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 되나 봐 ㅠ
둘째는 청각장애로 태어났지만, 청각보조기기(보청기, 인공와우)를 통해 소리를 들을 수 있다. 그래도 소리가 잘 들리는 것이 아니니 어려울 난, 들을 청해서 아이와 같은 사람을 난청인이라고 부른다. 기기만 착용하면 다 잘 들리는 줄 알지만, 사실은 비장애인에 비해 80% 정도 들을 수 있다. 기기의 한계로 시끄러울 때는 거의 들을 수 없어서 모르는 단어를 들을 때는 더더욱 들리지 않는다. 모르는 영어단어가 안 들리는 것과 비슷하다.
그래서 나는 난청아이의 성장 과정에서 독서는 비장애 아이들보다 더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했다. 첫째를 키우며 독서가 아이의 정서적 성장과 교육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 절실히 깨달았기에, 둘째가 청각보조기기로 소리를 듣는 상황에서도 나는 더욱더 독서의 힘을 믿었다. 책을 통해 난청아이도 비장애 아이들처럼, 아니 그 이상으로 다양한 어휘를 구사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이 있었다.
우리 부부는 신혼 때부터 "아이들을 평생 독자로 살아가게 하자"는 목표를 세웠다. 책을 사랑하며 자라는 아이들, 그것이 우리의 바람이었다. 결혼 전에도 우리는 틈만 나면 책을 읽었고, 서로 읽은 책의 내용에 대해 이야기하며 깊은 대화를 나누곤 했다. 첫째가 태어난 후에도 이 습관은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우리는 바닥에 앉아 아이를 무릎에 앉히고, 뒤에서 포근히 안아주며 책을 읽어주었다. 아이는 책 속의 그림에 눈을 빛내며, 내 목소리에 집중했다. 책을 읽어주는 그 시간이 아이에게 정서적인 안정감을 주는 귀한 시간이었다. 밤이 되면, 우리는 다시 책을 꺼내 들었다. 잠들기 전, 어둠이 내려앉은 방 안에서 우리는 조용히 책 속의 이야기로 여행을 떠났다. "우와~ 이번에는 어떤 이야기일까?" 아이의 눈이 호기심으로 가득했다. 함께 책을 읽고 이야기를 나누며, 책 속의 인물들이 살아 움직이는 듯했고, 우리는 그들과 함께 웃고 상상하며 이야기 속으로 깊이 빠져들었다. 책장이 넘어갈 때마다 새로운 모험이 펼쳐졌고, 그 시간은 우리의 마음을 따뜻하게 연결해 주었다.
이렇게 매일 밤 책을 읽으며, 아이는 자연스럽게 책을 사랑하는 아이로 자라났다. 책은 그저 읽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일상이자 놀이가 되었다. 도서관에 가는 것도, 여행 중에 책을 함께 읽는 것도 모두 우리 가족의 소중한 시간이었다. 주말 아침 부스스 눈을 뜨면서 우리는 함께 책을 읽었다. 시간이 흘러 10살이 되자, 아이는 "엄마, 이 책 정말 재미있어. 엄마도 읽어봐!"라며 나에게 책을 추천해 주기까지 했다. 사춘기가 된 지금도 아이는 여전히 "엄마, 이 책 읽어봤어?"라고 묻는다. 아이와 같은 책을 읽고, 그 책에 대해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뿌듯하고 소중하다. 책을 매개로 나누는 대화는 우리의 마음을 더욱 깊이 이어주었다.
첫째를 키우며 책이 아이에게 미치는 영향이 얼마나 큰지 깨달았다. 정신적인 성장부터 어휘력, 문해력, 학습력까지 모두가 책에서 시작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둘째의 장애를 알게 되었을 때도 당연히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책을 읽어주는 것이라고 자신했다. 소리가 정확히 안 들리니 나는 더 많은 어휘들을 들려주어야 했고, 가장 좋은 방법은 책을 통해 새로운 어휘를 접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새로운 단어들을 접하면서 당연히 아이의 말하기나 듣기에서 다이내믹한 성장이 있을 거라 생각했다. 물론 몇 가지 의심들은 있었다. '과연 기기로 소리를 듣는 난청 아이에게도 책 읽어주는 것이 효과가 있을까?' '아이는 이야기를 이해할까?' 궁금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 읽어주는 시간은 아이에게 안정감을 주는 귀한 시간임을 알았기에 아이가 보청기로 재활을 시작한 생후 3개월 이후, 나는 하루도 빠짐없이 책을 읽어주었다.
