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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망고북스 Sep 09. 2024

피할 수 없었던 두 번째 수술

왼쪽 인공와우 수술

아이가 다섯 살이 되었을 때도, 여전히 발음은 어눌했고, 한 문장을 온전히 말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목을 긁는 듯한 소리로 내뱉는 말은 오로지 나만이 알아들을 수 있었다. 선생님도, 우리 가족도 그 이유를 알 수 없어 답답함만 커져갔다. 뭔가 더 나아질 것 같은데, 전혀 나아지지 않으니 마음이 무거웠다. 왼쪽 귀는 여전히 보청기로 소리를 듣고 있었지만, 그 소리가 분명치 않아 발음이 흐려지는 것이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청력 검사를 다시 해보니, 예상보다 더 나빴다. 보청기로는 이제 소리를 제대로 듣기조차 힘들어진 상태였다. 한쪽 귀만이라도 자연의 소리를 계속 들려주고 싶었는데… 결국, 우리는 다시 수술이라는 큰 결정 앞에 섰다. 두 번째 수술. 마음은 이미 결정을 내린 듯했지만, 여전히 확신이 필요했다. 여러 병원을 오가며 답을 구해보았지만, 모두가 같은 이야기를 했다. 왼쪽 귀도 인공와우 수술을 받아야 한다고. 하루빨리.


두 번째 수술을 앞두고, 마음이 더 묘하게 복잡했다. 아이는 이제 다섯 살이었고 더 컸는데, 첫 번째 수술 때보다 마음이 더 힘들었다. 첫 수술은 아이가 11개월이었을 때였다. 그때는, 아이가 내게 너무 소중한 존재인 건 분명했지만, 아직 내 손에 온전히 익숙하지 않은 느낌도 있었다. 태어난 지 겨우 11개월, 그 시간은 긴 것 같으면서도 짧아서, 아이를 사랑하면서도 어딘가 낯선 부분이 있었다. 그래서인지 첫 번째 수술은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저 아이를 위해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네 번째 해가 지나가면서, 아이는 하루종일 내 곁에 붙어 책을 읽고, 놀이를 하고, 온갖 병원을 함께 다니며 그 작은 몸으로 나의 버팀목이 되어주었다. 함께한 시간이 쌓일수록, 우리는 서로를 더 깊이 이해했고, 그만큼 아이는 더 나의 일부가 되었다. 이제는 하루를 아이 없이 상상하는 게 어려웠다. 그 긴 세월이 아이를 내게 더 가깝게 만들었고, 그만큼 두 번째 수술에 대한 두려움과 슬픔은 온전히 내 것이 되었다. 첫 번째 수술 때 느꼈던 담담함은 온데간데없었다. 아이와 함께한 시간들이 머릿속을 맴돌았고, 그 시간이 길어질수록 두려움은 깊어졌다.


이번에는 분당에 있는 대학병원에서 수술을 받기로 했다. 수술을 위해 병원에 도착해 입원실을 배정받고, 검사가 시작됐다. 피검사를 할 차례가 되었다. 다섯 살밖에 되지 않은 아이가 얇은 팔을 내밀며 검사를 받았을 때, 아이는 그때도 울지 않았다. 차분하게 주사기를 바라보는 아이의 모습에 간호사도 놀란 듯했다. 아이가 원래 울음을 잘 참는 성격이라고는 했지만, 그 모습이 왜 그리 가슴 아프게 느껴졌는지 모르겠다. 아이는 묵묵히 검사를 받았고, 아이의 침착함이 오히려 나를 더 흔들어 놓았다. 저녁이 되자, 병원 지하에 있는 미용실에서 왼쪽 귀 뒤쪽 머리카락을 자르고 오라고 했다. 미용실에는 가발들이 참 많았다. 미용실에 앉아계신 대부분의 사람들은 항암으로 머리가 빠져있는 암환자들이었다. 아이 어렸을 때 아이 울지 말라고 자동차 의자가 있는 키즈 미용실을 가본 적이 있었는데, 이 기이한 상황을 보니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녁이 되자 신랑이 병원에 잠깐 들렀다. 그의 얼굴도 말이 아니었다. 신랑은 잠깐 아이의 손을 잡아주다 첫째와 함께 있어주려 집으로 돌아갔다. 나는 아이와 단둘이 남겨졌다. 불이 꺼진 병실, 침묵만이 가득 찬 병원 복도, 그 고요함 속에서 나는 밤새 한숨도 잠들지 못했다.

