먹은 데다 창피함까지 더해져 반쯤은 넋이 나간 상태에서 출석 체크를 하고, 쌩하니 북토크장으로 들어서려던 내 눈에 노란 포스트잇들로 가득 채워진 질문지함이 들어왔다.
이제껏 북토크장에서 (작가에게 보내는) 질문지를 적어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는데, 어쩐지 이날은 생각 회로를 돌리기도 전에 내 손이 앞장서서 질문을 적어 내려가고 있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이거슨 운명과도 같은 것이었다!)
북토크장은, 사회를 맡았던 김하나 작가의 말처럼, 아이돌 가수에게 있어 '체조 경기장'과도 같은 규모였다.
이전에 참석했던 박상영 작가의 북토크도 이곳에서 열리긴 했지만, 이번에 보니 새삼 그 규모가 놀라웠다. 400석 가까운 좌석이 작가를 보고자 온 독자들로 만석이었다. 알고 보니, 작가 정세랑과 한강도 이곳에서 북토크를 진행했다고 한다.
자리를 잡고 앉아 선선한 실내공기에 정신이 들 때쯤 북토크가 시작되었다.
황선우 작가와 동거하며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를 공동으로 집필한 김하나 작가의 찰진 입담과, 침착하면서도 부지불식간에 독자들의 웃음 버튼을 눌러대던 장류진 작가의 말솜씨로, 90분이 훌쩍 넘는 시간이 어떻게 지나가는지도 모르게 빠르게 흘러갔다. 20대 초반까지만 해도 소설 쓰기에 관심도 생각도 없었다던 그녀가 이 자리에까지 오게 된 과정을 즐겁고도 생생하게 공유하는 시간이었다.
최근 처음으로 독립출판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심적으로나 여러 가지 면에서 난관을 겪고 있는 나는, 그녀의 이야기를 들으며 많은 위로와 도움을 얻을 수 있었다.
많은 과정들이 그러하겠지만 '글쓰기'는 끝없는 자기 내면과의 싸움인 것 같다.
'내가 해도 될까? 내가 할 수 있을까?' 하는 질문들과 시시때때로 부대끼며 널뛰는 감정에 휘둘리다 보면, 어느 순간에는 멘탈이 두부처럼 바스러지는 듯한 느낌마저 들지만, 그럼에도 끝내 스스로의 자존감과 자신감을 지켜내야만 하는 것이 글을 쓰는 과정이라는 사실을 깨달아가고 있는 요즘이다.
'내가 무슨 글을 쓴다고? 책은 아무나 내는 게 아니잖아?'라는 생각에 포기하고 싶다가도, '분명 내 이야기를 들어주고 좋아해 줄 그 누군가가 있을 거야'라는 대책 없는 낙관이 불쑥불쑥 고개를 내밀곤 한다.
이런 내게 작가 장류진은 말했다. 그녀도 결코 다르지 않았다고. 다만, 그 시간들을 잘 버텨냈기에 지금의 그녀가 존재하고 있는 거라고..
고생해서 오기를 잘했다며 흡족해하고 있던 찰나, 기대하지 못했던 기분 좋은 일이 내게 일어났다.
반쯤 정신줄을 놓은 상태에서 땀과 탄산수에 찌든 손으로 구기듯 접어 넣었던 내 질문지가, 북토크의 마지막 질문으로 뽑힌 것이었다. 그 수많은 관객들의 질문지들 중에서 말이다.
더 신기했던 건, 내 앞에 선택되었던 세 질문지가 기존의 질문과 유사하다는 이유로 줄줄이 낙마한 끝에 내 질문이 김하나 작가의 손끝에 떡하니 걸려들었다는 사실이다. 마치 북토크의 대미를 장식하듯.
작년에 '드라마 대본 쓰기' 강의를 듣는 동안, 장류진 작가가 같은 수업의 수강생이었을 때 앉았다는 자리 근처를 괜스레 얼씬 거렸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리 하면 좋은 기운을 받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서였던 것 같다. 하지만 내가 작가로서의 그녀에게 가장 하고 싶었던 질문이, 그녀와 함께 한 현장에서 채택되어 그녀의 육성으로 답이 되어 돌아온 그 상황 자체가 내겐 더 큰 '길운'으로 느껴졌다.
평소 미신도 종교도 믿는 편은 아니지만, 어쩐지 때때로 나도 모르게 초자연적이고 초월적인 '그 무엇'에 마음을 기대고 싶어지는 경우가 있는데, 이날의 내가 그러했다.
시작은 힘겨웠지만 끝은 아름다웠던 이날. 북토크를 마치고 나오던 길에 나는 기분 좋은 상상을 해보며 집으로 발길을 돌렸다. 밤의 가로수들에서 매미 소리가 시원하게 울려 나오던, 공기마저 제법 상쾌해진 여름밤이었다.
브런치 글동무인 ‘담담글방’ 작가님의 글에서처럼 '얼굴 없는 유명 작가'가 되는 상상을, 언젠가 나도 '성덕'이 되어 나의 스타를 만나는 장면을, 마침내 새로운 삶을 주체적으로 살아가고 있는 나를 머릿속으로 그려보며 버스에 올랐다.
장류진 작가처럼 재능 있는 이가 목디스크를 감내하며 버텨내도, 소설 속에 등장하는 ‘쿨팬티’라는, 가장 적합할 표현 하나를 찾아내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기울이며 (글쓰기에) 임해도 겨우 이루어질까 말까 한 높디높은 꿈이겠지만,
더위에 지치는 오늘 같은 날, 나를 위한 즐거운 상상만큼은 아낌없이 누려도 좋은 것일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