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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방망이 Dec 21. 2019

그런 세계는 없다

<멋진 신세계>, 올더스 헉슬리

천국. 슬픔과 눈물이 없는 하늘의 세계. 빈부나 계급의 격차마저도 기쁨과 감사로 받아들이며, 영원토록 행복감으로 충만한 상태. 슬픔이나 분노 같은 감정은 사라지고 웃음과 평화가 가득한 곳.  

누군가 내게 천국을 위와 같은 방식으로 설명해 준 기억이 있다. 지나치게 단순하고, 얼핏보면 우스꽝스럽기까지 하지만, 실제로 그런 '천국'을 실현하려 했던 시대가 있었다. 기술과 이성을 끝없이 긍정하고, 인간과 세계가 나아질 수 있다고 낙관하던 세상 말이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정말 나아졌을까.

<멋진 신세계>(올더스 헉슬리, 1932)는 현실과는 다른 한 세계를 그린다. 당시 기술의 발전을 상징하는 듯 보이는 포드(Ford)의 자동차 생산 이후(1908년), 새로운 해(年)가 시작된다. 때는 포드 기원 632년으로 고도로 발달한 과학기술을 통해 인간을 생산하는 세상이다. 인간 생산. 이것이 이야기의 시작이며, 소설 전체를 떠받치는 기둥이다. 소설은 끝없이 늘어선 시험관 속에서 태아들이 배양,생산되고 있는 장면을 첫 장면으로 삼는다.


"그리고 예외적인 경우에 우리는 하나의 난소로부터 무려 1 5000명에 달하는 성숙한 어른을 생산해낼 수도 있다."(37)

공장식 인간생산이 가져오는 결과는 명백하다. 가족의 소멸이다. 소설 속 세계에서 '가족'은 과거에 존재했던 인류의 야만스러운 생활방식이다. 부모, 엄마, 아빠와 같은 용어는 폐기되었으며, 사람들은 그런 말들을 혐오스러워 한다.    

"사실은 학구적인 어휘였지만, 출생에 관한 얘기를 더러운 음담패설이라고 여겨 갑자기 당황한 소년들은 입을 다물고 눈길을 돌렸다."(59)

가족, 즉 부부관계의 소멸은 자연히 성윤리의 문제로 연결된다. 소설 속에서 섹스는 어렸을 때부터 꾸준히 배워야하는 '놀이'이며, 특별한 관계속에서 사유되는 무엇이 아니라, 모두와 공유되어야만 하는 공공재다.

" 바는  해야 돼요. 누가 뭐래도 모든 인간은 서로 공유해야 하니까요."(87)

이와 같은 세계가 두려워하는 것은 명백하다. 사랑, 모성애, 가족애와 같은 본성적이고 통제불가능하다고 여겨지는 인간의 감정이다. 서로 다른 다양한 감정의 낙차에서 생겨나는 흔들림, 곧 불안정을 사회는 금기시한다. 거기서 생겨나는 결핍과 혼란은 사회를 뒤흔들 것이다. 사회안정을 위해 감정은 통제되어야 하며, 개인은 그런 감정을 멀리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순간 순간 생겨나는 감정은 '소마'라는 약으로 제어되는데, 이는 마약의 일종으로 알약 형태인 소마는 모든 결핍을 채우는 대용품이 된다.   

"당신한테 필요한  소마  알이죠."(102)

모든 것은 사회 안정을 향한다. 언제나 최고의 선은 안정이다. 안정을 뒤흔드는 것이 악이다. 윤리, 종교, 예술, 역사 등은 집단의 안정 앞에서 불필요하고 사악한 것이 된다. 고도로 발달한 과학은 사회안정을 위한 도구로 이용될 뿐이며, 인간 역시 안정을 위한 수단일 뿐이다. 계급은 여전히 존재하며, 심지어 생산방식을 통해 생성/유지 되지만, 각 계층의 구성원들은 세뇌를 통해 자신의 역할에 만족하며 기꺼이 수행한다. 의심이나 혼란이 고개를 들 땐 소마 한 알이면 충분하다. "'공동체, 동일성, 안정성'이라는 세계국의 표어"(30)만이 가장 숭고한 가치다.

