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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맨하탄K Apr 28. 2016

<더 헬프>,“너는 똑똑하고, 친절하고, 소중해.”

1. 들어가며

  언제였지, 2012년 초, 2월과 3월 그쯤에 채널을 돌리는데 우연히 외국영화시상식 수상자를 정리해주는 것을 봤다. 그리고 거기서 상을 휩쓰는 한 흑인 여배우를 보고 도대체 얼마나 연기를 잘했길래 저렇게 다 휩쓸었나 하고 고개를 갸우뚱했다.(주연상을 휩쓸었던 메릴 스트립과 조지 클루니는 일찍이 알고 있던 인물들이었지만 그녀는 내게 있어 생소한 배우였기 때문이다.) "The Help"? 찾아보니 샛노란 배경 속에 흑인 여성들과 백인 여성이 함께 앉아 있다. 아, 이들의 화합을 노래하는 드라마구나. 그냥 그렇게 생각했다.이것은 단순한 화합의 문제를 다룬 것이 아니었다.

  "The Help". 이 영화는 피부색이 다르다는 이유로 차별 받고, 자신의 “삶”을 살 수 없었던 이들의 아픔과 그 극복의 과정을 그리는 이야기였다. 그들이 날리는 통쾌한 한 방을 느낄 수 있는 이야기. 


2. "The Help"

1) 줄거리

  줄거리를 먼저 간단히 살펴보자. "The Help"는 1963년 미시시피 잭슨 주가 배경이 되어 이야기가 진행된다. 당시 이 곳의 여성들은 돈 많은 남자와 결혼해 정원과 가정부가 딸린 집의 안주인이 되는 게 최고의 삶이라 여겼다. 하지만 이런 친구들과 달리 대학 졸업 후 작가의 꿈을 이루기 위해 지역 신문사에 취직한 ‘스키터’. 그녀는 살림 정보 칼럼의 대필을 맡게 되었고, 베테랑 친구네의 가정부 ‘에이블린’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어릴 적에 가정부가 되어 17명의 백인 아이를 헌신적으로 돌봤지만 정작 자신의 아들은 사고로 잃은 에이블린. 스키터에게 살림 노하우를 알려주던 그녀는 어느 누구도 관심 갖지 않았던 자신과 흑인 가정부들의 인생을 책으로 써보자는 위험한 제안을 받는다. 처음에 그녀는 그러한 제안을 거부했고, 그 다음에 동의는 하되 소극적인 자세를 취했다.그 때 마침, 주인집의 화장실을 썼다는 황당한 이유로 쫓겨난 가정부 ‘미니’가 두 여자의 아슬아슬하지만 유쾌한 반란에 합류한다. 미니가 합류함으로서 이들의 프로젝트에는 속도가 붙기 시작했다.

  차별과 불만을 이야기 하는 것조차 불법이 되고 생명을 위협받는 일이 되는 시대에, 태어나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자신들의 이야기를 털어 놓기 시작하는 에이블린과 미니. 그리고 그녀들의 용기 있는 고백은 세상을 발칵 뒤집을 만한 책을 탄생시키게 된다. 

2) 원작, 캐스린 스토킷의 “The Help”

  원작이 소설이라는 사실은 영화를 보고 얼마 후에서야 알게 되었는데, 극에 등장하는 스키터는 이 영화의 원작이 된 소설의 작가 ‘캐서린 스토킷’이었다. 미시시피에서 태어나, 흑인 가정부 손에서 자랐고, 그녀에 대한 기억으로 이 책을 집필하게 된 그녀. 하지만 그녀의 글은 출판되기 까지 60여곳의 출판사에서 거절을 당했었고, 이후 몇 년이 흐르고서야 출판이 되었다.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출판된 책 ‘"The Help"’는 늦어진 출판을 보상이라도 하듯, 사람들은 기다렸다는 듯 그 책에 찬사를 보냈고 아마존에서 무려 100주간이나 베스트셀러에 있었다고 한다. 어떤 시각으로 미국인들이 그 책을 봤을지는 모르겠지만, 소설과 더불어 영화 또한 인셉션 이후로는 최초로 3주 연속 1위의 자리를 지켰다고 하니 미국인들에게 여러모로 강한 인상을 남겼던 것은 분명하다.