왼쪽: 수술실 들어가기 바로 전 모습 (그때도 너는 웃고 있었네 ㅠ). 오른쪽: 수술 중 대기하면서 찍은 병원의 낯선 모습

2019년 5월. 대학병원 수술실은 작은 병원과는 차원이 달랐다. 마치 의학 드라마 속에서만 보던 그 웅장한 수술실, 딱 그 모습이 그대로 떠올랐다. 불이 비추는 넓은 공간, 하얀 가운을 입은 의사들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의사 선생님은 아침 첫 수술로 일정을 잡아주셨다. 아이가 금식한 상태로 오래 기다리기 힘들 테니 배려해 주신 것이다. 수술실로 들어가는 순간이 다가왔다. 아이는 수술실에 혼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엄마와 함께 들어간다. 수술대에 누워 마취가 시작되고, 아이가 깊이 잠들 때까지 엄마는 그 옆에 있어준다. 마취제가 주입되자, 아이는 서서히 눈을 감았다. 작은 손이 서서히 힘을 잃고 몸이 스르르 풀렸다. 그 모습을 확인한 후에야 나는 수술실을 나왔다. 문을 열고 나오는 순간, 문 앞에 서 있던 남편이 눈에 들어왔다. 그동안 참고 있던 눈물이 한순간에 쏟아져 나왔다. 어찌나 멈추지 않던지, 남편도 그 눈물을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 몰랐다.


우리는 그 앞에서 조용히 기다렸다. 병원 복도에서 나눈 말들은 무겁고 간절했다. 서로를 바라보며 대화하는 시간도, 잠깐 눈을 감고 마음을 가다듬는 시간도 모두 긴장이 풀리기 어려운 순간들이었다. 수술시간은 원래 4시간이 채 걸리지 않는다고 들었는데, 어느새 4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시간이 갈수록 우리는 불안해졌다. 혹시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닐까? 마침내 수술실 앞에서 우리를 찾는 소리가 들렸다. 의사 선생님만 혼자 나왔다. 아이는 여전히 수술실에 있었다. “마취가 풀리는 과정에서 아이가 자가 호흡을 하지 않아 다시 마취를 시켰습니다. 시간이 더 걸릴 겁니다." 선생님의 말을 듣는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숨을 쉴 수 없다는 말에 온몸이 얼어붙었다. 다행히도 선생님은 '회복 중'이라고 했다. 비록 시간이 더 걸릴 거라 했지만, 그 말 한마디에 감사했다. 그래도 무사하다는 사실이, 그나마 숨통을 트이게 했다. 한참 후, 드디어 방송이 나왔다. "아이 보호자를 찾습니다." 그 소리가 그리 반가울 수 없었다. 수술실 문이 열리고 아이가 나오자, 나는 마침내 울컥하며 달려갔다. 아이는 회복실에서 30분 이상을 보청기와 와우 없이, 혼자 조용히 누워 있었다고 했다. 들리지도 않고, 보이지도 않는 그곳에서 아이가 얼마나 무서웠을까. 아이가 나를 보자마자 "엄마!" 하고 펑펑 울기 시작했다. 그 눈물은 참을 수 없었던 공포와 외로움의 표현이었다. 나는 아이를 꼭 안으며 "괜찮아. 다 끝났어. 잘됐어." 하고 위로했다. 하지만 그 말은 사실 나를 위한 말이기도 했다. 아이를 안고 하는 위로가, 나 스스로에게 보내는 다짐 같았다. 마치 드라마 속에서나 보던 장면처럼, 수술실 앞에 앉아 경과를 설명하는 교수님, 울고 있는 가족들... 그때 나는 그 장면들이 얼마나 진짜였는지, 얼마나 우리의 이야기였는지 온몸으로 느꼈다.


