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에서 여행 인솔자로 지낸다는 것
새벽인데도 잠이 오지 않는 지금 밖에서는 까마귀의 깍깍 소리가 들린다. 아직 동이 트지 않았는데 아침을 알리는 소리라니 너무 한 것 아닌가 하면서도 괜히 혼자가 아니라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이런 것이 낯선 곳에서 여행자가 느낄 수 있는 위로일까.
난 남인도의 끝자락에 위치한 케랄라 주의 코친에 와 있고, 1인 여행 기획자가 되어 올해 새로 만든 케랄라 여행을 점검하기 위해 얼마 전에 인도로 들어왔다. 인도에서 인솔을 한 지 꽤 되었는데도 케랄라 주의 항구 도시인 코친의 이곳저곳이 너무 마음에 들지만 짧은 일정을 만들어야 하기에 마음이 쓰라린다.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고 다 좋아 보이는데 말이다. 앞으로 답사를 가야 할 도시가 몇 군데 더 남았는데 시간이 많음에도 마음이 급하다.
인도 인솔을 처음 시작했을 때는 모두들 필름 카메라를 가지고 다니던 때였다. 준비물 사항에 항상 필름 몇 개를 가지고 오라는 안내문이 있었고, 카메라에 넣을 건전지 또한 준비물 목록에 들어가 있었다. 그때는 대부분의 여행자들은 손바닥보다 조금 크고 두께가 있는 자동카메라를 가지고 다녔고, 정말 사진에 조회가 있는 여행자만 커다랗고 무거운 니콘 카메라를 들고 다녔다. 물론 필름 카메라로 말이다.
2000년대 초반 막 인도 여행에 붐이 일던 그 시절, 여행자들은 인도 가면 고생을 해야지 하는 각오와 마음가짐을 가지고 들어갔다. 오히려 힘든 여행을 하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할 정도였고, 그렇게 힘든 그 여행을 모두 즐겼다. 그때 내가 다니던 배낭여행 전문 여행사에서는 한 달 동안 중북부 인도를 둘러보는 여행코스를 가지고 있었는데, 지금 그렇게 다시 여행을 하라면 하지 못할 정도로 고생스러운 코스였다. 큰 도시의 빈민가를 걸어보기도 했고, 시장에서 물건을 팔기도 했으며 또한 시골 민박집에서 하루를 보내는 체험도 하였다. 도시 간 이동은 빽빽이 사람들로 들이찬 버스나 기차로 하였고, 어딜 가든 걸어서 많은 것을 보는 것은 기본이었다. 여행을 신청한 사람들은 진정 인도라는 나라를 느끼고 싶어 했고 그리고 검소하게 여행을 하고 싶어 했다.
그 배낭 여행사는 나의 첫 직장이었고, 인솔 교육을 받으러 인도 땅을 처음 밟던 날 긴장되기는 나도 마찬가지였다. 그 시절 인도로 들어가는 가장 싼 항공권은 일본의 오사카 공항에서 비행기를 갈아타고 태국의 수도 방콕 공항에 저녁에 도착하여 공항 바닥에 침낭을 깔고 하루 자고, 다음날 5시간의 비행 후에 뭄바이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태국 공항에서 나란히 침낭을 깔고 자고 일어나니 하룻밤만에 몇 년은 늙어 버린 기분이었다. 아프리카에서 한동안 지낸 후에 인도로 들어가는 것이었기에 나는 가진 돈은 바닥이 나 있었고, 가족에게 인도 여행에 빠듯한 돈만 빌려서 들어가는 것이라서 아침에 식사를 하러 가자는 동료들과 헤어져 공항을 몇 바퀴 돌기만 하였다.
드디어 뭄바이에 늦은 밤에 도착했고, 웃고 있는 인도 사람들 덕에 예상보다 뭄바이 공항의 밝은 분위기에 마음이 열렸다. 날씨는 조금 끈적한 느낌이 들었지만 시내로 들어가는 낡은 택시 안으로 부는 바람이 시원했다.
흔히들 인도는 배낭여행의 교과서 같은 곳이라고 한다. 그만큼 여행하기가 수월하지 않고 매번 힘든 상황에 부딪치지만 그에 비례하여 여행에 관해 배울 수 있는 점이 많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건 인솔자로서도 마찬가지였다. 인도에서 여행을 시작하면 어디를 여행가도 두려움이 없을 것이라는 속설처럼, 인솔을 인도에서 시작하면 그만큼 배우는 점이 많다.
우리는 여행자들을 따라다니며 선배 인솔자의 인솔을 직접 보고 배웠고, 각 도시의 세밀한 지도까지 그려가며 열심히 여행 공부를 하였다. 하루의 고단한 일정을 끝내고는 매일 저녁에 작은 방에 모여 그 날의 인솔에 대해 다시 복습하고, 각각 한 명씩 돌아가며 직접 지도를 그려 하루의 인솔 과정을 설명하는 테스트까지 보았다.
