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니까, 다 지나간다는 걸 기억하기 위해
낙엽을 양손 가득 주워 올리던 올가을의 어느 날이 생각난다. 스산한 공기, 어둑한 하늘, 습기를 머금어 눅눅했던 흙내음까지도 모두.
차가운 흙 위에 살포시 떨어져 있던 낙엽들 중 쓸만한 것들을 골라 살금살금 먼지를 털어내고 아끼는 수첩에 끼워 넣었던 그날, 나는 오늘을 꼭 기억해야만 한다는 막중한 의무감을 느꼈다.
예쁘게 말려 책갈피로 써야겠다는 소녀 같은 마음은 물론 아니었고, 매년 다른 마음으로 맞이하는 가을을 추억하고 싶은 생각으로 한 행동도 아니었다.
지나가고 있는 가을에 대한 아쉬움이라기보다는, 모든 것은 결국 다 지나간다는 사실 하나를 기억하기 위함. 그 뿐이었다.
불안정한 리듬에 맞춰 낯선 이들 앞에서 춤을 춰야만 하는 사람처럼, 낙엽을 주워 올리던 그즈음의 나는 매일같이 가쁜 숨을 몰아쉬며 지진 난 듯한 동공을 이리저리 굴려댔다.
갑자기 쌀쌀해진 온도를 감당하기엔 턱없이 부족한 두께의 옷을 걸치고 있는 것만 같았고, 동아줄인가 하여 붙잡아보는 것들이 온통 손아귀에서 미끄러져 빠져나가는 듯한 참담함을 맛보는 듯도 했다.
그냥, 그랬다. 그냥, 이 무서운 건 손쓸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거다.
그냥, 이니까. 이유 따위 없으니까.
어쨌든 연약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견디는 일뿐이었는데, 그 와중에 딱 한 가지 희망이 되어주었던 건 '이 또한 지나가리라'는 흔하고 뻔하고 식상 하디 식상한 말이었다.
감정의 기록물을 들여다보는 행위로부터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으뜸은, 좋은 일도 나쁜 일도 결국엔 다 지나간다고야 만다는 따끈한 국밥 한 그릇이 주는 것과 같은 위로이다.
지난 일기장을 펼치고선, 지금에 와서는 좀처럼 기억나지 않는 최악의 상황들을 애써 떠올려보지만 그 비슷한 감정을 티끌만큼도 느낄 수 없을 때.
혹독한 시간을 견디고 있는 누군가에게 그 찰나 같은 순간은 비로소 실낱같은 희망이 되어 번져나간다.
그래서, 나는 올 가을의 여러 날을 낙엽을 주우며 보냈다.
그렇게 주워모은 낙엽에 그날의 참담함과 고단함을 꾹꾹 눌러 담아 일기장 곳곳에 숨겨놓았다.
다 지나가게 마련이라는 당연한 사실을 자꾸만 잊는 나를 위해,
이 모든 것을 겪어내고 또 다른 슬픔에 비틀거리고 있을 한 달 뒤, 혹은 일 년 뒤의 나를 위해.
일기장을 뒤적이다 예상치 못하게 후두둑 쏟아져내린 마른 이파리를 보면서 고단한 날들을 버틸 미래의 나를 위해 미리 해두는 조언이랄까, 위로랄까.
인생에서 미치도록 지워버리고 싶은 그런 날들을 견디고 있다면, 시간의 한 귀퉁이 살짝 접어 어딘가에 꼭꼭 숨겨놓으시길.
언젠가 또 다른 종류의 상처로 쓰라릴 때 남몰래 꺼내볼 수 있도록.
다 지나간다고 속삭이는 과거의 상처들은, 꽤 뜨끈한 위로가 되어줄 것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