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년필

by 이소망

어린 시절의 기억이 있습니다. 몇 살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집에 있던 만년필을 만지다가 잉크가 터져 손과 옷, 책상이 난장판이 되었던 순간입니다. 어쩜 그리 잉크가 새는지, 말 그대로 '터졌다'는 표현으로밖에 설명할 수 없는 참혹한 현장이었습니다.


40대가 넘어 다시 만난 만년필. 2년 전 샤먼을 여행하다 기념품으로 샤먼대학 만년필을 선물 받았습니다. 잉크를 구매하고, 넣는 방법을 검색한 후 만년필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사실 요즘은 글을 쓸 기회도 없습니다. 키보드가 글을 씁니다. 빠르고, 수정도 편하고, 글씨체도 신경 쓸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 다시 제 오른손에는 만년필이 쥐어져 있습니다.


오랜만에 잉크를 넣고 글을 쓰려니 잉크가 굳었는지 잘 나오지 않습니다. 싱크대로 가서 잉크를 씻어내고, 만년필 펜촉을 데우고, 흘린 잉크를 닦습니다. 어린 시절의 기억이 다시금 떠오릅니다. 당시의 난장판만큼은 아니지만 식탁과 손에 잉크가 묻어납니다. 여전히 만년필은 번거롭습니다. 잉크를 보충해야 하고, 자칫하면 잉크가 샙니다. 만년필보다 발전한 펜은 넘쳐납니다.


그럼에도 왜 저는 만년필을 사용하려는 것일까요? 필기감이나 깔끔함의 문제는 아닐 것 같습니다. 만년필을 사용하려는 이유는 사실 알고 있습니다.


멋.


그것 말고는 설명되지 않는 불편함과 번거로움을 가진 물건이 만년필입니다. 오로지 만년필의 강점은 '멋있다'는 것 외에는 설명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 멋이 모든 것을 해결해주는 것 같습니다. 오른손과 왼손에 잉크를 잔뜩 묻히고 키보드를 두드리는 이 순간, 만년필로 글을 쓰고 싶다는 욕구가 솟아오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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