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맨하탄K Apr 25. 2016

정우성보다 네가 더 좋은 이유는,
<미드나잇 인 파리>

  7~8년 즈음 전, 처음으로 터치폰이 나왔던 당시에 광고계를 뒤흔들었던 카피가 있다. “전지현보다 내 여자 친구가 더 좋은 이유는, 만질 수 있으니까!”. 맞는 말이다. 정우성도 좋지만 내 남친이 더 좋은 이유는, 만질 수 있어서다. 그런데, 그런 정우성을 내가 직접 보고,만질 수 있다면? 

1) “남자는 노스텔지어 샵에서 일 해.”

  남자 주인공 “길”은 약혼녀인 “이네즈”와 파리로 놀러왔다. 관광명소 투어부터 시작해, 저녁에는 파티를 전전하는 약혼녀 이네즈와는 달리, 평소부터 파리를 동경하던 낭만-몽상가였던 길. 하루는 이네즈와 떨어져 홀로 파리를 산책하게 된다. 발 닿는 데로 가던 그는 결국 길을 잃게 되고, 어느 시계 탑 아래에 주저앉는다. 그 때, 자정을 알리는 소리가 들리고, 그의 앞으로 푸조 자동차가 와 선다.

  그런 사람들이 있다, 늘 과거 속에서 향수를 느끼고, 과거로 돌아가고자 하는. 길 역시 그런 이들 중의 한 명이었다. 푸조 자동차를 타고 도착한 그 곳은 그가 그토록 동경하던 시대였다. 그에게 있어 골든에이지-,즉, 황금시대는 1920년대의 파리이다. 그 곳에는 스콧 피츠제럴드가 있고, 헤밍웨이가 있으며, 콜 포터가 있고, 피카소가 있었다. 처음에는 어안이 벙벙하여 두리번거리던 길은 이내 그 곳이 진짜 1920년대임을 깨닫고 빠르게-생각보다 더욱더 빠르게- 적응한다. 

  사실 길은 현재-그러니까, 21세기의 파리-에 있을 때 주위와 전혀 어울리지 못했다. 약혼녀 이네즈와 그녀의 가족들은 그를 무시하는 것이 일상이었다. 길 역시도-그의 소설 주인공이 ‘노스탤지어 샵’에서 일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듯-현실에는 뚜렷한 의지 없이 과거에의 낭만을 동경하며 지낸다. 그렇게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던 21세기의 길은 20세기로 돌아간 순간부터, 전혀 위화감 없이 주위와 섞이게 된다.


2) 내 세포 하나하나가 너를 향해!

  우디 앨런만의 부드러운 색채가 돋보이는, 더군다나 파리를 배경으로 한 유명 작품들을 모티브로 삼은 미장센까지! 보기만 해도 낭만적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눈이 즐거워지는 영화다. 하지만 나는 이 영화가 그 어떤 영화보다 촉각적인 영화라고 하고 싶다. 

  <미드나잇 인 파리>에서 느낄 수 있는 촉각은 보다 더 근원적인,원초적인 것으로 지각된다. 스피노자나 라이프니츠에 따르면 <미세지각>이라고 말해지는 것인데, 쉽게 말해서 정신적, 심리적 촉각이라 할 수 있겠다. 미세지각은 결국 사람의 내면에 있는 가장 작은 지각 매체이다. 그 미세지각을 통해 우리는 우리 주위에 사물이 있음을 알고, 곁에 누군가가 있음을 안다. 문학작품에서 보면 “내 세포 하나하나가 그를 향했다.” 라는 구절이 가끔 보이지 않나. 그 세포 하나하나가 결국 미세지각인 것이다. “교감”이라는 것은 정신적,심리적 접촉의 문제이고, 결국 그것을 가능케 하는 것이 미세지각인 것이다. 

- 그래, 그게 어쨌다고?

  21세기의 그 어떤 것도 길에게 감흥을 주지 못하고 있었다. 그의 깊은 내면은 언제나 20세기 초의 파리를 그리워하고 있었다. 그의 미세지각이 21세기에 반응하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그의 주위 사람들 역시 그와 교감할 수 없었고, 그 역시 어떤 것도 받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렇게 방황하던 이유였던 미세지각은 20세기로 돌아가는 그 순간, 빛을 발하게 된다.

  자신의 작품을 그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않던 길은 자진해서 헤밍웨이에게 읽어 달라 부탁을 한다. 이네즈가 그녀의 지인에게 보여주라는 것을 극구 마다하던 길이 말이다! 이것은 그가 결국 21세기가 아닌, 20세기의 그들과 교감하기로 한 것을 보여준다. 게다가 외간남자에게 약혼녀를 맡기고 산책을 떠나던 길은 황금시대에 와서는 스스로 춤도 추러 다니고, 파티를 즐긴다. 21세기의 파리에서 맘 붙일 곳을 찾지 못하고 배회하던 길은 과거로 와서야 마음의 안식처를 찾았다. 그가 그렇게 그 시대를 받아들였듯, 주위의 피츠제럴드 부부, 헤밍웨이, 거투르트 스테인 부인까지 길을 인정하고, 받아들인다. 

  불구였던 길의 미세지각은 20세기의 파리와 접촉하면서, 길과 주위 모두가 서로를 온전히 인식하는 순간이 온 것이다.

3) “현재란 그런 거예요. 늘 불만스럽죠.”

