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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주변을 서서히 침범해 오는, 가스라이팅

by 지뉴
가스라이팅: 상황 조작을 통해 타인의 마음에 자신에 대한 의심을 불러일으켜 현실감과 판단력을 잃게 만듦으로써 그 사람을 정신적으로 황폐화시키고 그 사람에게 지배력을 행사하여 결국 그 사람을 파국으로 몰아가는 것을 의미하는 심리학 용어

근래에, 오랫동안 알고 지내왔던 지인 K를 잃었다. 물론 잃지 않고자 마음먹었다면 그럴 수도 있었겠으나, 도무지 아무렇지 않은 척, 가식의 웃음을 걸치고 겉만 빙빙 도는 대화를 나누면서 K와 예전처럼 지낼 자신이 없었다. 굳이 그러고 싶지도 않았고. 중년에 이르고 보니, 이런 무의미한 관계를 억지로 붙들고 있을 힘이 소진된 건지 어떤 건지, 놓아버리는 데에 점점 익숙해지는 것 같다. K와 관련해 내가 맞닥뜨린 상황이 처음엔 무척 당황스럽고 화가 나기도 했는데, 곰곰이 생각해 볼수록, 이야기는 예정된 수순대로 이어져 정해진 결과에 도달했다는 생각이 짙어진다. 단지 내가 그걸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을 뿐.


M은 K의 술친구였다. 내가 보기에 둘 사이에 딱히 대화가 - 대화의 소재라고 해봐야 주로 연예계 뒷담, 먹방이나 성적인 것과 관련된 주제가 오가는 너튜브가 거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듯 보였다 -잘 통하는 것 같지는 않았지만, 그 누구에게도 간섭받지 않는 자유로운 싱글라이프를 즐기고, 술을 무척이나 애정한다는 점에서 둘은 몹시도 잘 통하는 친구인 것 같았다. M의 첫인상은 그리 나쁘지 않았다. 별다른 특징 없는, 지방의 소도시에서 갓 상경한 사람처럼 보이는 소박한 분위기가, 내가 별 거리낌 없이 M을 K의 친구로서 받아들이게끔, 그리하여 M이 내 친구가 될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게끔 만들었던 것 같다. 그것이 나의 대단한 착각이었다는 것을 깨닫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한때 온 나라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가평 계곡살인사건' 기사를 접하며, 함께 한탄하고 분노를 표하던 K였는데, 그로부터 몇 년이 채 지나지 않은 지금 K의 모습은, 정도만 다를 뿐, 기본적으로 그 사건의 희생자의 모습과 크게 달라 보이지 않는다. 내가 판단하기에 K는, M에게 자신도 모르는 사이, 지속적으로 가스라이팅을 당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내가 이러한 사실을 어느 정도 확신하게 된 데에는 K의 태도 변화 때문이었다. M을 만난 이후 K는 전에 하지 않던 행동을 하고, 알 수 없는 이유로 내 눈에 뻔히 보이는 거짓말을 일삼으며, 나중에는 나를 회피하려 드는 것이 아닌가, 의심이 들 정도의 상황을 반복적으로 만들어냈다. 거기에 대해 내가 한 마디 하면 어쭙잖은 변명을 늘어놓기에 바빴다. 그것도 M의 눈치를 보는 듯한 모습으로. 가까운 이들을 차례차례 단절시키는 것이 가스라이팅 하는 자들의 특징 중 하나라는데, 아무리 생각해 봐도 나를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던 K의 모습들은 M에 의한 것이라고 밖에는 설명할 길이 없었다. 이러한 과정이, K가 M가 가까워진 이후에 순차적으로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그것이 실제 M이 의도한 것이었는지 백 퍼센트 확신할 수는 없지만, 나는 K와의 오랜 인연에 더 이상 미련을 갖지 않겠다고 결심하고 실천하게 되었다.


결정적인 순간은 내가 K에게 M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을 때 왔다. 이전에도 내가 M에 관한 우려를 비치기라도 하려 하면, K는 지나칠 정도로 과민한 반응을 보였기에, M에 관한 언급을 하기가 나는 무척이나 조심스러웠다. 하지만, 혹시나 K가 조금이라도 M과의 관계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볼 여지를 가질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을 품고, 이번에는 제대로 이야기를 해봐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이렇게 한 이유는 무엇보다, K와의 인연에 내가 어떻게 대처해나가야 할지 확신을 갖고 싶어서였던 것 같다. 그에 더해, 그간 함께 알아온 세월을 아깝고 아쉬워하는 마음보다, 더 이상 이 관계에 미련을 갖지 않겠다는 의지가 더 커져가는 상황에서 일어난 용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나는 M에 대한 솔직한 내 생각을 K에게 전했고, 혹시나 했던 마음은 역시나, 가 되어 돌아왔다. 그것도 내게 깊은 상처를 남기는 말들과 함께. K는 M을 싸고도는 것을 넘어 나를 비난하고 몰아붙이기에 안간힘을 쓰는 사람처럼 보였다. 마치 M이 성역 안에 존재하고 있는 것처럼. 나와의 세월은 안중에도 없는 사람인양. 결국 나는 미련 없이 K와의 인연에 종지부를 찍기로 했다.


