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장소 다른 느낌
27살 때, 나는 선릉역 강남 경복아파트 사거리 근처에 있는 외국계 회사에서 프랑스인 부사장의 비서로 일하고 있었다. 비서라는 직업은 나에게 딱 맞는 일처럼 느껴졌다. 모든 일이 계획대로 차질 없이 진행될 때, 나는 큰 안도감과 함께 깊은 만족감을 느꼈다. 매우 예민하고 무뚝뚝했던 (그래서 이전 비서들을 몇 명이나 해고했던) 프랑스인 부사장도 나의 일하는 방식을 매우 마음에 들어 했다. 당시 직장인들 사이에 동아리 참여가 유행이었다. 나도 예외는 아니었다. 나는 퇴근 후 댄스 동아리에서 춤을 추었고, 주말에는 영어 스터디 그룹에 참여해 가며 자기 계발에 힘썼다. 부천에서 출퇴근하는 길은 멀었지만, 매일 아침 선릉역에 도착해 수많은 사람들 속에서 일원으로 섞여드는 순간, 나는 직장인으로서의 정체성과 안정감을 느꼈다.
송파로 신혼살림을 시작하면서, 나는 송파에 있는 회사로 이직했다. 그렇게, 화려했던 나의 강남 생활은 자연스럽게 막을 내렸다. 첫째가 태어난 후에는 어머니와 함께 살며, 어머니께서 첫째를 돌봐주신 덕분에 나는 마음 편히 일을 계속할 수 있었다. 그때 나는 맞벌이하는 부부라는 타이틀에 속해 있는 것이 좋았다. 요즘은 흔해졌지만, 그 당시에는 그러한 삶의 방식이 나에게 주는 의미가 남달랐다. 그러던 중 우리는 둘째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했고, 둘째를 가지기 위해 나는 회사를 그만두기로 결심했다. 그때는 미련 없이 회사를 떠났지만, 돌아보면 ‘언젠가는 다시 일할 수 있겠지?’라는 생각을 안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지금의 나는 그때와 너무 달라져서, 내 인생에 다시 복귀하는 일은 없을 것 같다.
둘째가 태어난 후, 예상치 못한 청각장애 진단을 받게 되면서 나의 삶은 완전히 달라졌다. 이전에는 바쁘게 출근하며 직장 생활의 스케줄에 맞춰 하루를 보냈지만, 이제는 나의 일과가 완전히 바뀌었다. 직장에서의 치열한 하루가 끝난 후 퇴근길에 느꼈던 작은 성취감은 이제 더 이상 내 삶의 중심이 아니었다. 대신, 나는 단지 3개월 된 아이를 카시트에 태워 매주 2-3회씩 언어치료, 음악치료, 청력검사를 받으러 다니는 새로운 일상에 빠져들었다. 그때부터 나는 아이가 잘 듣고 잘 말할 수 있게 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회사에서 정해진 업무를 효율적으로 처리하던 내 모습은 이제 집에서 그림책을 읽어주는 선생님으로 변모했다. 책을 읽어주다가, 아이가 소리에 반응할 때마다 뒤를 돌아보면 해당 단어의 카드를 보여주며 언어치료사의 역할을 맡았다. 또, 피아노를 치며 음악을 들려주는 음악치료사의 역할도 자연스럽게 내가 감당해야 할 몫이 되었다.
매일 아이가 조금씩 더 잘 듣게 되길, 더 명확하게 말할 수 있게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나는 집과 병원을 오가며 그 생활에 완전히 몰입했다. 과거의 직장 생활과 비교하면, 이 새로운 일상은 훨씬 더 개인적이고 감정적으로도 힘들었지만, 동시에 의미 있는 시간이기도 했다. 회사에서의 성취감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보람과 도전이 내 앞에 놓여 있었다. 그동안 쌓아왔던 직장인으로서의 내 모습은 잠시 뒤로 미뤄졌고, 이제는 엄마로서, 그리고 치료사로서의 내 역할이 무엇보다 중요해졌다.
