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 먹은 일이 생각대로 흘러가지 않거나, 현재의 내 모습이 과거에 그렸던 멋진 모습이 아닐 때 인생을 처음부터 시작하면 어떨까를 상상해보곤 한다.
노트북이 먹통일 때 전원 버튼을 길게 꾹- 눌러 깔끔하게 다시 시작하듯이.
그러나 그런 건 상상으로나 가능한 일임을 알기에 곧바로 구질구질한 현재를 탈피할 수 있는 현실적 방안을 강구해본다.
마음에 들지 않는 지금의 내 모습은 진짜 내가 아닐 거라는 생각으로, 훌쩍 여행을 떠나 낯선 곳에서 내가 몰랐던 내 모습을 발견해 보고 싶기도 하고
지금의 외모를 바꾸면 내 인생이 좀 달라질까 싶어 성형을 고민해 보기도 하고,
질척거리는 현실을 깔끔하게 정리해줄 멘토를 찾아보기도 하며.
멋지게 꿈을 펼치며 살아가는 사람을 찾아 롤모델로 삼아보기도 한다.
이랬던 내게 영화 <까밀 리와인드>는 큰 의미로 다가왔다.
주인공 까밀. 그녀는 마흔이 넘은 나이에 무명배우이며 알코올 중독까지 앓고 있다.
남편과는 어린 나이에 사랑에 빠졌다가 갑작스레 임신을 하게 되면서 결혼을 한 상황.
게다가 지금은 바람 난 남편이 이혼까지 요구하고 있다. 이 정도면 정말 인생을 실패했다고 정의하고 '리셋'하고 싶어 질 만하다.
그런데 진짜로 까밀은 열여섯 살의 나이로 돌아가게 된다. 그것도 40대의 기억을 그대로 간직한 채!
이 얼마나 최고의 조건인지. 과거로 돌아가고 싶으냐는 질문을 던지면 누구나 다 조건을 달지 않던가. 지금 내가 알고 있는 것을 잊지 않고 돌아갈 수 있다면 그러겠노라고.
돌아간 과거의 지점에서 까밀은. 옛날에 하지 못해 후회로 남은 일들을 하나씩 해나가고 자신의 인생에 걸림돌이 되었다고 여기는 일들은 피하려고 노력한다.
남편 에릭과의 만남을 회피하거나, 엄마의 죽음을 막아보려 한다거나 같은.
하지만 그럴수록 에릭과의 인연은 더 복잡해졌고, 아무리 노력해봐도 엄마의 죽음은 막을 수 없었다.
다시 깨끗한 백지에서 시작한다 하더라도 피할 수 없는 일과 인간의 힘으로 바꿀 수 없는 일들이 있었던 것이다.
결국 까밀은 새로 시작한 인생에서 받아들이기 힘들지만 인정해야만 하는 진실과 마주하게 된다.
삶에는 바꿀 수 있는 것과 바꿀 수 없는 것이 있다는 가슴 저리도록 분명한 진실 말이다.
낯선 어딘가로 떠나서 아주 멋진 내 모습을 찾아보겠다는 생각이나,
혹은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면 잘 할 수 있다는 헛된 망상으로 지금의 시간을 흘려보내는 일이 얼마나 많았던가.
그런 것들은 잠깐의 위안 혹은 짧은 자극이 되어줄 뿐,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해주진 못한다.
말하자면 일시적인 진통제나 해열제를 투여하는 일에 불과할 뿐이다.
인생을 아예 처음부터 시작해보고 싶은 욕망이나 혹은, 진정한 나를 찾아야겠다는 생각은 현재 부족한 내 모습은 진짜 내가 아니라는 부정과,
지금의 단점 따위 모두 상쇄시켜버릴 수 있는 아주 완벽한 내가 어딘가에 분명히 있을 거라는 막연한 상상이 교묘히 합쳐진 몽상이다.
변화는 나의 의지가 행동으로 연결되면서 '지금, 여기, 현재'에서 일어난다.
몸 담고 있는 공간과 현재의 시간에서 지금의 내 모습을 정직하게 인정하고 더 나아지기 위해 움직이는 자에게만 허락되는 것이다.
바꿀 수 없는 것이나, 손에 쥐고 있지 않는 것에 집착하여 현실을 외면하는 일이 얼마나 많았던지.
지금 내 모습을 그대로 인정하고, 노력할 수 있는 부분이 어떤 것인지를 찾고, 내 의지만으로 해결할 수 없는 일이 무엇인지를 분별하는 능력이 절실히 필요하다.
비록 지금 취할 수 있는 행동이 아주 사소할 지라도.
삶은 어딘가에 있을 멋진 내 모습을 찾으러 다니는 여정이 아니라, 지금의 조금 모자란 나를 데리고 어떻게든 잘 살아보려고 노력하는 과정이다.
에밀 아자르의 <자기 앞의 생>에서 영화를 되감는 것처럼 삶을 되감는다면 멋질 거라고 생각하는 모모에게 한 남자가 이야기한다.
"불행하게도, 다시 시작해봤자 결국 그게 그거야."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우리 앞에 놓인 생'이다.
변화는 '지금, 여기'에서 시작된다.
+
처음엔 그저 제 글을 올릴 수 있는 새로운 글터가 생겨 좋았는데
봐주시는 분이 하나 둘 늘어나면서 덧붙여 주시는 생각들에 더 즐거운 나날들입니다.
남겨주시는 댓글, 빠짐없이 다 보고 있답니다.
정말 감사하는 마음으로요.
그냥 지나칠 수도 있는 글 앞에 잠깐 멈추어 토각토각 글자를 입력하셨을 정성에 무엇으로 마음을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브런치에 익숙하지 않아 글 올리기에만 급급했던 지난날이에요.
이제는 조금 긴장을 풀고 이 공간에 찾아와 주시는 분들과 소통을 해도 되겠다는 조금의 용기가 생겼어요.
늘, 감사합니다.
9월의 첫날, 다들 행복하시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