심리학을 전공한 친구의 말에 따르면, 가스라이팅을 하는 자들은 상대방의 콤플렉스나 허점을 활용해 상대방의 심리를 지배한다고 한다. 물론 콤플렉스가 없는 사람은 없겠으나, 그것을 스스로 잘 인지하고 극복하고자 하는 단단한 마음이 있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쉬이 흔들릴 수 있는 허점으로 콤플렉스를 안고 사는 사람들이 있다. K의 경우엔 후자였던 것 같다. 내가 알고 있는 K의 콤플렉스를 M도 분명 알고 있었을 것이고, M은 그것을 이용해 지속적으로 경제적 이득을 취하고 있는 듯 보였다. 문제는, 아무리 주변인이 그에 대해 경각심을 일으키고 조언을 주려고 한들 당사자에게는 전혀 통하지가 않는다는 것, 스스로 '자각'하지 않는 한 별다른 해결책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역시 중요한 건 자각이다. 내가 한때 몸담았던 주민센터의 S가, 같은 민원대에서 근무하던, 소시오패스 성향을 다분히 보이던 동료에게 끊임없이 가스라이팅을 당했지만 결정적으로 흔들리지 않았던 이유는, S가 그러한 상황을 가스라이팅으로 인지했으며, 또한 자기 자신에 대한 굳건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리라.


"언니, 아무래도 쟤가 나를 가스라이팅 하려는 것 같아."


어둑해진 어느 날의 퇴근길, S가 내게 이렇게 말했던 그때, 나는 ‘가스라이팅'이라는 단어를 처음으로 명징하게 인식했던 것 같다. 텔레비전에서 스치듯 보았던 영화 '가스등'의 음산했던 분위기가 떠올랐던 그 순간 이후, 나는 ‘가스라이팅’이라는 단어와 함께, S가 내게 했던 말들을 가만히 곱씹어보게 되었다.

S가 말을 이었다.


"쟤가 나한테 일 못한다, 무능력하다며 자꾸 자기 뜻대로 무언가를 시키려 들어... 내가 사회생활 하면서 특별히 일을 잘하진 못해도 단 한 번도 못한다는 생각은 해 본 적이 없는데 말이야...."


S는 동료의 행동에 분노심을 드러냈고, 이후로 나름의 저항을 계속했다. 그리고 결국, 이상 언행을 하는 상대를 의심하고 자신을 믿으며 아닌 건 아니다,라고 말하는 용기를 내었던 S의 승리로 상황이 종료되었다. 마침내 소시오패스 그녀의 악행이 널리 알려졌고, 숨죽인 채 그녀를 견뎌내고 있었던 이들은 물론이고, 다른 직원들과 상사들에게도 신뢰를 잃은 채 그녀는 쫓겨나다시피 그곳을 떠나게 되었던 것이다.




그랬다. 가스라이팅은 그저 흑백영화 속 나와는 별 상관없는 이야기로 스쳐 보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오랜 세월을 함께 한 내 지인에게도, 가까운 직장 동료에게도, 때로는 팜므파탈 같은 매력적인 모습으로, 일상의 언어들 속에 교묘히 숨어서, 상대방이 알지 못하는 사이 가랑비에 옷깃이 젖어들 듯 서서히 파고들고 있었다. 그러니 부지불식간 나도 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늘 경각심을 가지고, 거침없이 의심해 볼 일이다. 자신에 대한 단단한 믿음을 지닌, 옷이 물기에 젖어들기 전에 비를 막아줄 무엇이라도 덮어쓸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으로 말이다.


지금 이 시간에도, 어둠이 내린 광장에서 점멸하고 있는 거대한 가스등을 나는 보고 있다. 그 앞에서 기꺼이 자신을 내던지고 바칠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고 있다.


조금 전까지 그 어떤 가스라이팅에도 흔들리지 않겠다고 의지를 불태우던 나는, 지금 내가 보고 있는 광경에 불안하고 무거운 마음을 어쩌지 못하고 있다. 글을 쓰며 마음을 추스르기 위해 애쓰고 있다. 과연 이런 나는, 가스등이 내 눈앞에서 깜빡일 때, 최면에 걸린 사람처럼 홀리지 않으리라 자신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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