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방학을 맞은 딸의 하루는 대체로 침대에 누워있는 자세로 굴러간다. ‘전국 집에 누워있기 연합' 깃발에 그려진 캐릭터와 98퍼센트쯤 유사한 모습으로.
노크하고 약 삼초를 센 후 방으로 들어서면, 딸은 시선만 돌린 채 무슨 용무로 자기를 찾아온 건지 눈빛으로 묻는다. 내가 딸에게 건네는 말이란 주로 ‘엥겔 계수’를 높이는 데 기여하는, 일차원적인 것들이다. 점심 뭐 먹을래?'와 같은.
하루 종일 방에서 무얼 하고 있는지, 끼니때가 되어 먹을 것만 챙겨주면 딸은 별 탈, 별 불만 없이 잘 지내는 듯한데, 이러한 일상이 반려닭 김치의 그것과 무에 크게 다를까 싶다. 아니다. 김치는 아침에 눈 떠 밤에 둥지 안으로 복귀할 때까지, 세상 부지런한 부리를 레이더 삼아 집안 곳곳으로 탐험이라도 나서지, 딸은 평상복이 되어버린 잠옷바람으로, 마치 침대밖이 바다로 둘러싸인 곳에 사는 육상동물인 것처럼, 한 평도 안 되는 침대를 사수한 채 하루 거의 대부분을 보내고 있다.
몇 주전 겨울방학에 들어간 딸은, 2학기 동안 빡빡한 스케줄 때문에 힘겹게 보내었으니 1월 한 달만큼은 휴식을 취하며 자유로운 영혼으로 지내고 싶다며, 2월이 되면 고등학생이 될 준비를 시작할 것이라고 기세도 당당하게 선포했었다. 일단 믿어주자는 마음에 저 하고 싶은 대로 두었는데, 웬걸, 2월이 되고,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가도록 딸에게선 영 달라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침대와 완벽하게 일심동체가 되어가고 있는 모양새였다. 1월보다 더 가혹해진 날씨마저 딸을 이불속으로 더 밀어 넣는 듯했다.
“하루 온종일 지루하지도 않냐?”
이렇게 묻는 내게, 무슨 그런 질문이 다 있냐는 표정으로 딸에게서 날아온 대답은,
“아니, 전혀.”
저것도 능력이면 능력이랄까. 단 며칠만 집에 머물러 있어도 무료해지고 좀이 쑤시기 마련인 것을, 어항 속 물고기처럼, 얼마 되지도 않는 행동반경 내에서 별다를 것 없이 정체되어 있을 일상에 전혀 지루함을 느끼지 않다니.. 그런 생활을 못 견뎌하는 나로선 이런 딸이 그저 신기할 따름이다. 그와 동시에 엄마로서 경각심이 일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더 이상 그대로 두다가는 '침대늘보'가 되어버린 딸이 새 학기를 적응하는 데에도 문제가 생길 것 같았다. 몸을 움직이지 않으면 않을수록 '멈춰 있음'에 관성이 생겨버리는 경우를 나 자신도 익히 경험하질 않았나. '일단 네안이를 침대밖으로 끌어내라.' 내 머리가 연신 이렇게 명령하고 있었다. 그러기 위해선 그럴싸한 유인책이 필요해 보였다.
쇼핑. 그래 쇼핑을 가야 된다고 하면, 딸은 이불을 걷어 젖히고 방을 나와 집밖으로 나설 수밖에 없을 것이다. 새 가방과 운동화, 학습서가 필요하다고 했으니. 무엇보다 까다로운 딸의 취향을 고려했을 때, 고등학교 내내 들고 다녀야 할 가방만큼은 자신이 직접 살펴본 뒤 사고 싶어할 것이라 합리적으로 추측할 수 있었다.
"너, 캉* 가방 사고 싶다고 하지 않았어? 아무래도 가방은 직접 보고 사는 게 여러모로 좋을 텐데?... 사러 가기 귀찮으면 그냥 중학교 때 쓰던 가방 계속 쓰고... 딱히 낡아 보이지도 않는데?!"
처음 듣는 둥 마는 둥 했던 딸의 표정이 '쓰던 가방 계속 쓰고’ 지점에서 드라마틱하게 변화했다. 역시나, 딱 걸려들었다. 이윽고 딸의 무심했던 시선이 제법 또롱또롱해져 나를 향했고, 눈빛에는 갈등의 흔적이 서려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쇼핑하는데) 시간 얼마나 걸려?”
딸이 소요 시간을 물어본다는 건 이미 마음이 반 이상 이쪽으로 넘어왔다는 표시다. 승리를 확신하며 마음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드디어, 우리 모녀는 외출을 감행했다. 감행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것이, 나도, 딸아이도 길 찾기엔 영 소질이 없는데, 우리가 향한 목적지가, 길치들이 다니기엔 다소 높은 난도의 구조를 지닌 대형 쇼핑몰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떠랴, 일단 딸과 함께 쇼핑을 위해 집을 나섰다는 사실 자체가 중요했다. 그것만으로도 나와 딸의 일상엔 작은 모험이, 더 많은 대화와 웃음을 나눌 수 있는 귀한 시간이 시작되는 것이었기에. 그리고 이런 기회는, 딸이 사춘기로 접어들고난 후, 몹시도 드물게 주어지는 것이다.
다른 공간에서 느릿하게 흘러가던 각자의 시간이, 이불을 박차고 나온 쇼핑의 여정에서 하나로 합류되어 시너지를 일으키기 시작했다. 우리는 사람들 사이를 흘러 다니며 온갖 종류의 신상들을 구경하고, 잠들어 있던 후각을 활짝 열어 다양한 음식 냄새를 섭렵하며, 오늘 저녁 메뉴는 무엇으로 할까, 서로의 의견을 교환했다.
우왕좌왕 길을 헤매고, 서로 길치라 면박 주면서도 결국엔, 우리는 염두에 두고 있던 목표물을 꽤나 만족스럽게 획득했다. 천천히 목표지점으로 향하느라 오히려 더 많은 이야깃거리들을 만들 수 있었다. 일상의 때가 묻어있는 집을 벗어나자 웃음소리의 시간이 더 길어졌다. 추위에 움츠러들었던 어깨가 펴지자, 처져있었던 몸의 틈 사이로 활기가 배어들었다. 자칫 우울과 무기력에 잠식당하기 쉬운 흐리고 추운 겨울날, 역시 집밖으로 나서 열심히 직립보행하며, 사람들의 집단적 온기를 맞이해 볼 일이다.
딸도 나와 같은 것을 느꼈던 걸까. 어쩐지 집으로 돌아온 딸은 평소보다 더 활기찬 모습으로 밤을 맞이하는 것 같았다. 비록 내일이면 별다를 것 없는 일상이 또다시 우리를 맞이할 테고, 쇼핑한 물건들이 주는 만족감의 유효기간은 짧겠지만, 어떠랴. 오늘의 우리가 공유했던 그 시간만큼은 우리의 오감에 맛있는 대화와 웃음으로 남을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