3. 그들이 사는 세상

1) 인종차별

  1960년대, 불과 오십년 전이지만 이 때 역시 인종차별은 있었다. 그 어느 나라보다 자유를 주장하는 나라에서 일어나는 일이었단 것이 더욱 더 믿기지 않지만, 사실이다. 이 시기는 영화 속 TV 속보 등을 통해 나오듯 KKK단의 흑인테러사건, 인권운동가 살인사건 등이 공공연하게 일어나던 시기였다. 특히, 남부지역은 예부터 흑인들을 노예로 자신들의 ‘물건’으로 취급했던 곳이고, 미시시피의 잭슨 주가 가장 악명이 높았다고 한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은 적나라하게 묘사되지는 않지만, 구조적인 폭력의 형태로 나타난다. 흑인 여성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가정부로 취직하는 것 말고는 없었고, 그들은 그들의 아이들은 돌보지도 못하며 백인들의 아이들을 키워낸다. 또한, 백인 ‘여성’들은 흑인들과의 화장실 공동사용을 금지하는 법안을 제출하자는 극 중 ‘악역’으로 나오는 ‘힐리’ 등의 행동 또한 그러한 폭력의 일환인 것이다. 

2) 여성

  하지만 좀 더 들어가면 우리는 여기서 또 다른 약자를 발견하게 된다. 바로 여성이다. 1960년대는 남성의 사회였고, 여성들은 남편에게 기대 있을 수 밖에 없었다. 그 선 상에서 제외되는 것이 스키터와 출판사의 여사장의 모습으로 나타나기는 하지만, 그 모습이 진취적이고 진보적이라 할 만큼 극 중 나타나는 ‘여성’들은 정원에 딸린 집에서, 여유를 즐기는 안주인이 되는 것이 자신들의 삶이고 자랑인 수동적인 여성들이다. 그리고 이러한 여성들이 자신의 ‘힘’을 ‘능동적’으로 발휘 할 수 있었던 곳은 자신들보다 아래라고 느끼는 흑인들에 대한 일 뿐이었다. 특히, 흑인 ‘여성’들.

  허영으로 가득 찬 ‘힐리’를 위시로한 그녀들은 겉으로는 그들에게 잘해주는 듯, 생각해주는 듯 행동하지만 위에서 말했듯 화장실을 사용하는 것으로 해고를 시키고, 병을 옮긴다는 말도 안 되는 주장 아래 입법제안을 하는 것으로 자신들의 삶의 이유를 찾은 것이 아니었을까.

그러나, 백인 여성들의 아이러니는 그들이 그런 구조적 폭력을 행하는 것에서 드러난다. 그들 역시 흑인 헬퍼들 손에서 자라났고, 어릴 적에는 그녀를 마치 어머니처럼 따랐겠지만, 자라서는 언제 그랬냐는 듯 거리를 두게 된다. 사회가 만들어낸 이러한 성별과 인종의 차별이 만든 계급 아래에서 이러한 구조적 폭력이 발생한 것이다.

  원작자가 의도한 것이든 작가가 의도한 것이든 간에, 어쨌든 이 영화는 좁게는 흑인, 흑인 여성. 그리고 더 나아가 여성들에 대한 이야기라고 생각된다.


4. “이미지”로서의 "The Help"

1) 색의 대비

  사실 이 영화를 보는 내내, 내용과는 별개로 개인적으로는 따뜻한 “영상”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드라마란 장르가 줄 결말을 생각해서가 아니라 색감 자체가 굉장히 따뜻하다. 60년대, 미시시피의 그 시골스러운 풍경과 전반적으로 옐로우톤을 띄고 있는 미장센이 그런 느낌을 주었다. 내용만은 과거의 시린 현실이지만, 이러한 화면을 통해서 그 속에서도 “마음”을 잃지 않고 굳게 살아가는 이들을 보여주기 위해 감독이 의도한 것이 아니었을까.

  이러한 따뜻한 영상은 에이블린이 그녀가 돌보는 아이에게 늘 속삭여주는 “넌 똑똑하고, 친절하고, 소중해.” 라는 말과 만나면 감동이 배가 된다. 개인적으로는 에이블린이 이 말을 할 때마다 가슴 한 켠이 시큰해졌다. 에이블린은 그 말을 하면서 아이가 그렇게 자라길 바랐고, 평생 수많은 아이들에게 새겼을테지만 어른이 되어서는 멀어져버린 과거의 아이들과 아마 가장 그 말을 해주고 싶었을 그녀의 죽어버린 아들을 떠올렸을 것이다. 이러한 에이블린의 내면과(물론 내 개인적인 의견일 뿐이다만,) 하얗고 노란 영상의 색채가 만나서 눈물을 자아낸다.

