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제 밖에 있는 무언가, 가령, 변하게 마련인 사람의 마음이나 결과로 이야기해야만 하는 성취의 영역을 통해 구원받고자 했을 때 도리어 나는 불행해지고 말았다.
사랑을 받으면 일상이 조금 더 특별해진다는 사실을 깨닫고서는 나라는 존재에 안달하는 사람이 나타나 주기를 매일 소원했고, 사람들 앞에서 멋지게 성취의 결과를 펼쳐 보이는 순간만을 꿈꿨다.
좀 더 나은 삶을 위해 필요하다고 생각한 일은 그런 것이었다.
내 의지와 선택이 미치는 영향은 미미한 일들.
애초에 통제할 수 없는 어떤 것에서 100% 위안을 얻으려 하거나 그런 것들만을 통해 조금 더 나은 삶을 기대하는 일은, 파도가 심하게 몰아치는 망망대해에서 쪽배 하나에 겨우 의지하여 살아남아야 하는 일과 같다.
언제 뒤집힐지 모르는 그런 쪽배 하나만이 선택지인 삶인 것이다.
의지할 것이라곤 온통 내 노력과는 무관한 것들뿐이지만, 다른 선택지 또한 없으니 끊임없이 불확실한 것에 휘둘리는 것이 전부인 불행한 삶 말이다.
연애를 통해 사랑받고자 했으나 나와 타인이 늘, 언제나 하나로 겹쳐질 수 없음에 자주 좌절했으며, 성취의 결과로 자아의 가치를 말하고자 했으나 생각보다 뛰어나지 않은 현실적 능력에 휘청이며 무릎이 꺾이곤 했다.
타인의 사랑과 인정에 대한 갈급함을 멈출 수 없었기에 변하게 마련인 사람의 마음에 더 크게 아플 수밖에 없었다.
늘 불안이 그림자처럼 따라붙었다.
주체적 의지와는 무관한 삶, 선택하기보단 선택받기를 기다리는 삶 옆에는 불안과 초조가 친구처럼 따르기 마련이니까.
내게는 선택의 전부인 유일한 존재에게, 정작 나는 그의 전부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자각하는 순간은 원망스러울 만큼 잔인하다.
불확실함에 나를 내맡기고 선택하지 않음을 선택한 결과란 대부분 그렇게 냉정한 얼굴을 하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불확실함이 가득한 세상에서 그나마 확신할 수 있는 건, 주체적 의지와 선택이 따르는 삶에선 후회는 있을지언정 버림받았다는 억울함이나 이리저리 휘둘리다 길 잃을 잃어버린 자신을 자각할 가능성이 적다는 것이다.
눈에 보이는 성취의 결과나 타인의 애정이 우리에게 줄 수 있는 위안과 스스로 선택하고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느끼는 충족감은 엄연히 다르며, 그들이 적절히 공존할 때 우리네 삶은 훨씬 건강해진다.
불확실함에 나를 내맡기지 않으며, 눈에 보이는 결과나 타인의 인정 외에 스스로 구원받을 수 있는 주체적인 몇 가지 방법을 알아두기.
최고의 정신적 보험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