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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스무 해

by 지뉴

이번 글은 짝꿍이 던진 한 마디에서 시작되었다.


주말 아침 서둘러 청소를 마치고 나자, 늘 그렇듯 아이들 점심 메뉴 고민이 우리 부부 최대의 화두로 떠올랐다. 일주일의 마지막 집안 과제인 청소가 완수되니 느긋하게 게으름을 피우고 싶은 마음이 슬금슬금 올라왔고, 점심 준비로 다시 부엌을 열기로 가득 채울 생각을 하니 아득하기만 했다. 한정된 우리의 요리 범위에서 딱히 떠오르는 메뉴가 없다는 사실도 문제였지만.


이럴 땐 집 근처 가게에서 간편식을 포장해 오는 것이 제일이다. 요리할 생각이 그다지 없는 엄마, 아빠는 마음속으로 이미 메뉴를 정해두고서는, 명목상 아이들의 의견을 물어본답시고 방문을 열어젖혀 "오래간만에 김밥 먹을래?"라고 답이 정해진 질문을 던졌고, 각자의 세계에 빠져있는 아이들은, 고맙게도, 별다른 저항 없이 고개를 끄덕이거나 응, 한 마디를 내뱉었다. 예상했던 반응이 돌아오기 바쁘게 짝꿍이 황급히 휴대폰을 열어 포장용 주문을 넣었다.


그렇게 나선, 정오를 앞둔 주말 오전이었다. 길 양쪽으로 늘어선 가로수의 풍성한 잎사귀들이, 머리 위를 덮을 기세로 쏟아져 내려 초록빛 터널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계절이 여름 중에서도 '한'여름에 들어섰다는 것을 내보이기라도 하듯.


집을 나선 지 채 몇 분도 되기 전, 온몸이 무더위를 견디지 못하고 마지막 한 방울까지 쥐어짤 태세로 땀을 내보내는 통에, 그냥 집에서 어떻게든 점심을 해결할 걸 그랬나, 후회가 귓가에서 속닥거리던 찰나,


"그거 알아? 며칠 후면 우리 만난 지 벌써 이십 년이야."


짝꿍이 지나가는 말처럼 툭 던졌다. 그의 입에서 나온 '이십 년'이란 세월이 너무도 비현실적으로 느껴져 혹시 그가 계산을 잘못한 것이 아닐까 싶던 순간, 머릿속으로 빠르게 세월을 되감아 보니 정말, 우리가 만나고서 강산마저 두 번 바뀐다는 스무 해가 흘러간 것이었다. 그 사실을 깨닫게 되자 동시에 여러 가지 생각이 스쳤는데, 가장 앞선 것은, 제대로 인식하지도 못하는 사이 우리의 청춘을 안고 달아나버린 세월이 징그럽다는 것. 그 생각에 몸서리를 치고 나서야 비로소 낭만적인 감정이 수줍게 끼어들었고, 나를 스무 해 전 여름 광안리의 밤바다로 이끌었다.


봄과 여름을 거쳐 이어지던 캠퍼스에서의 ‘썸’이 종지부를 찍던 날, '우리 오늘부터 1일이야.'라는 눈빛을 교환했던 그날. 방학을 맞아 고향집을 찾았던 나와 (아마도) 나를 보기 위해 부산까지 내려왔던 그는, 밀면 맛집으로 소문난 서면의 음식점에서 한 끼를 해결하고, 열기가 북적이던 부산 거리를 떠돌다가 누가 먼저인지는 기억이 나질 않지만, 화려한 빛깔로 물들었을 광안대교를 보기 위해, 데이트하는 청춘들로 붐비던 여름 밤바다를 찾았다. 어쩌면 본능적으로, 우리 연애의 시작을 새길 만한 곳을 찾았던 건지도 모르겠다. 그날, 여름은 커플로서의 우리의 시작을 지켜보았고, 이후로 나는 어쩐지 짝꿍과의 추억을 떠올리면 조각조각마다 여름의 맛이 배어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곤 한다.


광안리 바닷가에서 우리는 꽤 오랜 시간 대화를 나누었다. 그런데 내게는, 우리 사이에 오고 간 말 보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던 알싸한 긴장감, 밤바다를 아련하게 그려내던 광안대교의 불빛, 해변에 부유하던 계절과 청춘의 에너지가 떠오른다. 우리는 청춘의 한가운데에, 여름의 정점에 있었고, 그 모든 에너지와 열기를 품은 채 우리 둘만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래서였을까, 몇 년의 연애 기간을 거친 겨울, 법적 커플이 되고서도 이런저런 이유로 우리는 신혼여행을 가지 못했다. 우리가 신혼여행을 떠난 건 식을 올리고서 팔 개월 가까이 흐른 팔 월의 어느 날, 기온이 사십 도에 육박하던 이탈리아의 여름을 향해서였다.


이탈리아에서 우리가 처음으로 묵었던 로마 '테르미니역' 근처의 '매디슨호텔'은 미로 같은, 흥미로운 구조가 젊은 배낭여행자로서의 도전의식을 북돋워주었고, 작열하는 태양을 닮은 남부 이탈리아 친구들은, 청춘의 여름과 시너지를 이루며 우리를 더욱 달뜨게 했다. 지중해에 인접한 이탈리아 소도시의 아기자기한 거리들은 밤이면 축제의 열기가 뿜어져 나왔고, 무지개를 닮은 이탈리아산 젤라또와 한 판도 거뜬하던 나폴리 피자는 찬란한 여름 햇살을 머금고 있었다. 결국 부부로서 우리의 본격적인 시작에도 온통 여름이 함께였던 것이다.




지난 스무 해를 함께 되짚어 보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덧 우리는 아이들에게 줄 김밥과 함께 아파트 입구로 들어서고 있었다. 이제 다시 내 새끼들에게 줄 삼시 세끼를 걱정하며 현실로 돌아올 시간. 지난 스무 해라고 했지만, 우리는 둘이서 함께 한 청춘을 그리워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자 괜스레 아이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이는 동시에 지난여름 온 가족이 함께 누볐던 하와이의 거리가, 태평양이 실어오던 시원한 바람이 그리워졌다.

"하와이도 정말 좋았어. 생각이 많이 나."

짝꿍이 말했고, 그와 텔레파시가 통한 것 같아 기분이 좋아진 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아직 만나지 못한 스무 해 여름은 우리에게 어떤 모습으로 다가올까? 알 수 없는 일이지만, 한 가지 확실해 보이는 건, 앞으로 우리가 추억하고 그리워할 여름이 더해질 것이라는 사실이다. 나이테가 켜켜이 쌓여가듯, 희미해진 여름에 선명한 여름이 더해져, 그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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