어느 날, 아이가 "사과"라는 단어에 반응을 보이면, 나는 그날 바로 사과와 관련된 책을 꺼내 들었다. "사과는 어떤 맛일까? 빨간색일까, 노란색일까?" 책 속에서 사과를 만지작거리는 캐릭터와 함께 우리는 상상의 세계로 빠져들었다. 언어치료에서 교통수단을 배우고 돌아온 날이면, 집에 와서 자동차가 등장하는 책을 펼쳐 들었다. "이 자동차는 어디로 가는 걸까? 신호등은 어떤 색깔일까?" 책 속 도로 위를 달리는 차들이 마치 실제로 움직이는 것처럼 생생하게 이야기해 주었다. 인공와우 수술을 받은 후에도, 나는 책 읽기를 멈추지 않았다. "오늘은 무슨 이야기를 해줄까?" 책장을 넘기며, 포기하지 않고 꾸준히, 몇 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우리만의 독서 시간을 가졌다.
하지만, 이상했다. 그렇게 많은 책을 읽어주었는데, 아이는 4살이 되어도 여전히 말을 하지 않았다. 입에서 나오는 건 의미 없는 소리뿐, 내 말을 흉내 내려는 시도조차 보이지 않았다. 4살 초반에 처음으로 "엄마"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 나는 그만 눈물을 쏟고 말았다. 그토록 기다렸던 단어를 듣게 되었으니, 감격스러웠다. 하지만 그 기쁨도 잠시, 다시 아이는 침묵 속으로 돌아갔다. 그때 아이는 놀이학교에 다니기 시작했는데, 또래 친구들 중에서 말을 못 하는 아이는 우리 아이뿐이었다. 그때부터 내 마음속에 의문이 고개를 들었다. "책 읽어주는 게 정말 아무 효과도 없는 걸까? 난청 아이에게는 소용이 없는 걸까? 다른 아이들은 다 말을 시작하는데, 왜 우리 아이는 안 되는 걸까?" 이런 생각들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남편에게 하소연을 쏟아내며, 마음은 점점 무거워졌다. 자신만만했던 내가 점점 무기력해지고, 머릿속에는 부정적인 생각들만 가득 차올랐다. 왜, 왜 우리 아이는 안 되는 걸까? 내가 뭘 잘못한 걸까? 마음속 깊은 곳에서 솟아오르는 불안과 절망은 점점 커져갔다. 그럴수록 나는 스스로를 자책하며 끝없는 물음 속에 빠져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이에게 책을 읽어주는 것뿐이었다. 아이가 기관에서 돌아오면 첫째와 번갈아 가며 책을 읽어주었다. 5살이 되었을 때는 둘째에게도 책을 읽어달라고 했다. 둘째는 이야기를 만들어내기 시작했지만, 발음도 문장력도 엉망이었다. 도통 사람의 말로 들리지 않았다. '나 정말 많이 노력했는데, 왜 안돼?' '인공와우 수술을 받은 다른 아이들은 발음도 정확하고 말도 하는데, 왜 우리 아이만 안 되는 걸까?' 좌절감이 나를 짓눌렀다. 전문가에게 물어보니, "아이가 완벽주의 성향이 있어서 문장이 완성될 때까지 말을 하지 않는 것 같다. 기다려보자"라고 했다. 하지만 그 답답함은 사라지지 않았다.
시간이 흐르면서 희망은 점점 작아졌다. 4살, 5살이 되어도 아이의 말문은 열리지 않았다. 단어조차 내뱉지 못하는 아이를 보며 나는 무너져갔다. 아이는 자신의 목소리를 감춘 채 나를 바라봤고, 나는 그런 아이를 보며 점점 더 할 말을 잃어갔다. 첫째를 키우며 가졌던 자신감은 어디로 갔는지, 나는 무기력해졌다. 책을 읽어주는 손길마저 느려졌다. 인공와우를 끼고도, 보청기를 착용해도, 여전히 들려오는 것은 무의미한 소리뿐이었다. 다른 아이들은 이미 문장을 만들고, 세상을 향해 작은 목소리로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지만, 우리 아이는 여전히 침묵 속에 머물러 있었다. 전문가들은 기다리라고 했지만, 그 기다림이 길어질수록 내 마음은 차갑게 식어갔다.
내가 그렇게 믿었던 독서라는 도구마저도 우리 아이에게는 효과가 없는 것일까? 아이의 침묵이 길어지면서, 나는 스스로를 탓하기 시작했다. ‘혹시 내가 뭔가를 잘못한 걸까? 다른 방법이 있었던 걸까?’ 끊임없는 의문과 불안이 나를 잠식해 갔다. 혼자만의 전쟁을 치르는 기분이었다. 그토록 평범하게만 보였던 책 읽는 시간이 이제는 아이의 입을 막고 있는 무거운 침묵으로 느껴졌다. 내가 아이에게 전하고 싶었던 말들은 여전히 내 머릿속에 맴돌았고, 아이의 대답을 기다리는 동안 나는 점점 더 깊은 좌절 속으로 빠져들었다. 어쩌면, 이 침묵은 영원히 깨지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매일 반복되는 고요 속에서, 나는 끝이 보이지 않는 터널을 걷고 있는 기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