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높은 곳에서 떨어진 아이
2단지 놀이터의 로켓 미끄럼틀 꼭대기는 아파트 2층 정도의 높이였다. 1단지에 사는 아이들이 우르르 2단지로 몰려간 것도 그런 이유였다. 수빈은 무리 중 가장 나이도 어리고 작은 아이였다. 매번 저를 두고 도망가는 수혁을 기어코 따라붙은 수빈이었다. 오빠와는 고작 2살 차이였지만 그 나이 대 아이들에겐 2년은 거의 인생의 3분의 1을 차지하는 것이었다. 수혁과 그 무리들이 외투에 무언가를 감추고 놀이터 근처에 있는 어른들 눈을 피해 헐레벌떡 로켓 미끄럼틀의 좁은 계단을 올라갔다. 좁은 철제 계단을 오르는 아이들의 발걸음은 빨랐다. 수빈은 짧은 다리로 한 칸 한 칸을 간신히 밟으며 뒤처지지 않으려 애썼다. 차가운 쇠 기둥을 쥘 때마다 비릿한 철 냄새가 났다. 조심스레 딛는 계단이 발밑에서 덜컹거릴 때마다 심장이 쿵쿵 뛰었다. 그 소리가 발소리인지, 자기 심장 소리인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무리 중 가장 나이가 많아 보이는 아이가 주머니에서 라이터를 꺼냈다. 찰칵, 불꽃이 튀자 아이들의 얼굴이 일제히 주황빛으로 물들었다.
"야, 바람 막아."
한 녀석이 점퍼 자락을 펼쳐 바람을 막았다. 또 한 녀석은 주워온 마른 나뭇잎을 내밀었다. 잎이 불꽃에 닿자 가장자리부터 오그라들며 빠르게 타 들어갔다. 얇은 연기가 피어올랐다. 아이들은 숨을 죽이고 그 작은 불씨를 들여다보았다. 발 아래로는 놀이터 전체가 내려다 보였고, 바람이 철제 구조물 사이를 지나며 윙윙 소리를 냈다.
라이터를 킨 아이가 킬킬거리고 웃자 다른 아이들이 따라 웃기 시작했다. 수빈은 수혁의 얼굴을 힐끔 쳐다보았다. 오빠는 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은 채 웃는 척을 했다. 수빈은 오빠 외투 끝자락을 꼭 쥔 채 시선을 자신의 발끝으로 떨어뜨렸다. 수빈은 어쩐지 울고 싶어졌다. 아이들이 가져 온 나뭇잎, 종이들로 불이 빠르게 붙기 시작했다.
“좀만 뒤로-”
불장난을 시작한 아이의 말에 수혁이 제일 먼저 반응했다. 수혁은 재빠르게 철제 기둥으로 몸을 붙였다. 수혁이 움직이자 고개만 숙이고 있던 수빈이 반사적으로 ‘네’ 하고 대답하려 했다. 입술이 벌어지고, 혀가 움직이려는 찰나 대답 대신 수빈의 작은 발이 뒤로 한발짝 움직였다. 수빈이 뒷걸음질 친 그 순간, 작은 몸이 허공에 떴다.
“퍽”
잠깐 시간이 멈춘 것 같은 느낌이었다. 비명 소리가 가까이서 들렸지만, 수빈의 목에서 나오는 소리는 아니었다. 함께 놀던 아이들의 목소리가 웅성거리며 들려왔다. 놀이터 주변에 있던 어른들이 수빈에게 달려왔다. 표정을 보니 꽤 큰 소리를 내고 있는 것 같긴 한데, 그 소리조차 물 속에 들리는 것처럼 멀고 흐릿했다.
"애기가! 애기가 떨어졌어!"
누군가의 외침이 찢어지듯 퍼졌다. 수빈은 그 말이 자신을 두고 하는 말이라는 걸 알았지만, 이상하게 실감이 나지 않았다.