  길은 그 황금시대의 파리에서 한 여인을 만나게 된다. 그녀의 이름, 아드리아나. 그녀는 당대 예술가들의 뮤즈다. 길도 어김없이 그녀에게 빠져든다. 예술가의 입장에서 본다면, 파리를 사랑하고, 예술을 사랑하는 그녀는 너무나도 매혹적이었다. 길은 이네즈의 귀고리를 훔쳐 선물하려 할 만큼 그녀에게 빠진다. 짧은 키스를 나누고, 그 시대의 파리에 대해서 이야기 하던 중, 길은 그녀가 다른 곳을 동경하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런 그녀에게 ‘그 때’의 파리는 그저 현재일 뿐이다. 21세기의 길에게 20세기의 파리가 황금시대였듯, 20세기의 그녀에게 있어서 황금시대는 'Belle Epoque'-아름다운 시대-로 일컬어지는 19세기 후반의 파리였다. 

  그렇게 과거를 열망하고 있던 것은 길만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 소망에 반응한 것인지, 그가 그 곳에 온 것처럼, 그들은 차를 타고 아드리아나의 황금시대인 19세기로 가게 된다. 고갱과 드가가 있는 시대. 하지만 웃기게도 그들은 ‘르네상스’를 그리워하며, 현재에 대해 불평하고 있었다.

  길보다 더한 낭만주의자였던 아드리아나는 그 곳에 함께 남기를 원했다. 그리고 길은 거절한다.


  여기 머물면 여기가 현재가 돼요. 그럼 또 다른 시대를 동경하겠죠. 상상 속의 황금시대. 현재란 그런 거예요. 늘 불만스럽 죠. 삶이 원래 그러니까.


  그제서야 길이 깨달은 것이다.


4) “젖는 건 상관없어요.”

  길은 아무래도 그의 이야기를 글로 쓴 듯하다. 그의 소설에 대한 헤밍웨이의 의견을 전해들은 길은 21세기로 돌아와 그를 권태스럽게 옭아맸던 것들과 작별을 고한다. 그리고 다리 위에서 밤의 파리를 만끽하던 중, 노점에서 보았던 가브리엘을 만난다. 

  여기서부터 시작되는 영화의 엔딩은 이 영화가 그 어떤 지각보다 “촉각적”이며 “접촉”의 영화임을 보여준다. 

  비가 내린다. 사실 비가 내리는 파리와 그 비를 맞는 것이 좋다고 길은 영화 도입부터 계속해서 이야기했다. 내리는 비를 맞는다는 것은 온 몸으로 비를 느끼게 되는 것이고, 나아가 그것을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길이 부유하던 그 때, 비가 내리면 사람들은 어김없이 우산을 썼고, 길만이 그 비를 맞았다. 결국 모두가 파리에 있었지만, 정말로 파리와 교감하는 것은 길 하나 뿐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순간에 내리는 비는 누구도 피하지 않고 오롯이 맞고 있다. 가브리엘과 길, 둘 모두 다. 

  이렇게 길이 미국이 아닌 파리, 과거가 아닌 현재에 남기로 한 것을 우디 앨런은 오롯이 비를 맞는 장면을 통해 또 한번 우리에게 상기시킨다. 게다가 길의 옆에는 “사실 파리는 비올 때 가장 아름답죠.”라고 말하며 “함께” 비를 맞는 아리따운 여인까지!

  길이 현재에 충실해지기로 한 그 순간에, “지금-파리”가 그와 접촉하기 시작한 것이다.


5) 그렇게 남겨두기

  아마 우디 앨런 역시 유럽을 여행하면서, 길처럼 과거에 대한 동경이 일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가 내린 결론이 바로 이 영화의 엔딩일테다. 

  영화가 끝나고 난 후에는 영화 <써니>에서 시작된 복고와 응답하라 시리즈가 인기를 끌고 있는 지금의 우리나라가 떠올랐다. 1998년만 생각해 보더라도 IMF로 대부분의 가정이 파탄이 나던 시절 아니었던가. 그런데 지금에 와서는 그 때의 모든 것들이 낭만이 되었다.이러한 현재에 <미드나잇 인 파리>를 통해 우리는 정말로 낭만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생각할 수 있게 된다.

  현재는 늘 불만스럽고, 과거는 과거라서 아름답다는 것. 그리고 과거가 낭만이 된 지금을 살아가는 것이 순리라는 것. 그리고 나아가 우리는 그 곳을 동경하고, 그리워하는 그 “현재” 자체가 “낭만”이라는 것을 말이다.

  게다가 우디 앨런은 스콧 피츠제럴드부터 드가까지 이름만 들어도 머리 속이 하얘해지는 이들을 길의 ‘친구’로 등장시켜 우리에게까지 친근하게 다가오게 한다. 우디 앨런이 아니면 누가 초현실주의의 대표자인 달리를, 단지 “코뿔소가 보여..!”라는 대사 하나로 각인시킬 수 있겠는가! <미드나잇 인 파리>는 지식에 대한 사치에 빠져있는 우리와 유명인사와 가까워지고자 하는 우리의 욕망까지 만족시켜주고 있다 볼 수 있다. 결국 이것도 접촉의 문제다. 어렵기만 한 그들은 도저히 다가갈래야 다가갈 수 없었지만, 어리숙한 길과 이야기하고 우리와 같은 그냥 평범한 사람-천재성이 다분한-이란 것을 알 때, 우리는 그들과 교감을 하게 되는 것이다. 길을 통해 어렸을 시절의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소피 마르소를 만나는 우리를 상상해보자. 과거로 갈 필요도 없이, 우리의 동경의 대상들을 떠올려보자. 정우성을 내가 만질 수 있다면, 남친보다 정우성이 좋을까? 

  글쎄, 과거가 과거라서 아름답듯, 별 또한 멀어서 아름다운 법이다. 하지만 혹시 모르지 않나. 백문이 불여일견이니, 일단 겪어보고 깨닫겠다. 오라, 정우성이여!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