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이터(2)

2화 별 일 없을거야

by 심익명

2단지에서 1단지까지는 어른의 걸음으로도 한참이었다. 아파트 동을 몇 개나 지나고도, 큰 길을 건너고, 또 아파트 동 사이를 지나야 했다.

수혁은 느릿느릿 걸었다. 한 발, 한 발, 수빈의 무게가 어깨를 짓눌렀다. 잠깐 수빈을 내려놓고 함께 몇 걸음 걷다가도, 휘청거리며 걷는 수빈의 모습에 수혁은 지레 겁이나 다시 등에 업었다. 수빈의 울음도 잦아들었다. 훌쩍임도 뜸해졌다. 목덜미에 닿은 얼굴이 축 늘어졌다. 잠든건지, 지친건지-

익숙한 1단지 상가가 보이고, 익숙한 놀이터가 보였다. 현관 앞에 도착했을 때 수혁은 그제야 숨을 크게 내쉬었다. 두 손은 수빈의 엉덩이 아래 깍지를 낀 채였다. 풀었다 간 놓칠 것 같았다. 수혁은 문 앞에 서서 발로 현관문을 찼다.


쿵, 쿵, 쿵.


현관문이 열렸다.

수혁의 얼굴은 이미 엉망이었다. 콧물과 땀이 뒤섞여 얼굴 전체가 번들거렸고, 눈은 충혈되어 벌겋게 부어 있었다. 등에 업힌 수빈은 고개를 살짝 들어 보이긴 했으나 다시 수혁의 작은 어깨에 고개를 떨궜다.

천천히 현관문을 열던 진숙의 얼굴에서 순식간에 핏기가 빠졌다.


“뭐야, 이게 뭐야. 혁아! “


다급하게 수혁의 등에서 수빈을 받아 내리며 온몸을 훑었다. 어디 다쳤어. 왜 이래 무슨 일이야. 질문이 쏟아졌다.

로켓 미끄럼틀에서, 떨어졌어요 수빈이가- 수혁은 설명하려 입을 열었다. 하지만 겨우 뗀 입술에서 나온 건 말이 아니었다.


“으-어 엄-마아- 흐엉엉”


목구멍 깊은 곳에서 부터 울음이 터져 나왔다. 놀이터에서 수빈을 업고 걷는 내내, 참았던 것들이 한꺼번에 쏟아졌다. 수빈을 떨어진 것도 모두 자신 때문에 그렇게 된 것 같아 무서웠다. 또 나중에 혼날까봐 서러웠다. 점점 늘어지는 수빈이 무거워서 서러웠다. 수혁은 그 자리에 주저 앉아 엉엉 울었다.


수빈은 겉으로 보기엔 멀쩡했다. 피도, 멍도, 긁힌 자국도 없었다. 어디 다친 것 같진 않았다. 다만 앉혀 놓으면 금세 옆으로 비뚜름하게 누우려했다. 몇 번을 일으켜 세워도 마찬가지였다. 병든 닭처럼 스르르 기울어졌다. 수빈이 좋아하는 노른자에 밥을 으깨 주어도 수빈은 도리질만 해댔다.


진숙은 어쩔 수 없이 밥 먹이기를 포기하고, 푹신한 이불을 피고 모로 누운 수빈을 조심스럽게 들어 올렸다. 순간 수빈의 몸이 움찔거렸다. 진숙이 손을 멈췄다. 더 천천히 내려놓았다. 수빈의 등이 이불에 닿는 순간 또 한 번 작은 몸이 떨렸다. 작은 신음도 함께 새어 나왔다. 이불을 덮어주려고 수빈의 어깨에 손을 대자 또 움찔, 이불 끝을 천천히 끌어올릴 때도 수빈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진숙은 대체 수빈이 어디가 아픈 건지 알 수 가 없었다. 어디를 건드려도 수빈의 얼굴이 찡그려졌다.


진숙은 서랍에서 진통제를 꺼냈다. 어른이 먹는 약이었다. 작게, 아주 작게 쪼개서 수빈의 입에 넣어주었다. 물을 따라 먹이자 수빈이 간신히 삼켰다. 얼마 지나지 않아 수빈의 눈꺼풀이 고요히 내려앉았다. 약이 통한 건지, 아니면 그냥 지쳐서인지.


진숙은 수빈을 방에 눕히고 수혁에게로 돌아왔다. 아이는 여전히 현관 근처에 쪼그려 앉아 있었다. 진숙이 다가가 수혁 앞에 앉았다. 천천히 팔을 뻗어 수혁을 끌어 품에 안았다. 수혁이 처음엔 몸을 뻣뻣이 굳혔다가, 이내 힘이 풀리며 기대어왔다.


"무슨 일이 있었어. 괜찮아. 천천히 말해봐."


수혁이 입을 열었다. 끊기고, 막히고, 다시 이어졌다. 로켓 미끄럼틀. 형들. 불장난. 수빈이가 떨어졌어요. 말하는 내내 수혁의 숨이 가빠졌다. 몇 번이고 헐떡거렸고, 그때마다 눈물이 새어 나왔다. 다 말하고도 한참을 훌쩍거렸다.


진숙은 울다 지쳐 잠이 든 수혁을 내려다 보았다. 살짝 주먹을 쥔 채 구부러져 있는 작고 통통한 손이 귀여웠다. 또래보다도 훨씬 작은 수빈의 옆에 있을 땐 수혁이 다 큰 것 같고 듬직해 보였는데, 이렇게 보니 영락없는 아직 아이였다. 아직 한 품에 들어오는 이 꼬맹이가, 동생을 업고 그 긴 길을 걸어왔다. 2단지에서 1단지까지. 어른 걸음으로도 한참인 그 길을. 땀과 눈물로 엉망이 된 수혁의 얼굴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말해주었다. 가슴 한쪽이 아려왔다. 아직 이렇게 작은 애가. 얼마나 무겁고 무서웠을까.

그러면서도 한편으로 안도하는 자신이 있었다. 이 사달이 나는 동안 남편이 회사에 있어 다행이라는 생각. 그 생각이 떠오르자 진숙은 제 자신이 싫어졌다. 하지만 남편이 이 사단을 알았다면... 그 생각만으로도 식은땀이 나는 것 같았다.


수혁의 이야기를 다 듣고 난 후, 진숙은 수빈을 데리고 병원에 가야 할지도 모른다 생각했다. 하지만 이미 창밖의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고 있었다.


‘별 일 없을 거야…’


진숙은 병원에 가는 대신 수빈을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돌보기로 했다. 자고 있는 수빈을 지켜보며 조심스레 쓰다듬을 때마다 수빈이 움찔거렸다. 수빈은 미간이 잠시 찌푸려졌다가 금세 고른 숨소리를 내며 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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