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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뉴 Nov 07. 2022

악몽의 시간이 되기까지

이태원 참사 후 일주일

평범한 토요일 밤이었다.

그날도 난 여느 때처럼 '그것이 알고 싶다'를 시청하며 주말의 느긋함을 즐기고 있었다.

프로그램이 한창 진행 중이던 어느 순간, 화면 아래에 빨간 자막이 떴다. 이태원에서 2명의 시민이 압사를 당했다는 긴급 속보였다.


핼러윈을 앞둔 주말 이태원에서 인파로 인한 사고가 나고야 말았구나,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이렇게까지 대형 참사가 발생하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매년 핼러윈 기간이면 엄청난 인파가 몰려드는 곳이 이태원이고, 당연히 통행 관리를 위해 수많은 경찰들이 투입되어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프로그램이 채 끝나기도 전에 졸음이 몰려왔던 나는 프로그램 진행자인 김상중이 마지막 멘트를 마치기 무섭게 텔레비전을 끄고 잠자리에 들었다.


악몽의 시간이 시작된 건 다음 날 아침 이탈리아 친구에게서 걱정 어린 메시지를 받고 나서부터였다. 친구는 현지 기준으로 새벽 1시가 조금 넘은 시각, 페이스북 메신저를 통해 자국어로 쓰인 인터넷 뉴스 링크를 첨부해 다급한 물음을 보내왔다.


한국에서 큰 사고가 났다는 뉴스를 봤어. 너는 괜찮은 거야??

놀란 나는 황급히 텔레비전을 켰다. 이내 화면 위로 사망자 수를 가리키는 큼지막한 세 자리 숫자와 함께 아수라장이 된 도로 위 여기저기에서 다급하게 CPR을 실시하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내 생애 보았던 가장 충격적인 장면 중 하나였다. 내 눈으로 보면서도 도무지 믿기지가 않았다.

선진국으로 불리는 21세기 대한민국 수도 한복판, 축제가 한창이던 길거리에서 이런 대형 참사가 일어났다는 것이.


젊은이들이 이제껏 별 사고 없이 무사히 핼러윈 축제를 즐겼던 곳이었다.

개인적으로는 대사관에 비자 신청을 위해 한 번 가본 것이 전부인 이태원이었지만, 평소 '이태원'이라는 지명이 내게 주는 새로움과 낭만의 정서가 있었다.

텔레비전에 때때로 등장하는 이국적인 정취의 음식점들이 매력적으로 다가왔고 이태원 어느 루프트탑에서 친구들과 술자리를 가졌다는 동료 직원이 부러웠으며, 드라마 '이태원 클라쓰'를 보면서는 조만간 나도 순수하게 즐기고 놀기 위해 꼭 다시 이태원에 가봐야겠다고 마음먹기도 했었다.

하지만 앞으로 그런 기회는 결코 내게 오지 않을 것이다. 이제 이태원은 내게 아픔과 슬픔으로 기억될 것이므로...




참사 일주일이 지났다. 그러나 상처받은 마음들이 위로받기는 커녕 그날의 참사만큼 악몽 같은 날들이 이어지고 있다.

지난 일주일간, 도무지 납득하기 어려운 그날 '국가의 빈자리'에 대해 제대로 책임지는 사람 하나 없었다. 책임을 통감해야 할 사람들이 말 같지도 않은 비겁한 변명으로 회피하고, 오히려 현장에 있었던 시민을 토끼몰이하고, 정부의 책임에 대해 따져 묻는 외신기자들 앞에서 헛소리를 지껄이며 웃고, 심지어는 위험에 빠진 시민들을 위해 현장에서 혼신을 다한 일선 경찰들에게 책임전가를 하는 이 정부의 작태를 지켜보며 슬픔이 분노가 되어 도무지 마음이 진정되지가 않았다.


발걸음이 이끌리듯 이태원으로 향했다. 누군가의 죽음을 슬퍼하고 추모하기 위해 이곳을 다시 찾게 되었다는 사실 자체가 너무도 서글프게 느껴졌다.

이태원역이 가까워 올수록 손끝이 떨려왔다. 가까스로 마음을 추스르며 1번 출구를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천천히 올라갔다. 그날 축제를 즐기기 위해 이곳을 찾았던 젊음 청춘들의 안타까운 마지막이 눈에 아른거리는 것 같아 마음이 저릿해왔다.


마침내 올라선 지상, 빛바래 시들어가는 수많은 국화송이들과 메모지들이 시선을 가득 채웠다.

차곡차곡 포개어져 변색해가는 꽃들이 마음을 아프게 했다. 공기중에 부유하던 피비린내인지 음식물이 썩는 냄새인지 모를 비릿하고 지린 냄새마저 마음을 울컥하게 했다.


출구 앞에 서서 한동안 시민들이 남긴 글귀를 읽어보다 미리 준비해 온 메모 하나를 한 귀퉁이에 조심스럽게 올렸다. 기자인지 누군지 모를 사람이 사진기 셔터를 눌러댔다. 그 순간 온갖 저급한 기사들을 쏟아내는 우리나라 언론이 생각나 화가 불쑥 올라왔다.




이제는 분노를 용기의 에너지로 바꾸어야 할 시간일 테다. 몇 년 전 그러했듯이.

추위를 버텨내며 촛불과 함께 했던 그 수많은 나날들을 보내고도 우리가 여전히 뒤로 가고 있다는 사실이 안타깝고 무기력하게 느껴지는 하루하루지만, 역류하는 물살을 헤치고 나아가는 깨어있는 힘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어야겠다고 결심하며 그곳을 돌아 나왔다.

소중한 생명의 시간을 속절없이 강탈당한 그들을 대신해 살아남은 우리가 해결해야 할 몫이 많다는 것을 다시 한번 뼈아프게 느끼며...

이태원역 1번출구 앞 시민들이 남기고 간 꽃과 메모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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