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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ango Apr 21. 2017

과테말라에서 청소부로 지낸 한달은

여행에서 나를 치유했던 시간이었다.

여행이란 삶에서 지쳐 있었다.


 남미 여행 코스를 한번 훑어봐야 해서 브라질에서부터 시작하여 여러 나라를 거쳐 페루까지 빠른 걸음으로 올라가야 했다. 그 빠른 걸음이 나를 지치게 했던지 아무것도 하고 싶지가 않아 혼자 멕시코로 들어가 아름다운 마을로 유명한 산크리스토발로 들어가게 되었다.


 그곳에서 한 여자아이를 카페에서 우연히 만났다. 그녀는 지금도 나의 마음을 모르겠지만 사실 난 그때 좀 지쳐있었고 외로웠었다. 시끄러운 호스텔에 며칠을 있었지만 누구와도 말을 건넬 사람이 없어, 작은 싱글룸에 들어가 침대에 누워 시간을 보내거나 조그만 부엌에서 간단한 야채 요리를 만들어 먹고 볕이 좋은 한낮엔 동네 산책과 시장을 둘러보는 게 전부인 생활이었다.


 그러다가  산책을 할 때면 늘 지나치던 '초코 라테'라는 작은 카페에 그녀가 혼자 앉아 있는 것을 창가에서 보게 되었다. 언젠간 들어가 봐야지 하던 작은 카페였는데, 이날은 조심히 문을 열고 말이라도 나눌 수 있을까 하는 마음에 그녀 뒤쪽의 테이블에 앉아 초코 라테를 한잔 주문했다. 그녀는 혼자 거리가 보이는 좋은 자리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고, 수즙음이 많은 나는 그녀를 흘낏 쳐다보는 게 다였다. 드디어 초콜릿 방울 한 줄이 찻잔 아래로 흘러내리는 따뜻한 초코 라테가 테이블에 놓였고, 잔에 한가득 차있는 초코 라테를 한 모금 음미하고는 햇살이 가득한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때, 갑자기 뒤에서 밝은 인사 소리가 들렸다. 뒤를 돌아보니 혼자 책을 읽고 있던 그녀가 나에게 말을 건 것이었다. 그녀는 혼자 중남미를 여행하고 있는 한국인 여행자였는데, 하얀 얼굴에 빛나는 치아를 활짝 내보이며 읽고 있던 책을 들고 바로 내 테이블로 오더니 앞 의자에 걸터앉았다. 난 한창 산크리스토발의 스페인식 정취에 싫증을 내던 참이었고, 가끔씩 내리는 뼛속까지 차갑게 만드는 빗물에 마음이 한층 더 우울하던 참이었다. 그런데 그녀가 그때 과테말라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과테말라는 스페인어를 공부하기 좋은 곳이고, 이곳 산크리스토발에서 차를 타고 간단히 국경을 넘을 수 있다는 그 말은 그때 나에게 참 매력적으로 들렸다. 그녀는 이틀 후에 과테말라의 쉘라로 가서 스페인어를 공부해 볼 참이라고 했다. 그리고 난 그 자리에서 그녀와 함께 떠나기로 결정하였다.



그래서 한달 머물며 스페인어를 배우기로!


