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아한 사람이 좋다. 실키한 피부에 잘 관리된 옷차림, 여유 있는 표정 등은 끌리는 매력을 준다. 그 우아함의 근간에는 자신과 잘 어우러진 삶의 태도, 가치관 규칙들이 자리 잡고 있다고 믿는다.삶을 대하는 태도는 눈빛에서 나온다.
숙제처럼 사는 사람과 본인 인생의 키(Key)를 잡은 사람의 눈빛이 다르다. 말을 하지 않아도 뿜어 나오는 긍정적인 에너지는 그 사람만의 아우라를 만든다. 이는 단순히 지식, 돈, 외모가 보여주는 것 외 그 사람의 또 다른 고유함을 만든다. 모든 사람이 세상에 단 하나뿐인 존재라 하지만 우리는 각자의 고유성을 발견하고 독자성을 만들어간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인생은 끊임없이 나와 타인을 구분하며 스스로에게 ‘내가 나임을’ 증명하는 과정처럼 느껴진다.
사람 사는 것이 거기서 거기라고 하지만 그럼에도 사람들은 자신만의 ‘인생’을 만들고 싶어 한다. 특별한 일은 가뭄의 콩 나듯 있고, 반복되는 일상을 살아내다 보면 매일 바위를 밀어 올리는 벌을 받는 시지프스와 비슷한 처지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 알베르 카뮈는 바위를 들어 올리는 순간에도 행복할 수 있다고 하지만 현실은 녹록치 않다. 인생이라는 고통 속에서도 행복을 발견하고 나의 의미를 찾아야 하는 숙제가 주어진 것이다.
"나는 어떤 삶을, 어떠한 방식으로 살고 있을까?"
나는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원하는 나의 모습에 맞춰 수많은 결심과 원칙을 만들어냈다. 사람은 통제하기 어려운 것을 통제하려고 하는 것을 업으로 사는 듯하게 느껴지는 순간이다. 그렇게 수많은 결심과 규칙 그리고 원칙들이 지나갔다. 일관되게 지켜야 할 원칙이 ‘지나갔다’는 것은 애초에 원칙으로서의 힘이 약했을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순간의 불안감을 지우기 위한 임시방편일지도. 이러한 나의 애씀은 겉으로 볼 땐 일명 ‘갓생’으로 보일 수 있었지만 나의 내면과 몸은 늘 긴장되어 있었으며, 다음에 무엇을 해야 할지에 대한 생각을 멈추지 못했다. 한마디로 반은 좋고 반은 괴로웠다. 좋음과 괴로움이 뒤섞여, 그것이 성장통인지 문제인지 분간하기 어려웠다.
네 다음 일정은요..
바라는 인생을 살기 위해 자신에게 약속했던 규칙들은 상황에 따라 유연하게 변화하고 수정되었기에 마음은 더욱 혼란스러웠다. 지금 사는 것처럼 계속 사는 것이 힘겹게 느껴지자, 나에게 어떠한 약속과 규칙을 요구하지 않아 보기로 결심했다. 자꾸 규칙과 기준을 만들려는 나를 의식적으로 멈춰 세웠다.
멈춰 서니 삶의 방식을 만들어가는 게 아니라 이미 정해놓고 그대로 숙제처럼 사는 나를 발견했다. 숙제처럼 살기 싫어서 했던 일들이 오히려 숙제 같은 삶을 만들었다. 이를 깨닫자 이제부터는 이 두 가지에 익숙해져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르겠는 것에 익숙해지기와 직감를 따르기이다.
그동안 인생에 답이 없다고 하지만 내 인생은 내 나름의 답을 내려야 한다는 의무감을 느꼈다. 자신에게 던진 수많은 질문에 무조건 ‘답’을 달았다. 모르겠는 것도 우선은 쥐어짜서 논리적으로 이해가 되는 답을 했다. 그래야 제대로 내 인생을 사는 것처럼 느껴졌다. 모르겠다는 말에 익숙해지니, 또 다른 나를 발견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자신이 모르는 것에 솔직해지고, 논리적으로 말이 안돼도 내가 편한 감정이 느끼면 그 길을 따라가 보았다. 내 직감을 따르니, 애써머리 굴려 결정했던 것보다 수월하게 일이 풀려갔다. 물론 매번 좋은 결과로 이어지진 않았지만, 비로소 내 나름의 인생의 방정식을 찾아가고 있다고 느꼈다. 이전처럼 몸이 긴장되는 것이 줄고, 사고의 여유를 주니 진정 내게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원칙들만 남겨졌다.
이렇게 살겠다고 하는 삶의 방식을 정하는 것과 정하지 않고 경험과 직감에 따라 방식을 만들어가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