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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맹그로브 Mangrove May 24. 2023

내가 이름을 두고 온 바다

[Mangrove Goseong] 크리에이터 양다솔 에세이

Mangrove Goseong with Creators

리모트 워커의 라이프스타일을 위한 워크앤스테이, 맹그로브 고성과
6인의 크리에이터가 자기다움을 발견하는 유쾌한 여정을 함께 했습니다.

반짝이는 바다와 푸른 자연을 품은 평화로운 마을, 강원도 고성.
탁 트인 공기와, 경이로운 자연의 순간들이 매 순간 반기는 맹그로브에서
6인의 크리에이터가 만난 ‘깊은 몰입, 넓은 영감’의 순간들을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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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AY 양다솔 @kakmsic
글쓰기 소상공인. 에세이 「가난해지지 않는 마음」
유료 뉴스레터 「격일간 다솔」 발행인입니다.
이름 없는 바다의 첫번째 손님이 되어, 바다와 동료가 되고
깊은 몰입을 경험하는 순간에 대해 담았습니다.


PHOTOGRAPHY 손미현 @ref.me
서울을 기반으로 공간, 사물, 일상의 순간을 담는 사진가입니다.
맹그로브 고성에서 머무는 동안 산책하며 마주한 아름다운 순간을 담았습니다. 


 내가 이름을 두고 온 바다

©Son Mihyun

고성에 갈 짐을 꾸려보니 여섯 덩이가 되었다. 고르고 고른 책 열 권, 잠옷과 활동복, 세면도구와 화장품, 식재료와 일용할 쌀, 노트북과 키보드, 차와 다도 세트까지. 집안은 이삿날을 방불케 했다. 꽃샘추위가 기승인데 나는 땀이 흘렀다. 고양이 두 마리가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들이 눈빛으로 말한다. “쟤 저거 또 어디 가네.” 그들을 여러 차례 쓰다듬고 폭 안았다가 할 일을 계속한다. 짐을 다 싣고 나니 4인승 차에 내가 탈 자리만 겨우 남았다. 고양이 빼고 다 가져가는 수준이었다. 고양이도 가져갈 수 있었다면 당연히 챙겼을 것이다. 뭐라도 뺄까 고민했지만 무엇도 뺄 수 없었다. 마치 어딘가에 나를 백업하러 가는 것 같았다. 인류가 살 새로운 공간을 만들기 위해 우주에 선발대로 떠나는 지구인 같았다. 맹그로브 고성에 도착했을 때 마주친 안내 문구를 보고 웃음이 터졌다. ‘자기다움을 발견하는 유쾌한 여정이 어디서나 이어지도록’ 나는 분명 자기다움을 심하게 이어가고 있었다.

좋아하는 팟캐스트의 밀린 에피소드를 들으며 깔깔 웃기를 몇 번, 어느새 고성에 도착해 있었다. 멋진 방이 나를 맞이했다. 당장 노트북을 올려두고 싶은 널찍한 책상이 가장 먼저 들어왔다. 그 위에는 모던한 아르떼 미데 탁상조명과 앙증맞은 제네바 스피커가 그 위에 올려져 있었다. 얼른 자리에 앉아보았다. 의자가 엉덩이에 착 감겼다. 감성과 분위기와 엉덩이를 이해하는 사람이 고른 물건들이 분명했다. 단박에 그곳이 마음에 들었다. 피로도 잊은 채 신나게 짐을 풀었다. 모든 물건에 제 자리를 찾아주고 나니 그곳은 제법 내 방과 닮아 보였다. 하나 다른 점이 있다면 바다였다. 그곳엔 바다가 있었다. 책상에 앉아서도, 침대에 누워서도 고개를 들기만 하면 발코니 창으로 바다가 보였다. 나는 따듯한 물로 피로를 씻어내고 잘 마른 수건으로 몸을 닦은 뒤 발코니 창을 열었다. 시원한 바람이 밀려들었다. 봄밤의 바다는 사근사근한 냄새가 났다. 나는 그 소리를 맡으며 하얀 침대로 다이빙했다.

삶이 텁텁해지는 순간이 있다. 매일이 월요일처럼 느껴지는 날들. 혼자 살고, 혼자 일하는 사람이라면 더욱 그랬다. 직장인이 회사를 싫어하듯, 스스로에게 싫증을 느끼게 됐다. 내가 상사이고 부하이며 동료이니 그럴 수밖에. 그때 ‘고성’이라는 두 글자에 시선이 멈췄다. 그것이 ‘환기’처럼 읽혔다. 희미하게 미래를 예감했다. ‘나는 고성에 갈 거야.’ 상사와 부하와 동료가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 모두 데리고 훌쩍 떠나왔다. 때로는 전혀 내가 아닌 곳에 나를 놓아두어야 한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Son Mihyun

방안으로 쏟아지는 아침햇살에 실눈을 떴다. 바다 위로 빼꼼 얼굴을 내민 빨간 해가 보였다. 넓게 펼쳐진 하늘에 구름이 천천히 오가는 것이 보였다. 나는 그것을 한참 동안 물끄러미 바라보며 일어나는 것을 미뤘다. 먼 곳을 오래 응시하는 일이 얼마나 오랜만인가 생각했다. 스르르 일어나 물을 올리고 집에서 가져온 다기들을 꺼내 작은 다도 상을 차렸다. 아끼는 차들을 우려 마시며 파도가 만들어 내는 거품을 바라보았다. 감자와 양파와 애호박을 송송 썰고 된장을 풀어 보글보글 찌개를 끓였다. 발코니에 놓인 미니 테이블에 소담한 아침상을 차렸다. 수평선까지 막힘없이 펼쳐진 작은 해변을 구석구석 살펴보며 밥 한술을 떴다. 바다를 향해 손을 내밀 듯 옹기종기 모인 노란 바위들을 눈으로 쓰다듬으며 국 한술을 떴다.