 국경을 넘는 날 하필 국경 근처에서 파업이 있어서 오랜 시간을 기다리며 버스와 봉고차를 갈아타고 멕시코 국경을 넘어 쉘라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그녀가 예약한 타카 하우스라는 일본인 타카가 만든 호스텔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그는 과테말라에 살며 작은 호스텔과 함께 스페인어 학원도 운영하고 있었다. 벨을 누르고 한참이 지나서야 문이 열렸고, 주인인 타카상이 미소를 지으며 나타났다. 아담하고 오래되어 보이는 과테말라식 전통 집안에 들어서니 마당이 있었고, 마당 옆으로 난 복도엔 흰 개가 사나운 이를 내밀고 짖고 있었다. 복도 안으로 몇 칸의 큰 방이 있었는데 안에 낡은 나무 침대가 빼곡히 들이차 있었고, 일본인 숙소답게 침대와 침대 사이에는 오래된 빛의 커튼이 칸마다 쳐져 있었다. 나무로 된 바닥에서 삐걱 거리는 소리가 났고, 커튼이 쳐져 있는 곳이라 옆사람의 움직임까지 다 들릴 그런 공간이었기에 우선 며칠만 지내며 방을 구해보기로 하였다. 한 달 동안 스페인어를 배우며 살기에는 불편하고 개인 시간을 보낼 수가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대부분의 여행자들은 학원에서 소개해주는 과테말라 가정집에서 셰어 하며 현지인들과 스페인어로 대화하고 가정식 밥을 먹으며 한가족처럼 사는 게 일반적이었지만, 혼자만의 시간을 좋아하고 또 필요로 하는 나는 독립된 나만의 공간을 찾고 싶었다. 


편한 집을 찾는 일은 쉽지 않았다.


그래서 호스텔에서 만난 친구 몇과 함께 주위에 지낼 만한 집이 있나 찾기 시작했는데, 그중 커다란 건물 안에 카페와 상가가 죽 들어서 있고, 위층에는 방이 몇 개 있는 공간을 찾았다. 방 한 칸에 부엌과 욕실은 공동으로 사용해야 했지만 베란다도 있고, 커다란 창문도 있어서 해가 잘 들었다. 건물 주인아주머니도 좋아 보였고, 상가가 있음에도 그리 시끄럽지 않을 것 같아 덜컥 한 달 계약을 해버리고, 하룻밤을 지냈다. 


그. 런. 데... 그곳은 밤엔 완전히 다른 세상이 되는 곳이었다. 카페로 보이던 곳이 밤에는 술집으로 변하여 밤새도록 시끄러운 음악을 크게 틀어 놓았고, 술을 마시는 남자들이 너무 많이 들락날락거렸다. '아, 이 일을 어찌한다지'... 정말 혼자 지내기엔 너무 서글픈 곳이었다. 그래서 다른 곳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했을 즈음에 마침 내가 며칠 지냈던 타카 하우스에서 청소를 해줄 사람을 구한다고 해서, 생각할 것도 없이 바로 내가 하겠다고 했다. 숙식 무료에 스페인어 수업료까지 할인을 해준다고 하니 더할 나위 없는 조건이었다.


한달 동안 생활한 둥근 모양의 나만의 방

그래서 호스텔 청소부가 되었지만!


 내가 앞으로 타카 하우스에서 해야 할 일은 아침에 호스텔을 청소하는 것과 화장실 그리고 마당의 낙엽을 약간 빗자루로 약간 정리해주는 것이었다. 물론 여행자들이 체크아웃을 할 때 침대 시트와 베개 시트 등을 세탁기 안에 넣어 빨래를 돌리기도 하였지만 그리 많은 일은 아니었다. 전에 이 청소일을 했던 일본 아이는 멕시코로 취업을 하기 위해 준비 중이어서 청소에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았다고 했다. 그 아이는 아침에 조금씩만 청소해도 별 문제는 없을 것이니 쉬엄쉬엄 하라며 하루 만에 짐을 싸서 떠나가 버렸다. 


하루에 한번 모두 함께 지어 먹는 저녁 식사


녹색 페인트 칠이 떨어지고 있는 창틀에는 먼지가 가득 쌓여 있었다. 겉으로는 깨끗해 보이는 붉은색의 복도도 사실 물청소를 안 한 지 오래되어 보였다. 게다가 3개의 공동 화장실과 욕실은 어떻게 청소할 것인가. 생각해보니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후 남의 화장실을 청소한 적이 없었던 것 같았다. 매일 요리하느라 바빴던 부엌 청소는 어찌해야 하며 침대가 가득한 3개의 도미토리 청소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하지만 나는 그때 오후 1시부터 하루 4시간의 스페인어 수업만 받고 있었고, 달리 하는 일이 없었으므로 아침에 청소를 하면서 스페인어 단어를 암기하는 시간을 갖기로 했다. 