아줌마 한 명이 수빈의 얼굴 위로 그림자를 드리웠다. 아까 벤치에서 자신보다 조금 작은 아이와 모래놀이를 하던 아줌마였던 것 같다. 입이 크게 벌어져 뭐라고 소리치고 있었지만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수빈은 양팔을 벌린채 눈을 뜨고 누워있었다. 마치 잔디 밭에서 구름이 지나가는 모습을 구경하는 듯했다.동시에 철제 계단을 내리 찍는 발소리와 미끄럼틀 전체가 울리는 소리가 났다. 쾅- 쾅- 누군가 떨어지다시피 내려오는 소리였다.
수혁의 얼굴이 하늘과 아줌마 사이로 불쑥 나타났다.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입술이 벌어져 있었지만 아무 말도 나오지 않는 것 같았다. 수빈은 오빠-라고 소리 내 부르려 했다. 하지만 등 전체가 돌덩이에 짓눌린 것처럼 무거웠다. 공기가 코 끝까지 왔다가 더 이상 들어오지 않았다. 입을 벌려도 소리는 수빈의 목 아래 어딘가 머물 뿐이었다. 물 밖으로 나온 물고기처럼 입만 뻐끔거렸다.
“집에 가자”
수혁이 수빈의 등 뒤로 손을 넣으며 끌어 올렸다. 상체가 일으켜지는 순간, 막혀 있던 무언가가 뚫리는 느낌이 들었다. 컥, 하는 소리와 함께 공기가 쏟아져 들어왔다. 수빈은 몸이 크게 흔들릴 만큼 숨을 들이켰다. 그리고 다시 터지는 숨과 함께 울음이 함께 터졌다. 수빈이 흐엉, 하고 울음을 터뜨리자, 수혁의 목구멍에도 무언가 크고 뜨거운 멍울이 치밀어 오르는 것 같았다. 괜찮아- 괜찮아- 수빈에게 말하는 대신 수혁은 턱에 힘을 주고 입을 꾹 닫았다. 울다가 숨을 쉬고, 숨을 쉬다가 다시 우는 것을 반복하는 수빈에게 수혁은 등을 보이며 쪼그려 앉았다. 헐떡거리며 우는 와중에도 수빈은 수혁의 목덜미를 향해 손을 뻗었다. 고작 두살 차이면서도 수빈은 늘 수혁에게 업어달라 보채는 동생이었다. 10번 보채면 한 두번은 마지못해 들어주던 수혁이었다.
“얘야 잠깐, 움직이면 안돼. 119부를게.”
“애가 다쳤는데 업으면 어떡해”
주변에 몰려든 어른들의 만류에도 수혁은 수빈을 업고 일어났다. 수빈이 수혁의 등에 매달렸다. 축축한 수빈의 얼굴이 수혁의 목덜미에 닿았다. 훌쩍이는 숨이 등뒤로 고스란히 전해졌다.
“잠깐, 전화번호 알아? 아줌마가 아빠한테 전화해서 병원에 가야 한다고 말해줄게”
순간 수혁의 발이 멈췄다. 축 쳐진 채 매달린 수빈이 유독 무겁게 느껴진 탓인지 숨이 가쁘게 쉬어졌다. 수혁은 자신에게 말을 걸며 다가오는 아줌마의 눈을 피했다.
“여기서 기다려. 아빠한테 연락해줄게”
아줌마가 다시 말했다.
“괜찮아요, 저희 엄마 의사예요.”
“집 가면 돼요. 맨날 이래요”
“이 정도는 괜찮아요. 엄마한테 보여주면 돼요”
수혁의 입에서 말이 쏟아졌다.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자신도 몰랐다. 엄마가 의사인 것은 더욱 아니었다. 아줌마가 뭐라고 더 말했지만 이미 수혁은 듣고 있지 않았다.
그 사이를 비집고 걸음을 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