둘째가 4살이 되었을 때, 드디어 아이도 나도 많이 안정되었다. 그동안 세상과 단절된 듯한 생활을 했던 나도 서서히 세상 밖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자연스럽게 주변을 둘러보게 되었고, 나와 비슷한 경험을 공유하는 엄마들과 연락하며 서로를 격려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어느 날 강남에 있는 00 복지관에서 난청 아이 부모 교육이 열린다는 소식을 듣고 나도 참여하게 되었다.
오랜만에 강남, 오랜만의 선릉역… 어? 이곳은? 거의 6-7년 만에 다시 찾은 곳… 00 복지관에 도착하고 보니, 그곳은 바로 내가 27살 때 열정적으로 일했던 회사 근처였다. 예전 직장에서 5분 거리밖에 안 되는 곳이었고, (이제는 경복아파트마저 없어졌지만) 당시 회사 사람들과 점심을 먹으러 자주 걸어 다녔던 지역이자 회식을 하던 장소였다. 그런데 지금은 우리 아이의 장애로 인해 이곳에 오게 되었다. 내 옷차림부터 나의 신세까지 모든 게 참 많이 달라졌다. 같은 장소지만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참으로 묘한 감정이 밀려왔다. 직장인이었던 시절에는 이곳에 청각장애 전문 복지관이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고, 관심도 없었다. ‘몇 년 만에 강남을 이렇게 다시 오게 되다니…’ 하는 생각에 만감이 교차했다. '이곳의 존재를 모른 채로 평생을 살았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갑자기 서글퍼졌다.
그 후로도 00 복지관은 우리 일상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다. 나는 아이와 함께 정기적으로 그곳에 가서 언어치료와 다양한 수업을 받았고, 시간이 지날수록 그곳은 우리에게 매우 익숙한 공간이 되었다. 나는 난청 아이들을 위해 복지관에서 영어그림책 수업도 시작했다. 난청 아이들이 함께 앉아 내 수업을 들으며 집중하는 모습은 정말 뿌듯했고, 그곳에서 아이가 난청 친구들과 어울리며 웃고 떠드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다시 한번 내가 이곳에 오게 된 이유를 실감하게 되었다.
수업이 끝난 후 복지관을 나오면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강남에서 일하던 시절이 정말 있었나?’ 당시 회사 사람들과 이 복지관 근처에서 점심을 먹으러 다니던 기억은 이제 희미해져 버렸다. 그때와는 너무도 다른 역할로 이곳에 오게 된 지금, 이곳은 이제 내 젊은 시절 직장생활을 했던 곳이라기보다는 아이의 언어치료실, 그리고 둘째가 난청 친구들을 만나는 소중한 장소로 자리 잡았다.
복지관에서 돌아오는 길에 아이가 내 손을 꼭 잡고 "엄마, 다음에 또 오자"라고 말했을 때, 나는 이곳이 이제 우리에게 얼마나 중요한 공간이 되었는지를 깨달았다. 어쩌면, 이곳을 몰랐다면 좋았을 거라는 생각이 매번 들었지만, 이곳이 아이에게 또 나에게 소중한 추억이 깃드는 장소로 변해가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이제 이 복지관이 아이의 성장을 돕는 공간이자, 우리가 함께 쌓아가는 추억의 장소로 남기를 바란다. 복지관을 나설 때마다, 아이와 함께한 소중한 순간들이 마음속에 새겨진다. 인생이 나에게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이끌어왔지만, 이 여정 속에서 우리는 새로운 의미와 가치를 발견하고 있다. 이제 이곳은 나의 과거와 아이의 현재가 만나는 공간이 되었고, 앞으로도 우리 가족에게 좋은 추억을 만들어갈 장소로 자리 잡기를 기대해 본다. 둘째를 낳고 종종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 있다. “인생은 예측할 수 없는 여정이다.” 다시 한번, 그 진리를 실감할 수 있었다.
2008년쯤의 나와... 2018년쯤의 나...
바람마저 다르게 느껴졌던 그곳!
그리고 그사이 많이 달라진 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