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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현정 Jun 05. 2015

 나답게 살기





#.


살다보면 반드시 새로운 관계를 맺어야만 하는 시기가 있다.

싫어도 그래야만 하는 시기.

자연스레 맺어지는 관계가 아니라 억지로 가져야 하는 인간관계는 억지로 먹어야 하는 약만큼이나 괴롭다.



내게는 학창시절이 그러했고 특히 대학생일 때 인간관계로부터 오는 괴로움이 극에 달했다.

중,고등학교 시절이야 일 년 동안 좋든 싫든 한 반에 묶여 있기에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레 친해질 수 있다치더라도

대학생이 되어 생전 처음 가보는 도시에서, 전국 각지에서 몰려온 사람을 사귀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워낙 수줍음이 많고 먼저 다가서는 일에 서툴렀던 나는 새로운 환경과 새로운 사람에 대한 기대와 호기심으로 흥청거리는 3월의 캠퍼스를

도저히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그러나 어쩌겠나, 아웃사이더가 된다거나 혼자 먹는 밥, 혼자 듣는 수업은 내 머리로는 결코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갓 스무살이 되었던 그 시기에 내게, 친구는 사귀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만들어야하는 미션과 같은 것이었다.



그때부터 였다.

억지 웃음을 시전하고 부러 쾌활한 척하는 가면을 쓰기 시작한 것이.



친구를 사귄다는 건 어쨌든 호감형이어야 한다는 뜻이고,

흔히 통용되는 '호감형 인간'이란 밝고, 웃음 많고, 어두운 구석이란 요만큼도 보이지 않는 사람이니까.



그러나 가면은 언젠가 벗겨지기 마련이다.

타인에 의해서든, 아니면 답답함을 못이긴 자신에 의해서든.





#



나는 내가 가진 내성적인 성격을 버려야한다고 생각했고

타고난 것을 버리는데 얼마쯤, 새로운 이상적 자아를 만들어내는데 얼마쯤의 에너지를 소모해야했다.



억지로 모임에 나가 웃고 밝은 척하고 돌아오던 날은 너덜거리며 집으로 돌아와야했고,

나를 잃어버린 것만 같은 마음에 모래처럼 서걱거리는 마음을 안고서 잠을 청해야했다.



내 본성이 원래부터 그러한 것을 인정하지 않고 부정에 부정을 거듭했던 시절이었다.



남들에게 호감이 되고싶다는 타인 지향적 욕망과 나 스스로를 지켜야한다는 자기애적 욕구 그 사이 어디선가

어쩔 줄 모르고 서있었던 시기이기도 했다.


호감형 인간으로 거듭나기 위해 그나마 남아있던 내적 에너지를 바깥으로 다 발산하고,

없는 힘을 쥐어짜내어 웃고 다니기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아 나는 나동그라질 수밖에 없었다.




#.


이렇듯 타고난 본성을 가리려하거나

가지고 태어난 천성을 억지로 바꾸려하는데서 괴로움이 생긴다.



이를테면, 나는 내면의 고요함을 지키고

그 고요함을 마음껏 누리고 즐길 시간이 보장되지 않으면 안 되는 사람이었다.

그것을 너무 늦게 깨달았고  깨닫고 나서도 한동안 부정에 부정을 거듭했다.



세상은 좀더 쾌활하고 밝고 사람들과 시끌벅적 어울리는 것을 좋아하는 성격을 옳은 것이라 규정했고

그렇지 못한 사람을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으로 낙인찍어버리기에.





#.


호감형이고 싶은 마음은 사랑받고 싶은 마음이고, 절대로 찌질하게 보이고 싶지 않다는 마음의 반영이다.


찌질하게 보이고 싶지 않다는 것은 강해보이고 싶다는 마음에 다름아니며,


강해보이고 싶다는 것은 무시당하고 싶지않거나, 인정받고 싶은 내안의 어린아이의 욕구였다.


그렇게 타인지향적인 욕구가 강해질수록 내 색깔은 조금씩 낡아갔고 내 자아는 늘 자리잡지 못하고 어딘가에서 서성거렸다.




그렇게 불필요한 에너지 소모로 지쳐가면서, 매순간마다 조금씩 나를 잃어갈 것을 생각하니

그것이 더 끔찍하고 괴로웠다.



오히려 부정해야 할 것은 내 성격이 아니라

그런 성격을 어디쯤 부족하거나, 교정의 대상이라고 여기는 타인들의 시선이었음을 깨닫는 순간이었다.




조금찌질하면 어떠한가,

이게 나인 것을.


이런 나를 데리고도 이때껏 잘살아왔고,

충분히 예쁨을 받았지 않은가.


모든 사람들이 밝거나 쾌활할 필요는 없으며

또 인간은 원래가 찌질한 존재 아니었던가.


인정하기만하면 이렇게나 쉬운 것을.

나는 얼마나 스스로를 괴롭혀왔는지.



내 찌질함, 나의 수줍음, 내성적인 성격이 내 옆의 누군가에게 피해만 주지 않는다면

나는 그것을 교정할 의무 따위 가질 필요가 없었다.



그때부터 나는 몇 겹쯤 쌓아올렸던 가면을 하나씩 벗고,

나의 찌질함과 부실함과 부족함과 내 속에 숨겨왔던 어둠을 조금씩 세상에 내보였다.



혼자 밥먹고

혼자 영화보고

혼자 서점가고

혼자 도서관에서 공부하는 것이 괜찮아졌고, 당연해졌다.

혼자 잘 쏘다니는 내모습을 불쌍하게 여기는 시선들을 물리칠 배짱도 왕창 생겼다.




무언가를 억지로 바꾸려할 때 갈등과 불화가 생기는 법이다.

굳이 바꾸지 않아도 되는 것은 바꿀 필요가 없다. 나는 나인걸, 아무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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