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적으로 추리물-혹은 스릴러물-을 좋아한다. 아서 코난 도일, 아가사 크리스티, 셜록홈스, 미스 마플... 내 눈과 정신을 번쩍 뜨이게 하는 이름들이다.
누군가는 말했다. 추리나 스릴러 장르를 좋아하는 이유는 아마도 우리가 ‘안전한 쾌락’을 즐기기 때문일 거라고. 매우 설득력 있는 말이라는 생각이 든다. 소설 속 주변 인물들이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극한의 상황 속에 몰려 잔인한 형태로 죽어나가는 이야기에 흥미를 느낀다는 건, 그 이야기가 내 현실과는 동떨어져 있음을 알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나 자신은 다른 세상의 안락한 곳에 앉아 그들을 온전히 제삼자의 입장에서 지켜보며, ‘범인은 누구일까?’ 같은 시답잖은 수수께끼나 푸는 재미를 느끼고 있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스릴러가 현실이 되었을 때, 그건 더 이상 내게 ‘흥미로움’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던 사건이 있었다.
셜록홈스가 태어난 고장, 스코틀랜드 에든버러에 잠시 머물렀던 적이 있다. 오늘은 에든버러에서 겪었던 내 생애 가장 섬뜩한 휘파람 소리에 대해 얘기해 보려 한다.
크리스마스를 얼마 앞둔 겨울이었다. 그날은 같은 어학원에 다니던 일본인 친구 미치코의 생일이었다. 메이지 시대의 그림에 나올 법한 얼굴을 한 그 아이에게는 스코틀랜드인 남자 친구가 있었다. 그는 미치코를 몹시 사랑하는 것처럼 보였고, 어학원 수업이 종료되면 함께 일본으로 갈 생각도 있다고 말했다. 미치코는, 생일파티를 남자 친구의 아파트에서 할 거라며 조촐하게 함께 하지 않겠냐는 제안을 해왔다. ‘스코틀랜드의 아파트는 어떤 모습일까?’ 호기심이 일었던 나는 선뜻 그러겠다고 대답했다.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아직도 기억난다. 조명 하나 켜져 있지 않아 어슴푸레했던 아파트 거실. 그 안에서 50년은 버티고 있었을 것 같은 빛바랜 소파. 그 소파에 앉아 맞은편 나는 없는 사람인양, 서로 다정한 눈빛과 열정적 스킨십을 주고받던 커플. 미치코의 남자 친구는, 예전에 ‘금기시된 것’을 피우다 회복 중이라고 했는데, 왠지 눈빛에 초점이 없어 보였고 목소리도 시종일관 흐느적거렸다. 그리고 트래비스의 음악이 흐르고 있었던가...? 그 시간, 그곳의 느낌은 딱 ‘스코틀랜드의 그것’이었다.
아파트를 나와 오래된 클럽에 갔다. 담배연기가 자욱했던 곳이었고 우린 주크박스에서 돌아가며 음악을 주문했다. 그러나 그 이후에 어떤 일을 했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오랜 시간이 흐른 후의 기억은 마치 사진처럼 비연속적으로 머릿속에 인쇄되어 있는 것 같다. 특별히 인상 깊은 경험이 아니라면 말이다.
스코틀랜드의 겨울밤은 유난히 길다. 오후 세 시만 넘으면 벌써 어둠이 스며들기 시작한다. 그날은 밤 10시가 넘어 친구와 헤어졌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분명 낮에는 꽤 쉽게 찾아갔던 친구 집이었는데, 밤이 되어 돌아오는 길은 사뭇 달라 보였다. 원래 탔어야 했던 버스를 놓치고 다른 노선을 타고 와서이기도 했겠지만, 어둠이 깔린 낯선 이국의 도시를 홀로 가르며 돌아오는 길에는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두려움이 동반됐다. 거기에 추적추적 내리던 밤비까지....
내가 다니던 학교 근처의 공터에서 내렸다고 생각했는데 그곳이 아니었나 보다. 걸어도 걸어도 내가 알던 건물이, 길이 보이지 않았다. 그 당시 영국에는 연쇄살인사건에 관한 기사가 돌고 있었는데 하필 그 순간, 내가 읽었던 기사들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나도 모르게 발걸음이 빨라지기 시작했다. 어느 길로 가야 할지 헷갈렸지만 일단 환한 곳으로, 사람들이 보이는 곳으로 가자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습한 어둠 속 공기를 가르고 뒤통수로 희미하게 날아드는 휘파람 소리가 들려왔다. ‘휘이~~ 휘이~~~’ 순간, 머리카락이 일제히 곤두서는 것 같았다. 그건 분명 휘. 파. 람.이었다. 그것도 아주 기분 나쁘게 섬뜩한. 뒤통수 위로 재빨리 우산을 펼쳐 들고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내 발이 어디로 향하는지도 모른 채 그냥 앞으로, 살아야 한다는 마음만으로... 아는 사람 하나 없는 머나먼 이국의 땅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질 순 없었다.
그렇게 얼마를 미친 듯이 달렸고 난 그날 ‘운’이 좋았다. 어디로 향하는지도 모른 채 달려갔던 길 끝에 익숙한 풍경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내 그 어느 때보다 따스하게 스며 나오던 불빛들과 크리스마스 장식들이,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윽고 내 눈앞에 나타난 나지막한 언덕. 내가 기거하던 홈스테이가 있는 곳이었다. 순간 울컥하는 마음이 일었다. 난 마치 지옥 끝에서 가까스로 살아 나온 것 같았다.
지금도 알지 못한다. 그때의 섬뜩했던 휘파람 소리의 정체가 무엇이었는지를. 돌이켜보면 내 상상 속 환청 같은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도 확실히 알게 된 것이 있다. 현실 속에서의 스릴은 단순히 흥미 넘치는 스릴이 아님을, 그리고 실체를 알 수 없는 것에 대한 공포심은 그 어떤 두려움보다 커 내 온몸과 정신을 지배할 수 있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