우선 창틀의 먼지를 털어내고 윤기 나게 닦았다. 그리고 흐릿해져 가는 붉은빛의 복도를 쓸고 반짝반짝하게 닦았다. 복도와 도미토리 방과 부엌을 쓸고 닦으며 스페인어 단어장을 옆에 두고 외우니 오히려 게으름을 피우지 않고 단어를 외웠고 하루 4시간 동안의 수업을 복습할 수 있는 좋은 시간이 되었다. 워낙 청소에 무관심한 주인 타카는 내가 청소를 오랫동안 하고 있으면 부담이 되었던지 '쉬면서 해'를 연발하였다. 하지만 난 점점 윤기가 나고 반짝반짝해지는 실내를 보며 혼자만의 자긍심을 가지게 되었다. 제일 신경을 쓴 부분이 욕실이었는데, 욕실 바닥을 물로 깨끗하게 닦고 물기 없이 말렸다. 물이 가득한 욕실 바닥은 곧장 흙먼지의 신발들로 더러워졌기 때문이다. 


 스페인어를 외우며 청소를 마치고서야 나는 샤워를 하고 점심을 해 먹고 스페인어 수업에 갈 준비를 하였다. 그리고 아리따운 스페인어 선생님과 아주 즐겁게 수업을 하고는 고풍스러운 과테말라 쉘라의 거리를 걸어 호스텔의 한구석에 있는 내방으로 돌아왔다. 마당에 들어서면 호스텔 건물이 있고 바로 앞을 마주하고 내 싱글룸의 건물이 따로 있었다. 작은 철제 침대가 하나 있었고, 커다란 소파와 플라스틱 테이블이 하나 있었다. 그곳에 내 배낭을 놓고, 노트북을 설치하고 작은 방에서 혼자만의 시간을 실컷 즐길 수 있었다. 


더욱 나의 시간에 충실할 수 있었다.


 만일 내가 그저 스페인어만 공부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면 이렇게 공부를 열심히 했을까? 또다시 이 시간을 무료해하며 하루에도 몇십 개가 나오는 단어를 외우는 것을 포기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난 청소를 해야 했고, 그랬기에 공부를 할 시간이 없을 것이라 판단하여 기다란 복도에 대걸레질을 하면서 단어를 하나하나 외웠고 덕분에 선생님이 예뻐하는 학생이 되었다. 그렇게 예습과 복습을 청소시간에 마치고 나니 저녁 이후엔 자유시간을 가질 수 있어서 요가를 하러 가기까지 했으니 말이다. 가끔씩 우리 호스텔로 와서 살사 댄스를 가르쳤던 내 스페인어 선생님은 반짝반짝 윤이 나는 창틀과 복도 그리고 화장실을 보더니 감탄에 또 감탄을 하였고, 그에 힘입어 나는 더욱더 걸레질을 반질반질하게 해야 했다. 스페인어를 힘겹게 외우면서 말이다.


호스텔을 나의 집처럼 머물며 나를 치유했던 시간


 여행을 오래 하다 보면 어느새 자괴감이 밀려올 때가 있다. 더 이상 여행자들이 가득한 관광지에 가서 유적지를 둘러보는 것에도 흥미를 가질 수 없고, 한 곳이라도 더 가보고 싶어서 이동에 이동을 하다 보면 여행을 하러 온 것인지, 그냥 이동을 하러 온 것인지 헷갈릴 때도 있다. 그런 마음이 생길 때에는 그저 발 닫는 곳에 머물며 자신의 에너지를 충전하는 시간을 보내면 좋을 것이다. 그 시간이 나처럼 잠시 청소부가 된다거나 아니면 그저 시간을 보내며 휴식을 보내는 아무것도 안 하는 여행자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렇게 잠시 머문 곳을 내 집처럼 여기며 자신에게 충실한 시간을 보낸 후엔 다시 자신으로 돌아가서 다음 여행지를 내 집처럼 짧게 혹은 길게 머물 수 있을 것이다. 

 난 그랬다.


한달 동안 매일 오갔던 숙소 앞의 골목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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