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히 고백하자면, 나는 질투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예쁜 외모, 부러운 몸매부터 성적, 주변인들의 애정과 관심 등. 어떤 것이든 '좋아 보이는' 것을 나보다 더 많이 가지고 있는 이에겐 남녀 불문하고 질투를 느끼곤 했다. 질투는 다른 어떤 감정보다 오랫동안 나를 지배했다. 질투에 휩싸이면 나의 모든 것을 온전히 내던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질투는 뜨거운 감자와 같이 혼자서 가만히 가지고 있을 수 없는 폭탄 같은 감정이다. 질투의 상대를 미친 듯 증오하는 건 기본이며, 신경 레이더는 온통 그의 흠을 잡아내기 위해 터질 듯 긴장한다. 더 나아가 나의 질투와 겨우 찾아낸 그의 흠이 객관적이라는 당위를 얻기 위해 또 다른 누군가와 질투의 대상이 되는 사람의 험담을 하기도 한다. 더 괴로울 때는 내가 질투하고 있음을 자각하고, 내 행동의 유치함을 인지할 때다. 내 자격지심이라고 인정하고 넘어가기에는 속이 상하기에 에너지를 온통 그 사람을 깎아내리는데 쓴다. 이런 식으로 나는 질투를 잘 컨트롤하지 못했고, 감정에 종속된 노예처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괴로운 시간을 보냈다.
뒤늦게 질투의 소용돌이에서 정신을 차렸을 때, 그 감정이 내 자신을 갉아먹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더 이상 그대로 있을 수만은 없었다. 아픈 곳을 치료하기 위해 상처를 꼼꼼히 들여다보듯 질투라는 감정을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모든 감정에는 원인이 있기 마련이며, 특히 부정적인 감정은 내 안에서 곪고 있는 문제를 알려주는 정확한 지표이기에 더 찬찬히 들여다 볼 필요가 있었다.
가장 처음 고민한 부분은 내가 정확히 상대의 '어떤 점'을 질투하는가 였다. 내가 갖고 싶어 하고 부러워하는 부분을 하나하나 짚어나가다 보면 모든 건 결국 나의 결핍과 맞닿아 있었다. 밖으로 발산하는 부정적 감정은 결국 내 안의 한 구멍에서 기원한 것이었다. 괴롭더라도 이 결핍을 정직하게 마주하는 것이 첫 번째 과제였다.
나의 결핍을 마주한 후 두 번째로 필요했던 건, 그것을 가진 상대와의 '공정한 비교'과정 이었다. 우선 노력으로 가질 수 없는 것들은 비교대상이 될 수 없으니 배제하는 게 옳았다. 타고난 외모, 집안의 부유함 같은 것들. 그리고 나서는 내가 부러워하는 것들을 얻기 위해 상대가 했을 노력을 객관적으로 파악하려 노력했다. 이렇듯 '공정한 비교'는 '객관적 분석'이어야 한다. 얄팍한 '비교질'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다. 뭔가 손에 쥔 사람들을 쉽게 질투하는 건, 현재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만 비교했기 때문이다. 지난 시간 동안 그가 해왔던 노력과 그가 들인 시간을 생각한다면 질투보단 오히려 경외심이 들게 된다.
세 번째로, 얄팍한 비교 후 스스로를 초라하게 여기는 내 자신을 돌아볼 필요가 있었다. 그저 타인의 모습을 부러워하는데서 그치는 게 아니라 거기에서 더 나아가 나 자신을 깎아내리며 괴로워하곤 했는데, 그건 분명 내가 가진 것을 소중히 여기지 못했던 탓이기도 했다. 나의 장점이나 매력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바깥으로만 눈을 돌렸으니, 마음이 건강할리가 없었다.
이렇게 나의 결핍과 상대의 노력, 그리고 스스로를 아끼지 못하는 내 자신을 분석하고 객관적으로 비교 파악한 후에 내게 남은 건 선택이었다. 질투의 감정을 동력으로 삼을 것인가, 아니면 상대의 흠집을 찾아내어 험담을 하는, 이른바 싸구려 위안만을 계속하여 얻을 것인가. 그 중대한 기로에서는 한심한 떼쓰기는 더 이상 통하지 않았다. 노력 없이 질투하거나 시기하는 건 도둑놈 심보와 같다는 것을 깨달은 까닭이었다.
지금도 여전히 질투하고 시기하며 살지만 그때와 달라진 점을 꼽자면, 질투라는 감정을 온전히 들여다 볼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는 거다. 예전의 내가 질투에 휩싸여 그 뜨거운 감정을 어찌할 바 모르는 어린아이와 같았다면 지금의 나는 질투를 나의 발전을 위해 이용할 줄 아는 영악함을 가지게 되었다.
살면서 질투나 시기의 감정을 갖지 않을 수는 없다. 노골적으로 경쟁과 비교를 부추기는 오늘 날 대한민국에서는 더더욱 그러하다. 그러나 얄팍한 비교질이 아닌 공정한 분석을 통해 질투라는 감정을 발전의 씨앗으로 삼을 수 있다면 좀 더 생산적인 삶을 살 수 있다고 믿는다. 반드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