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쇳덩이 하나가 가슴 위를 누르고 있는 듯한 답답함이 제일 먼저 달려들 때가 있어요.
오늘도 그랬어요. 그런대로 평온하게 흘러가겠구나 싶었던 주말의 끝, 동거하는 친정엄마는 음식 하나로 속을 헤집어 놓고, 아이는 학업 문제로 부모로서 감당하기 버거운 숙제를 안겨주었어요. 마치 할머니와 손녀가 함께 시간 약속이라도 한 듯이요.
사실 저 자신의 문제로도 방황을 거듭하고 있는 현실인데, 앞으로 할머니와 손녀의 문제를 어떻게 함께 해결해나가야 하나, 하는 질문의 무게감이 크게 느껴졌던 시간이었습니다. 물론 이러한 상황에 처하는 것이 처음은 아니지만, 시간이 갈수록 그 무게가 더욱 버겁게 다가오는 것 같아요. 시들어가는 엄마의 모습에 소멸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다는 느낌을 받으며 안쓰럽고 안타까운 마음이 들다가도, 그 후의 뒷감당을 동생이 아닌 내가 오롯이 짊어져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면 억울하기도 하고, 이러한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갈망이 솟아나기도 하고요.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하려 애쓰며 살고 있지만, 잊을 만하면 나에게 뭔가를 일깨워주기라도 하겠다는 듯 이런 상황이 펼쳐지곤 하네요.
어쩌면 매일 공부하는 마음으로 살겠다는 나의 다짐은, 종교인들이 신을 믿는 마음 같은 것인지도 모르겠어요. 나와 내 주변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 - 그것이 좋은 것이든 그 반대의 것이든 - 에는 무언가 배울 것이 있다는 것, 그로 인해 내가 조금이라도 더 나은 사람으로 성장하리라는 믿음. 이러한 믿음 때문에 힘든 순간도 그럭저럭 버틸 만한 게 아닌가 싶고요. 하지만 지금 당장은 잠시 숨을 돌리고 어디론가 떠나고 싶다는 열망에 빠져 있네요. 하늘은 이토록 푸르고 나무들은 더할 나위 없이 풍요로운 계절이잖아요. 바람에 살랑살랑, 물이 잔뜩 오른 가지들이 손짓하듯 잎을 흔들어대며 자꾸만 유혹하는…. 그렇지만 마냥 그리 할 수 있는 여건이 안 되기에 이렇게 글의 세계로 도망쳐 와 있네요. 누군가는 내게 공감하며 나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요.
이럴 땐 사소한 물건 하나도 허투루 볼 수 없는 눈이 되는 것 같아요. 배달음식에 딸려 온 일회용 받침대를 보다 주책맞게 울컥해져서는, 그게 뭐라고 버리지도 못하고 책장 한편에 고이 모셔놓은 채, 목마른 자가 물을 찾듯, 시선으로 녀석을 붙잡고는 한참을 쳐다보곤 했어요. 누구의 아이디어인지 용기 받침 하나 참 잘 만들었다고 생각하면서요.
주말 동안 비가 내린 후 기온이 많이 떨어질 거라고 들었는데, 웬걸, 날은 이미 봄의 따스함을 넘어 뜨거운 여름의 얼굴을 하고 있어요. 이렇게 또 한 번의 여름을 만나게 되는 것이겠죠. 저는 마음이 무거운 날엔 낮게 내려앉은 구름이나 비가 쨍한 햇살보다 더 반가워요. 날씨에게 공감받는 느낌이 든달까요. 좀 가라앉아 있어도 괜찮다, 나도 그렇다,라고 말해주는 듯 느껴져서 그런 것 같아요. 오늘처럼 화창한 날엔 내 안과 바깥의 날씨가 발생시키는 불협화음이 주는, 묘한 우울감이 있어요.
공부하는 마음에 대해 생각하려니 김사인 시인의 '공부'라는 시가 떠오릅니다. 언젠가 시인이 직접 낭송하는 시의 밤 행사에 참석한 적이 있었는데, 제가 추억하는 생애 가장 행복했던 날 중 하나였던 것 같아요. 시가 울려 퍼지는 공간이 마치 타오르는 벽난로가 있는, 한겨울의 거실에 앉아있는 느낌을 주었어요. 그날따라 '스트로베리문'이라고 불리는 달이 하늘 한가운데 덩그러니 떠올랐고, 저는 녀석이 문학적 감수성과 무척이나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더랬죠. 차마 닿을 수 없는 것에 대한 경외감, 그리움의 감정이 그런 감성을 불러일으키는 것일까요.
글을 마치기 전, 뜬금없이, 최근에 본 인상 깊은 드라마를 추천해보려 해요. 즐거운 이야기로 마무리 짓고 싶은 바람이 최근에 본 드라마를 소환하게 합니다. 요즘 소설을 원작으로 한 드라마에 관심을 갖고 있는 터라, 소설을 어떻게 영상으로 펼쳐냈을까 궁금한 마음에 보게 된 작품인데, 원작과 드라마를 비교하면서 보는 재미가 쏠쏠했어요. 소설에 있지만 드라마에는 없는 것, 그리고 그 반대의 것을 비교하며 짚어보는 과정도 꽤나 흥미롭고요. 개인적으로 전쟁 - 특히 2차 세계대전 -을 배경으로 하는 영화를 좋아하는데, 우연히 넷플릭스에서 본 '우리가 볼 수 없는 모든 빛'이 제 마음 깊이 걸려들었어요. 에피소드가 많지 않아 시간적으로 부담되지 않으면서도, 깊고도 긴 여운을 주는 이야기와 캐릭터 덕분에 원작 소설이 몹시 궁금해지게 만든 작품이에요. 역사가 필연적으로 불러온 비극적 삶 속에서도 기어이 피어나는 사랑, 희망 그리고 연대를 마음 깊이 느끼실 수 있을 거예요. 무엇보다 남주의 가련하고 애절한 그 눈빛, 그놈의 눈빛이 제 허를 찔러버렸어요. 예전에 브런치북에서 언급했던 영화 '진주만'의 조시 하트넷처럼요. (언젠가 날을 잡아 이 작품에 대한 리뷰를 올려볼까 합니다)
오프라인 친구들을 만나기도 여의치 않는 요즘, 랜선 글벗 친구들은 지금쯤 무얼 하고 있을까, 궁금한 마음으로 브런치의 문을 열고 주저리주저리 늘어놓다 주절거림이 질척거림이 되기 전에 글을 접으려 합니다.
글벗님들은 지금쯤 월요병과 싸우는 오전을 보내고 나른하면서도 바쁜 오후를 보내고 있나요, 지난주와 조금은 달라진 일상에서 새로운 것을 익히며 배우고 있으신가요?
공부 (김사인)
'다 공부지요'
라고 말하고 나면
참 좋습니다.
어머님 떠나시는 일
남아 배웅하는 일
'우리 어매 마지막 큰 공부 하고 계십니다'
말하고 나면 나는
앉은뱅이책상 앞에 무릎 꿇은 착한 소년입니다.
어디선가 크고 두터운 손이 와서
애쓴다고 머리 쓰다듬어주실 것 같습니다.
눈만 내리깐 채
숫기 없는 나는
아무 말 못하겠지요만
속으로는 고맙고도 서러워
눈물 핑 돌겠지요만.
날이 저무는 일
비 오시는 일
바람 부는 일
갈잎 지고 새움 돋듯
누군가 가고 또 누군가 오는 일
때때로 그 곁에 골똘히 지켜섰기도 하는 일
'다 공부지요'말하고 나면 좀 견딜 만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