의사 선생님은 하루 종일 바쁘게 수술을 하시고도, 오후 3시쯤 병실로 오셨다. 아이 상태를 확인하시더니 "수술은 아주 잘 됐어요"라고 따뜻하게 말씀해 주셨다. 그 말 한마디에 모든 걱정이 스르르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11시쯤 늦은 밤 퇴근하시기 전에도 다시 병실로 들러 아이를 살펴주셨다. 하루 종일 일하시고도 늦은 시간에 다시 병실로 찾아오시는 모습에 마음이 찡했다. 그런 배려와 관심을 보여주는 모습이 참 멋지고, 존경스러웠다.


아이가 회복하는 며칠 동안, 병실에는 끊임없이 사람들이 찾아왔다. 놀이학교 원장 선생님과 담임 선생님, 교회 친구들까지... 병실 문이 열릴 때마다 마음이 따뜻해졌다. 놀이학교에 입학할 때, 부원장 선생님께서 "어머니, 00이 저희가 잘 키워 볼게요."라고 말해주셨던 그 순간이 기억났다. 그리고 정말로 그 약속을 지켜주신 듯했다. 직접 찾아와 준 그 마음 하나하나가 얼마나 큰 위로가 되었는지 모른다.


아이는 이제 더 이상 자연의 소리를 들을 수 없다. 양쪽 귀에 달린 작은 마이크들이 세상의 소리를 받아들였고, 그 소리는 전기 신호로 바뀌어 아이의 뇌로 전해졌다. 나는 발음이 엉망이었던 시절을 떠올리며, 차라리 더 정확하게 들을 수 있는 지금이 잘 된 일이라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그러나, 처음부터 쉬웠던 건 아니었다.

왼쪽 귀에 새롭게 인공와우를 착용한 뒤, 아이는 한동안 적응하지 못했다. 오른쪽으로만 소리를 들으려 했다. 나는 잠시 오른쪽 기기를 빼기로 했다. 왼쪽 귀로만 세상의 소리를 들려주기로 결심한 뒤, 아이는 더 힘들어했다. 처음엔 기계음을 듣는 것만 같았을 것이다. 차가운 로봇 소리 속에서 얼마나 불편했을지 상상이 간다. 하지만 나는 그런 면에서 꽤 냉정했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 아이가 이런 불편함을 빨리 이겨내길 바랐다. 놀이학교에 갈 때도 왼쪽 인공와우만 착용하고 보냈다. 매일 그 불편함을 견뎌야 했던 아이는 처음엔 많이 힘들어했다. "이게 소리야? 이게 사람 목소리야?"라는 표정을 짓던 아이의 모습이 떠오른다. 그래도 나는 뒤로 물러서지 않았다. 6개월이 지나니 아이는 왼쪽 인공와우로도 소리를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어느새 양쪽 귀 모두에서 소리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날이 왔다. 그 순간이 터닝포인트였다. 아이의 발음이 점점 또렷해지기 시작했다. 이제는 진짜 사람처럼, 진짜 목소리처럼 말하는 아이를 보며 나는 너무 기뻤다. 이제 시작이다.


지금 돌아보면, 그때 우리가 어떻게 그 모든 어려움을 겪어냈을까 싶다. 하지만 당시에는 그저 아이와 우리 가족은 매일을 살아가고 있었을 뿐이다. 남편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그는 "극복"이라는 단어가 너무 거창하다고 했다. "우리가 뭐 대단한 일을 한 것도 아니잖아. 그저 매 순간 최선을 다했을 뿐이야."라는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왜 포기하지 않았을까?"라는 질문에 남편은 웃으며 답했다. "어떻게 포기해... 자식일인데." 그 한마디가 모든 것을 설명해 주었다. 매일 새로운 미션들이 생기면, 그 미션을 풀어가는 것밖에 없었다. 수술, 회복, 치료가 일상이 되었고, 그 과정에서 아이는 조금씩 소리를 듣고, 말을 배우며, 세상과 어울리기 시작했다. 하루하루는 그저 평범한 일상의 연속처럼 보였지만, 그 속에서 우리는 조금씩 변했다. 처음에는 다음 날을 준비하는 것만으로도 벅찼지만, 어느새 수술도, 치료도 그리 특별한 일이 아니게 되었다. 이제 뒤돌아보니, 그 모든 경험들이 우리를 성장하게 했다는 걸 알게 된다. 하지만 그때는 그저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뿐이었다. 우리는 그저 매일의 미션을 풀어나갔을 뿐인데, 어느새 여기까지 오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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