  또한, 이렇게 현실과는 다른 밝은 분위기의 영상은 백인들과 흑인들 간의 구별되는 사회를 더 부각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다 본다. 넓은 집, 온통 하얗고 밝은 식기와 가구, 하얀 피부가 누리는 특권. 그 모든 것을 지닌 그들에게 있어서 자신들의 마을만큼 평화로운 곳은 없었을 테다. 이러한 점이 밝은 영상을 통해 상징되고, 거기서는 눈에 띌 수 밖에 없는 흑인들을 통해서, 감독은 그 때의 “현실”을 상징하고자 한 것이 아니었을까? 미시시피가 그저 햇빛이 잘 드는 동네였고, 그냥 땅이 넓어 그랬다면 할 말은 없지만, 적어도 난 그렇게 느꼈다. 


2) 패션

  미장센으로서 영화를 이야기 하자면 배우들의 모습도 이야기 하지 않을 수 없다. 연기에 대해서는 나는 평가할 수 없을뿐더러, 주연부터 시작해서 조연까지 모두 연기가 “쩔었기” 때문에 나는 그들의 의상에 대해서만 다루도록 하겠다. 앞서 다룬 내용들과는 너무나도 샛길로 새어버리는 키워드지만, 그녀들이 입고 나오는 옷은 상당히 내 눈길을 끌었다. 요즘 유행하는 쉬폰 원피스니, 복고풍의 캐쥬얼 원피스니, 그 모든 것이 이 백인 여성들을 통해 나타나고 있다. 영화 “마리 앙뚜와네뜨”의 드레스의 화려함이 날 사로잡았었듯, 그녀들의 옷들도 내 눈길을 끌었다. 보는 내내 예쁘다, 입고 싶다. 하고 되뇌었을 만큼 말이다.

  지금은 복고가 되어버린 당시의 패션은 그 당시 여인들에게 있어서는 모던함의 상징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모던”의 정점에 서 있는 그들의 패션을 통해서도 우리는 차별을 느낄 수 있다. 그들이 그렇게 자신들을 꾸미고 있을 때, 흑인 여성들은 늘 가정부 복장을 한 채로 생활한다. 그 가정부 복장이라는 것도 모든 흑인 가정부들이 똑같이 입고 있는데, 이러한 것을 통해서 당시 미시시피 잭슨 주의 법이 어떠했는가를 짐작할 수 있겠다. 또, 이러한 의상을 어떻게 입는가를 통해 인물들의 특징도 나타내고 있는데, 모든 이들이 모임에 어떤 옷을 입고 갈지부터 걱정하는 것을 통해서 허영심에 가득한 것을 보여준다면, 친구들이 옷에 신경 쓸 때 원피스를 입으라는 엄마의 외침이 있고서야 질질 끌고 나타나는 스키터의 모습은 진보적인 그녀의 성격을 반영한 것이라 할 수 있겠다. 


5. “드라마”로서의 "The Help"

1) 장르의 한계와 의의

  “헐리우드 장르영화”, 혹은 “드라마”란 장르의 한계를 가질 수 밖에 없는 이야기이기는 하다. 당시 흑인들에게 있어 이러한 고백이 가능하게 할 수 있는 사람은 그들을 차별하는 백인들을 통해서여야 했고, 그들의 독자적인 홀로서기는 불가능했던 것이 사실이니 말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덮을 “의의”가 존재하는데 오로지 “백인”들에 의해 “주도”되는 한 방이 아니라, 에이블린과 미니, 그리고 흑인 여성들이 직접 이 한 방의 주역이 되었다는 것이다. 