그렇게 치열하고도 자세하게 배운 인솔은 나중에 내가 일을 시작할 때 아주 큰 도움이 되었다.
인도에서 인솔을 하며 얻은 가장 큰 즐거움은 뭐니 뭐니 해도 많은 인도인들과의 교류였다. 그냥 스쳐 지나가는 여행자가 아닌 같은 곳을 반복해서 들어가기 때문에 마을마다 아는 사람들이 늘어갔고, 어려울 때마다 도움도 많이 받았다. 특히 싸구려 구슬을 이어 만든 목걸이를 주렁주렁 팔에 걸고 졸졸 따라다니는 동네 소년들은 내가 유적지의 산길을 헤맬 때마다 곁에 있어 주었고, 달랑 10루피 (170원)의 귀걸이나 목걸이를 고르는 나를 마다하지 않고 만날 때마다 함께 해 주었다. 한번 얼굴을 보면 절대 잊지 않는 인도인들의 습성 때문에 첫 번째 인솔 때 다시 들어가니 마치 평생 알고 지낸 친구인 것처럼 환대를 받았다. 첫 인솔은 여태껏 내가 해 온 일 중에서 가장 어려운 순간 중 하나였는데, 그렇게 인솔 공부를 열심히 하고 들어갔지만 모든 것에 서툴 수밖에 없었다.
몇 년을 반복적으로 같은 곳을 다니며 일을 하다가 긴 여행이 떠나고 싶어 졌다. 인도의 많은 지역에서 친구들과 만든 추억이 아쉽기는 했지만, 또 다른 곳으로 가봐야 한다는 절실함이 생기기 시작했다. 책방의 여행 코너에 쌓여있는 찬란한 여행책자들, 그리고 인도에서 만난 여행자들의 모험기를 듣다 보니 나만 한 곳에서 고여 있는 것 같은 침울함이 나에게 번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나는 회사를 그만두고는 인도로 들어가 그토록 머물고 싶었던 갠지스강이 흐르는 고대의 도시 바라나시에서 동네 사람이 되기도 했고 그동안 하지 못했던 요가를 하러 북쪽의 도시 리시케시에서도 한동안 머물게 되었다. 한동안 인도에서 몸과 마음을 다진 후 중동을 거쳐 중남미 지역에 머물며 조금 익숙해진 후에 중남미 인솔자로 활동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랬으나 나의 정신적인 버팀목이었던 인도에서의 긴 시간들을 잊을 수가 없었다. 중남미에서 일을 하면서 곳곳에 퍼져 있는 인도 식당에서 그리운 인도 채식을 먹기도 했으며, 몇 도시의 요가센터에서 요가를 하며 인도에서의 기억을 떠올리기도 했다. 어쩌다가 인도 이야기가 나오면 여행자들과 인도에서의 추억을 꺼내며 신나게 이야기를 하며 인도를 그리워하기도 했다.
중남미는 내게 차갑고 써늘한 공기를 품게 해주는 지역이었다. 건조한 사막 같은 지대에 햇빛은 강렬했고, 사람들은 친절하고 순박했지만, 치안이 염려되는 지역도 많아 중 낭미에서 지내며 '푹 쉬는' 평화로운 시간은 가질 수가 없었다.
이 시기에 내가 가장 많이 듣던 말은 '어디든 한 곳에 정착 좀 해'였다. 한국이 아니라면 좋아하는 곳에서 일을 하며 지내라는 뜻이었다. 그 말을 들으면서 바로 머리 속으로 들어온 물음은 난 '왜 그런 생각을 못했을까, 왜 그런 생각을 한번 조차 해본 적이 없을까'였다. 그동안 목적 없는 삶을 추구하며 살아가고 있었지만 다르게 보면 정처 없이 헤매고 있었다는 것이 맞는 말인지도 몰랐다.
'내가 좋은 하는 곳은 어디인가, 내가 하고 싶은 일은 무엇일까. 그동안 무엇을 하며 지내기를 원했던가'를 머리 속으로 그려 보았다. 침대에 누워서 잠들기 전에도 생각을 했고, 집 주변을 산책하면서도 생각을 해보았다.
그렇게 홀로 생각의 시간을 가진 후에 난 다시 인도로 들어가 인도를 일터로 삼으며 생활해 보기로 했다. 그리고 인도에서 인솔자로 지내며 커피와 빵을 만들며, 한국을 오가며 지내고 있다. 그 발걸음이 평소의 나처럼 느리더라도 계속해 나가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