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한 건 엄마뿐
아이가 4살이 되었을 때, 처음으로 기관 생활을 시도해 보기로 했다. 집 근처 가정 어린이집에 대기 신청을 넣었는데, 첫째는 공립 어린이집을 다녔지만 둘째는 왠지 내가 준비되지 않아 작은 가정 어린이집을 택했다. 자꾸 내가 죄인 같은 기분이 들었다. 대기를 건 지 6개월 정도 지나 원장 선생님께 전화가 왔다. "아이와 함께 방문해 주시겠어요?" 그 전화를 받고 나는 천천히 마음을 다잡았다. 어쩌면 새로운 시작일 수 있겠다 싶었다.
그때까지도 나는 아이들과 외출하는 게 쉽지 않았다. 마치 세상의 눈이 나를 향해 쏟아지는 듯한 느낌. 아이의 기기를 보며 쏟아지는 시선들이 자꾸만 신경 쓰였다. 그래도 용기를 내어 첫째와 둘째를 데리고 어린이집을 방문했다. 가정 어린이집은 생각보다 작았지만, 거실에 미끄럼틀도 있고 따뜻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둘째에게는 이곳이 딱 맞을 것 같았다. 아이들이 거실에서 담임 선생님 되실 분과 함께 놀고 있는 동안 나는 원장 선생님과 상담을 시작했다. 아이의 상황을 솔직하게 말씀드렸다. "인지에는 문제가 없고, 보청기와 인공와우를 통해 소리도 잘 듣고 있어요." 원장 선생님은 고개를 끄덕이며 입학원서를 건네주었다. "다음 주부터 등원해도 좋습니다." 그 순간 가슴이 두근거렸다. 큰 산을 넘은 듯한 느낌이었다. 드디어, 드디어 아이가 또래 친구들과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겠구나 싶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아이들과 함께 걷는 그 시간이 왠지 낯설고도 편안했다. 이젠 조금씩 나아질 거라는 희망이 피어오르기도 했다.
하지만 집에 돌아와 30분이 지났을까, 다시 전화가 울렸다. 아까 그 원장님이었다. "음... 이런 말씀드리기가 좀 조심스럽네요. 담임 선생님 말씀이 아이가 불러도 대답을 안 하고, 눈 마주침도 잘하지 않는다고 하시네요. 혹시 아이가 엄마랑 눈은 잘 마주치나요?" 전화기 너머의 목소리는 단호하게 들렸다. "저희가 바깥 활동도 많은데, 와우를 잃어버리게 될까 걱정도 되고... 만약 등원하신다면 한 살 어린아이들과 함께 생활하는 게 나을 것 같아요. 그렇지 않으면 받아들이기가 어렵겠어요." 순간 머릿속이 하얘졌다. 기어 다니는 아기들과 생활하라니, 아이가 또래 친구들과 어울리게 하려고 보낸 어린이집인데... 내가 용기를 내어 겨우 문을 두드렸는데, 그 첫 시도에서 거절을 당하다니. 그것도 거절이 아니라, 마치 돌려서 문을 닫아버린 느낌.
남편을 붙잡고 엉엉 울었다. 그동안 참아왔던 모든 감정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왔다. 서러웠다. 억울했다. 차라리 구청에 전화를 걸어 신고할까 싶기도 했지만, 신고를 한다고 그들의 생각이 바뀔 리 없을 거란 걸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까지 하고 싶지도 않았다. 나는 여전히 그저 아이에게 안전한 곳을 찾아주고 싶었을 뿐이었다.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마치 한동안 눌러왔던 감정들이 봇물 터지듯 쏟아져 내리는 느낌이었다. 세상 밖으로 아이를 내놓는다는 것이, 내가 상상한 것보다 훨씬 더 어려운 일이었다.
