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 억울한 일이 있거나, 화가 나는 일에 대해 내게 말하면 ‘그래, 그럴 수 있지’라고 말하곤 한다. 이 말은 상대방의 일에 대해 시시비비 판단 내리지 않고, 상대방의 니즈를 맞추기에 최적화된 말이다. 상대방은 잘잘못을 판단 내려 줄 판사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현재 자신이 드러내는 감정에 대한 정당성을 확인하고 싶을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그럴 수 있지라는 5글자는 자신에 대한 너그러움과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용기를 준다. 스스로에 대한 높은 기대치와 엄격함을 가지는 사람일수록 이 말의 위력을 잘 알 것이다. 나 역시 날 선 말들로 스스로를 밀어붙였던 경험이 있기에 이 말이 가지는 효과를 안다. 나에게 그럴 수 있다고 말을 하기 시작하면서 표정과 어깨도 풀어졌고, 새벽에 깨지 않는 잠을 자게 되었다.
이처럼 ‘이래야만 해’에서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지’라는 태도의 변화는 또 다른 세계를 열어주었다. 다양한 사람을 만나고, 생각을 들을 수 있는 진짜 어른다운 어른이 되는 과정이라고 느꼈다. 이렇게 성숙한 어른의 세계로 가는 것만 싶었지만, 어느새 상대방의 말에 무성의하게 ‘그래, 그럴 수 있지’라며, 빠르게 화제를 돌리려는 나를 발견했다. 나와 다른 생각들에 대해 이야기를 오래 듣고 싶지도, 반박하고 싶지도 않는 마음이 들었다. 타인에 대한 존중과 더 넓은 세계로 가게 해주었던 그 말이 이제는듣기 싫은 말을 피할 수 있는 사회적 기술이 되었다.
말하는것도 듣는 것도 열심인 망토리
어쩌면 유통성 있게 변한 것이라 생각했다. 모든 사람과 대화가 즐겁기만 한 것은 아니니까. 그럼에도, 습관적으로 그럴 수 있다고 말하는 내가 거슬렸다. 상대방 이야기가 어딘가 모르게 불편함에도 끄덕이고 나서 집에 돌아오는 길엔 왠지 모를 씁쓸함을 느꼈고, 상대방과 나의 의견이 다를 때면 아예 입을 다물어버리고, 상대방 모르게 그 관계에서 멀어졌다. 비겁한 줄 알았지만 이렇게 지내는 것이 마음이 편했고, 편해진 만큼 나의 인간관계는 좁아졌다.
지금의 내 모습이 딱히 싫지도 좋지도 않았지만, 이제는 나의 생각, 행동에 대한 최소한의 원칙의 필요성을 느꼈다. 내게 그럴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과 그럼에도 그럴 수 없다고 말하는 것에 대한 기준이 있다면 자신도 타인과의 대화에서도 피하지 않고 마주 설 수 있을 있을 것 같다는 모종의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 원칙을 만들기 위해서는 일, 관계, 일상 등에서 내가 마음이 편하고, 중요시 하는 것들에 대한 관찰이 필요했다. 일기를 쓰고, 산책하는 방법도 도움이 됐지만 무엇보다 나를 발견하는 데 도움이 된 건 타인과의 대화였다.
결국 다시 돌아온 것은 타인과의 소통이었다. 대화를 통해 나와 타인과의 같음, 다름, 그 어느 것도 아닌 중간 등을 발견하면서 나란 사람의 형태와 윤곽이 다듬어져 갔다. 그저 그럴 수 있지라며 위로도 공감도 아닌 말로 가볍게 대화를 대하는 것에서 그것에 대한 나의 생각과 태도를 돌아볼 수있는 기회로 여기게 되며 대화가 조금씩 재밌어졌다. 나를 공격하려고 말을 하지 않은 거라면 반대 의견과 다른 라이프 스타일에 대한 한 번 더 듣고 질문하면서, 나의 삶을 때론 가볍게, 무겁게 회고해 보곤 한다.
모두가 자신만의 원칙과 규칙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게 흘러가듯이 사는 것이든 그 어떤 것이든.
어쩌면 살아가는 것은 내게 이미 존재하는 원칙, 그리고 앞으로 더 나은 삶을 위한 원칙을 만들어가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