2) 중심인물의 부재

  이 영화에서는 모두가 “주연”, 그렇지 않다면 모두가 “조연”이다. 이야기의 시작은 스키터가 에이블린에게 일을 제안하는 것으로 시작되기는 하나 그녀는 단지 이 영화의 시발점만 될 뿐, 영화 전체를 이끌어 나가는 비중은 아니다. 또한, 에이블린의 시점에서 진행되고 있기는 하나, 그렇다고 해서 에이블린의 이야기만이 중점이 되는 것도 아니다.미니의 이야기가 있고, 힐리의 이야기가 있고, 또 스키터의 이야기가 있다. 특별하게 다루어지는 “극중 역할”은 없다. 이 모든 이야기가 균등하게 진행되고 있다.

  이 영화를 보면서 자연주의의 대표작품으로 꼽히는 하우프트만의 “직조공”이 떠올랐다. 물론 그 작품은 지극히 현실만을 나타내는 작품으로 이런 감동적인 내용은 아니지만,그 작품에는 주인공은 없다. 다만 현실의 중심에 서있는 ‘직조공들’이 있을 뿐이다.

  "The Help" 역시 그러하다. 1963년, 미시시피 잭슨 주의 중산층 부인들과 스키터, 그리고 흑인 여성들이 있을 뿐이다. 미니 역의 옥타비아 스펜서가 “주연”이 아니라 “조연”상을 휩쓴 것이 이러한 특징을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모두가 주연이거나, 모두가 조연이거나.

  이런 주인공의 부재는 더욱 더 이 영화를 와닿게 한다. 감독은 철저하게 당시의 현실을 보여준다. 직접적인 폭력은 나타나지 않아, 미화한다는 지적을 받기도 한다는데, 직접적인 폭력이 나타났다면 우린 아마 그저 “아,” 그러고 말았을 것이다. 살해당하고, 린치 당하고 하는 유혈이 낭자한 직접적인 폭력은 이제까지 많이 보여져 왔고, 그저 눈만 질끈 감게 만들 뿐이다. 3.에서 이야기 했듯, 화장실을 같이 쓰지 못하고, 밥을 같이 먹지 못하며, 소유물이 되는 그 러한 구조적 폭력을 통해서 우리는 한번 더 생각함으로서 당시의 상황을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6. 마무리하며

  "The Help"는 원작도 성공하고 하이퍼텍스트인 영화 또한 어마어마한 성공을 거둔 드문 케이스라 할 수 있겠다. 더욱이 박스오피스에서 처음 순위보다 더 올라가서 3연패까지 달성하는 것은 더욱 더 드문 일이라고 하니, 이 영화가 미국인들에게 어떤 의미를 주었을지 심히 궁금해진다. 누군가는 감동을 느끼고, 누군가는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소설도, 영화도 너무나도 잘 만들어진 웰메이드 텍스트이기에 가능한 일일 것이다. 결말이 아쉽다는 리뷰를 몇 개 봤는데, 개인적으로는 가장 맘에 드는 결말이다. 아쉽다는 이들은 어떤 결말을 바란 것일까? 그 책을 발표하게 되는 것만으로 “모든 불평등이 해소 되고, 모두 다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하는 결말은 정말 작가가 나태해 빠졌을 때에야 나올 결말이다. 아니면 비극적인 결말로, “그 책의 모의자인 두 명은 잡혀 갔습니다.”, 혹은 “둘은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졌습니다.” 같은 결말은 작가가 미치지 않고서야 낼 수 없는 결말이다.

  위에서 말했듯, 이 영화에는 중심인물이 없다. 다만, 그들의 ‘삶’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의 ‘삶’을 찾아간다. 스키터는 취직이 되어 떠나고, 미니는 예쁘고 착한“스텔라”와 새로운 생활을 시작한다. 에이블린은 비로소 자유를 찾는다. 엔딩장면인 에이블린이 떠나는 뒷모습은 그녀에게 펼쳐진 앞으로의 ‘삶’이다. 그녀는 더 이상 돌보던 아이가 운다고 해서 달려가 돌보지 않는다. 다만, 인사를 하고 집을 나설 뿐이다. 그리고 이것은 그 이후의 흑인 여성들의 ‘삶’인 것이다.

  물론, 현재도 여전히 인종차별은 존재하고, 한국이라고 다를 것은 더더욱 없다. 심하면 심했지, 덜하지는 않을 것이다. 에이블린이 하는 말을 되새기고, 널리 퍼뜨리자.


“너는 똑똑하고, 친절하고, 소중해.”

“우리 모두는 똑똑하고, 친절하고, 소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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