그래서 결국 내가 선택한 곳은 놀이학교였다. 놀이학교를 선택하는 건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재정적인 여유도 없었지만, 주변 친구들의 추천을 받아 상담을 받으러 갔다. 같은 아이를 보고도 반응이 전혀 달랐다. 부원장님은 “아이가 사회성도 좋고, 어머니, 저희가 00이 잘 키워볼게요. 요즘은 신체적으로 어려움이 있는 친구들보다 마음 아픈 아이들이 더 많아요. 그런 친구들이 더 어렵습니다."라고 말씀하셨다. 그 순간, 이분들이라면 아이를 믿고 맡길 수 있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부원장님의 말처럼, 아이는 4~5세 때 놀이학교에서 정말 지극 정성으로 돌봄을 받았다. 그때는 말도 제대로 못 하던 때였는데도 아이는 그곳에서 안정감을 느끼고 적극적인 케어를 받았다. 놀이학교는 한 반에 6명 정도밖에 되지 않았고, 그 속에서 아이는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라났다. 그곳은 마치 작은 천국 같았다.
하지만 5세가 끝나갈 무렵, 나는 고민에 빠졌다. 학교에 들어가서도 잘 적응할 수 있으려면, 더 큰 유치원으로 옮겨야 하지 않을까? 놀이학교는 너무나도 평화롭고 안락했지만, 그곳이 아이에게 평생 이어질 교육환경이 될 수는 없었다. 아이가 현실적인 공교육 시스템에 적응하려면, 좀 더 큰 세상에 나가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나는 기준을 세웠다. 첫째, 졸업 후에도 함께 같은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친구들이 많은 다니는 곳: 첫째 때는 생각해보지 않은 사항이다. 둘째, 한 반에 25명 이상의 아이들이 있는 유치원: 학교와 비슷한 듣기 환경 연습을 인한 것이었다. 셋째, 원장선생님께서 장애아이들의 이해도가 있는 곳. 나는 의도적으로 초등학교와 비슷한 조건의 유치원을 찾기 시작했다. 여기저기 알아보던 중, 집 근처에 딱 맞는 유치원을 발견하고 상담을 갔다. 그곳 원장 선생님은 장애 아동에게도 폭넓은 교육을 제공한다고 하셨고, 내가 가진 교육 철학과도 비슷한 가치관을 갖고 계셨다. 나는 그 유치원을 선택하기로 했다. 계속 작은 울타리에 안에서 살고 싶은 마음이 가득했어서 그때는 그것이 꽤나 용기가 필요한 선택이었다. 아이는 공교육에 하루빨리 적응해야만 했다. 마침 5살 5월에 두 번째 인공와우 수술을 하고, 아이가 한글을 읽기 시작하면서 발음이 점차 또렷해졌다. 아이가 문장으로 말하기 시작하니, 나는 더더욱 공교육과 비슷한 환경의 유치원에 입학시키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지금 돌이켜 보면, 그때의 결정이 우리에게 얼마나 중요한 전환점이었는지 다시 한번 실감하게 된다.
새로 옮길 유치원에는 6세 반은 두 반이 있었고, 각 반에 아이들이 30명씩 되었다. 한 반에 30명이라니, 아이에게는 조금 버거울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지만, 나는 초등학교 전에 이런 환경을 꼭 경험해 보길 바랐다. 큰 무리가 있는 곳에서 잘 안 들리는 상황도 겪어봐야 하고 여러 사람과 함께 어울리며 살아가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부쩍거리는 유치원에서 아이는 잘 적응할까? 안 들릴 텐데... 걱정이 있었지만, 준비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더 컸다. 생각보다 아이는 잘 적응했다. 좋은 친구들도 많이 만나고, 점점 유치원이 즐겁다는 이야기를 해왔다. 이제 점점 커가니 아이가 사람이 많은 곳에서 어떻게 반응할지도 솔직히 궁금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이가 집에 돌아와서 말했다. "엄마, 친구들이 쉬는 시간에 여러 명이 동시에 이야기하니까 나는 하나도 안 들렸어." 그 말을 듣는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아! 정말 시끄러울 때는 안 들린다고 하더니, 그 말이 사실이었구나.' 이제는 그런 피드백이 익숙하지만, 그 당시에는 아이의 첫 피드백이 너무나 생생하게 와닿았다. 그제야 와우의 특성을 몸소 경험하게 된 것이다. 나는 선생님께 전화를 걸어 다시 한번 잘 안 들리는 상황들을 설명드렸다. 아이는 시끄러운 환경에서 여러 사람이 동시에 말할 때 소리를 잘 듣지 못했다. 그게 명백한 현실이었다.