밥을 먹고 나면 바닷가를 거닐었다. 모래 사이에 숨은 예쁜 조개들을 주웠다. 그리고 맹그로브의 매니저와 마주쳤다. 우리는 이웃처럼 인사했다. 그는 내가 도움이 필요할 때마다 나타나 문제를 해결해 주었다. 나는 물었다. “제가 몇 번째 손님인가요?” 그가 수줍게 웃었다. “첫 번째 손님이세요.” 나는 또 물었다. “이 바다는 뭐라고 부르나요?” 두 번째 질문에 대한 답은 더욱 놀랐다. “이 바다엔 이름이 없어요.” 수영을 하기엔 너무 깊어서 이름이 붙지 않았다고, 이름이 없어서 사람들이 찾지 못하는 곳이라고 그는 말했다. 그러고 보니 우리는 이름이 없는 곳에 찾아갈 수 없었다. 그런 곳은 ‘마주치는’ 방법밖엔 없었다. 나는 이름 없는 바다의 첫 번째 손님이 되었다.

그곳은 해와 달의 움직임이 보였다. 해는 바다 위로 떠올라 나를 따라 기지개 켜듯이 포물선을 그렸다. 방의 천장을 따라 미끄러지다가 내가 한창 집중하고 있을 때 등 뒤로 넘실대는 산등성이로 사라졌다. 그리고 이내 달이 떠올랐다. 나는 그 움직임들을 느끼며 여태껏 몰랐던 이야기를 읽고 쓰이지 않았던 이야기를 썼다. 그러다 이따금 고개를 들어 바다를 보았다. 매번 작게 감탄했다. 바다는 늘 다른 얼굴을 하고 있었다. 늘 무언가에 집중하고 있었다. 스르르 빠지듯 나도 무언가에 몰두해 있었다. 바다와 나는 동료가 되어 있었다. 바다가 그곳에 있다는 것은 간단하고 명료한 사실이었고, 무척 완전한 일이었다.

©Son Mihyun

나는 1층 워크라운지에 있는 리클라이너 의자에 앉아 책을 읽는 것을 좋아했다. 그러면 이따금 바다를 걷는 커다란 골든 리트리버가 보였다. 황금색 개가 윤이 나는 털을 찰랑이며 바다를 거닐고 있었다. 목줄도 없고 주인도 없는 채였다. 순간 나가서 주인을 찾아주어야 하나 망설였지만, 그러지 않았다. 그 개가 방황하고 있다기보다는 사색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는 익숙하고 차분한 걸음걸이로 모래사장을 누볐다. 모래의 냄새를 맡고 조개를 만지작거렸다. 곧이어 멀찍이서 따라오는 한 남자가 시야에 들어왔다. 그들은 마치 혼자 있는 것 처럼 멀찍이 떨어져 걸었다. 아주 오랫동안 그래왔던 것처럼 보였다. 그들은 바다에 가까이 갔다 멀어졌다 했다가 한참 뒤에 같은 방향으로 함께 사라졌다.

파도 소리에 포개진 라흐마니노프를 잊지 못할 것 같다. 라흐마니노프는 위엄있고 잔잔한 밤 바다의 짙푸른 색과 몹시 어울렸다. 밤이 된 바다의 모래사장 곁에서 누군가 홀로 밤낚시를 했다. 몇몇 사람들이 불꽃놀이를 하기도 했다. 소리가 들리면 나는 서둘러 발코니로 나가서 터지는 불꽃을 구경했다. 그러다 언제든 나가서 밤바다를 거닐었다. 모래사장에 찍힌 귀여운 새 발자국이 옆에 나란히 발자국을 냈다. 밀려들고 사라지는 파도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고개를 올려 하늘을 보았다. 그러다 모래사장에 발랑 드러누워서 한참 동안 별을 올려다보았다.

©Son Mihyun

맹그로브 고성의 워크라운지 한켠에는 명상만을 위한 공간이 있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딱 한 사람이 앉을 수 있는 공간과 바다를 향해 시원하게 트인 통창. 그것이 전부였다. 그곳에 앉자 눈높이에 쓰인 노자의 문장이 눈에 들어온다. “끝없는 비움은 무한한 가능성으로 가득 차 있다.” 그 순간 내가 이곳에 있는 내내 명상을 하고 있었음을 알았다. 이곳에서 명상을 떠올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모든 것이 조금씩 명상에 들어 있었다. 이곳은 이름이 없는 바다였고, 깊은 바다였고, 사색의 바다였다.

파도가 오고 가는 소리를 듣다가 며칠이 갔다. 시간은 정지된 것처럼, 영원으로 늘어난 것처럼 흘렀다. 많은 생각들이 밀려왔고 쓸려갔다. 많은 것들을 가져갔고, 많은 것들을 두고 왔다. 맹그로브 고성을 떠나온 나는 훌쩍 가벼워져 있었다. 하루는 더 이상 반복이 아니었다. 이름 없는 바다로 밀려드는 파도가 반복이 아니듯이. 나는 바다를 다시 한번 돌아보았다. 그곳에 다녀온 나에게 새로운 이름을 주고 싶었다. 


글 | 양다솔

사진 | 손미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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