또 어느 날, 아이가 이렇게 말했다. "엄마, 왜 나만 인공와우 했어? 친구들은 아무도 안 했는데..." 아이가 자신의 와우에 대해 처음으로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나는 최대한 담담하게 답했다. "아빠는 눈이 나빠서 안경을 쓰는 것처럼 도윤이는 귀가 잘 안 들려서 와우를 착용하고 있는 거야." 그때는 그 대답으로 충분했지만, 그날 밤 나는 잠을 설쳤다. '다음에 아이가 또 물으면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 더 나은 대답이 있나, 계속 고민했다. 아이의 피드백은 점점 구체적이고 세심해졌다. 강당에서는 소리가 너무 울려 거의 알아들을 수 없다거나, 놀이터에서 친구가 뒤에서 불렀는데 자기가 대답을 못 해서 친구가 화를 냈다는 이야기도 전해주었다. 그런 피드백들이 나에게는 너무나도 소중했다. 이론으로만 들었던 와우의 한계를 아이의 입을 통해 직접 듣게 되니, 내가 무엇을 더 신경 써야 하는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그 피드백들은 마치 아이가 세상과 소통하기 위해 내게 건네는 작은 신호들이었다. 나는 놓치지 않고 메모해 두었다가 선생님과 상담하는 날이 되면 상황을 자세하게 설명드렸다.
7살이 되면서 학교 준비가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특수교육청에서 지원받은 FM송수신기를 유치원 때부터 사용해 보기로 했다. 아직 초등학교도 안 갔는데 웬 송수신기냐는 생각이 들 수도 있지만, 초등 4학년이 되면 어휘가 훨씬 어려워진다. 미리 연습해 두면 적응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 같았다. FM송신기는 선생님 목에 거는 작은 마이크고, FM수신기는 아이의 인공와우에 붙이는 조그만 장치다. 선생님의 목소리가 블루투스처럼 바로 와우로 전달된다. 아이는 선생님의 말을 놓치지 않고 들을 수 있는 거다. 처음엔 좀 낯설어했지만, 점점 익숙해졌다. 아이는 수업이 훨씬 잘 들린다고 했다. 장치 덕에 아이는 더 쉽게 수업을 따라가고 있었고, 나는 아이가 들려주는 작은 피드백들이 얼마나 고마운지 새삼 느꼈다.
와우에 대해 자꾸 물어보는 아이를 보면서 ‘장애’라는 단어를 언제, 어떻게 꺼내야 할지 고민이 늘어갔다. 6살이 막 끝나가던 때, 난청 상담 선생님과 통화할 기회가 있어 이 문제를 여쭤봤다. "아이가 7살쯤 되면 장애에 대해 객관적으로, 정확하게 알려주셔야 해요. 청각장애를 어떻게 얻게 되었는지, 어떤 기기를 통해 소리를 듣는지, 장애라는 단어를 사용해서요." 사실 나는 청각장애 이해교육 강사로 일한 지 1~2년이 되었지만, 여전히 ‘장애’라는 단어가 나에게는 금기어 같았다. 강의 중에도 될 수 있으면 그 말을 피했고, 굳이 쓰지 않으려고 애썼다. 그 단어를 입에 올리는 순간, 내 비밀이 들킨 듯한 기분이 들어서. 그래서 요리조리 피해 다녔다. 그런데 피한다고 그 단어가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아이를 위해서라도 이제는 말해야 할 때였다.
마침내 어느 날, 나는 큰 결심을 하고 아이에게 말했다. "00아, 네가 태어나고 며칠 뒤에 병원에서 소리를 들려줬는데, 반응이 없었어. 그래서 더 큰 병원에서 다시 검사를 했지. 그때 알았어. 너는 소리를 듣지 못한다는 걸. 소리를 못 듣는 사람을 청각장애인이라고 불러. 그냥 소리를 못 듣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혜택을 주려고 구분하는 거야. 그래서 너는 1살, 5살 때 인공와우 수술을 했고, 지금은 와우 덕분에 소리도 듣고 말도 잘하게 됐잖아. 엄마는 그게 정말 감사해. 와우가 우리 가족에게는 너무 소중한 거야. 그렇지?" 그렇게 말하고 나니, 처음으로 아이에게 ‘장애’라는 단어를 자연스럽게 사용한 게 실감 났다. 처음엔 어색했다. 하지만 그 후로 나는 계속 ‘장애’라는 말을 꺼냈다. 피할 수 없는 단어라면, 차라리 집에서부터 익숙해지자고 마음먹었다. 어차피 밖에서는 수없이 듣게 될 말이었다. 그래서 집안에서도, 대화에서도 "청각장애"라고 종종 달고 살았다. 그렇게 한참을 지내다 보니, 어느 순간 ‘장애’라는 말은 우리 가족에게 그저 "밥 먹었어?" 같은 일상적인 단어가 되었다.
아이는 그렇게 무럭무럭 자라났다. 어느덧 초등학교 입학이 다가왔고, 나는 다시 밤잠을 설쳐가며 불안에 시달렸다. 아이가 받아쓰기를 제대로 알아들을 수 있을까? 혹시 놀리는 친구들이 생기면 어떻게 하지? 놀이학교에서, 유치원에서 잘 적응해 온 아이였지만, 초등학교라는 큰 벽이 나에게는 너무도 버거운 현실로 다가왔다. 새롭게 마주할 세상이 아직도 내겐 낯설고 막막하게만 느껴졌다. 초등학교 입학을 앞둔 1~2달 전부터는 아예 잠이 오지 않았다. 머릿속에서는 부정적인 생각들이 마치 끝없는 터널처럼 이어졌고, 꼬리에 꼬리를 물며 나를 휘감았다. '아이가 정말 괜찮을까?' '혹시라도 적응하지 못하면 어떻게 하지?' 나도 모르게 매일매일 같은 질문들을 던지며 지쳐갔다. 초등학교는 그저 또 다른 큰 벽, 그 벽 앞에서 나는 여전히 망설였다.
하지만 정작 아이는 나와는 달랐다. 아이는 초등학교에 다닐 준비가 이미 되어 있었다.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방식으로, 그는 나보다 더 많은 장벽을 이미 넘어왔고, 스스로의 길을 만들어가고 있었다.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이번에도 아이는 그 벽을 자신만의 속도로 넘어갈 것이었다. “엄마, 괜찮아.” 아이의 한마디가 나를 잠시 멈추게 했다. 그 말속에는 어떤 불안도 없었고, 내가 가진 온갖 걱정은 아이의 눈에 비치지 않았다. 아이는 오히려 나를 안심시켰다. 준비가 되어 있었다. 나는 그 사실을 뒤늦게서야 깨달았다.
아이와 함께한 시간이 쌓일수록, 나는 점점 더 뚜렷하게 알게 되었다. 내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아이의 앞날이 아니라, 사실 나 자신의 불안이었다. 아이는 이미 세상과 당당히 마주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내가 준비되지 않은 건, 오히려 나였다. 아이를 지켜보는 내내, 나는 혼자서 너무 많은 장벽을 쌓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아이는 내 걱정을 무색하게 만들 만큼 강했고, 나보다 먼저 새로운 세상으로 한 발짝 내딛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