여기까지가 소설<멋진 신세계>의 중반이다. 일반의 소설이 특별한 인물을 중심으로, 혹은 인물의 시선을 통해 세계를 파악하는 방식을 보여주는데 반해 <멋진 신세계>는 세계 자체에 초점을 맞춘다. 이보다 16년 뒤에 쓰여진 조지 오웰의 명작 <1984>가 정치적 인간, 혹은 권력적 세계를 통해 디스토피아를 그려낸다면,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는 당대 서구 세계를 주름잡았던 근대 과학주의와 마르크스주의가 결합된 세계를 절묘하게 그려냈을 뿐 아니라, 당시 낙관적으로 흐르던 유토피아적 세계의 미래를 비판적으로 예견한다. 소설이 그리는 과학적 유토피아가 가져올 결과물은 인간성이 소멸된 세계다. 과거를 기억할 필요가 없으며, 의심하지 못하고 세뇌된 것만을 되풀이 하는 기계적인 인간. 아름다움과 슬픔을 인식하지 못하며, 사랑이라는 가치를 잃어버린 결핍 없는 인간. 늙음과 죽음을 삭제시켜버림으로써 생명의 의미를 잃어버린 비인간화된 인간의 디스토피아를 소설은 그린다.

중반 이후 소설은 문명세계 바깥에 있는 야만세계를 등장시켜 긴장을 만들어 낸다. 문명국 바깥에는 여전히 가족과 모성애가 존재하며, 신을 섬기고 야만스러운 종교의식을 치르는 원시적인 세계가 있다. 문명국에 살던 버나드 마르크스는 휴가차 방문한 야만세계에서, 양쪽 세계의 사생아인 '야만인 존'을 만나고, 그를 문명국에 데려온다. 야만인 존은 야만의 세계에서 우연히 발견한 셰익스피어의 글을 통해 언어와 감정을 배운 셰익스피어적 인간이다. 소설은 그를 문명국의 인간과 대비시킨다.

소설은 그를 통해 문명세계에 의문을 제시한다. 사랑과 윤리를 잃어버린 세계를 과연 문명이라 부를 수 있는가. 죽음과 생명을 모르는 세계를 더 나은 세계라고 말할 수 있는가. 신과 고통이 금기시 된 세계를 유토피아라고 할 수 있는지를 소설은 묻는다. 그는 말한다.

"하지만 나는 안락함을 원하지 않습니다. 나는 신을 원하고, 시를 원하고, 참된 위험을 원하고, 자유를 원하고, 그리고 선을 원합니다. 나는 죄악을 원합니다."(362)

과연 우리는 어떤 세상에서 살기를 원하는 걸까. 문명은 참으로 야만의 세계보다 나은 걸까? 문명이 야만에 기생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동안 우리는 무엇을 얻고, 무엇을 잃었을까.

소설을 읽는 동안 아쉬움도 있었다. 그것은 윤리의 문제다. 저자는 과학주의와 마르스크주의가 결합된 미래적 유토피아를 거부하는 동시에, 곳곳에서 셰익스피어를 인용함으로써 자신의 윤리관을 드러낸다. 문명국에서 만난 레니나가 존과 섹스를 하기 위해 그를 유혹하자, 그는 셰익스피어를 인용하여 레니나에게 폭언을 퍼붓는다.

"굴뚝새도 그러하고, 자그마한 똥파리도  눈앞에서 색욕을 부리는 도다."(299), " 훌륭한 책은 '창녀'라는 말을 써넣기 위해서 쓰였더냐?"(299), "뻔뻔스러운 화냥년"(300)

저자에게 윤리는 셰익스피어적 가치로 대변되는 것일까? 가족이나 모성애 또는 순결 같은 가치야 말로 인간성을 회복하는 길인 것처럼 읽히는 내용이 소설 전반에 흐른다. 하지만, 그와 같은 윤리관은 정말로 인간적인가? 순결, 모성애, 가족애와 같은 윤리관을 인간성을 억누르는 근대화된 가치관으로 볼 수도 있지 않을까? 그것이야 말로 억압이며, 비인간화가 아닐까. 저자가 인용하는 셰익스피어적 가치가 (오늘날까지는 아니더라도) 당시 저자 시대에는 적합했을까? 더 나아가, 성의 문제를 다루는 방식도 고개를 갸웃하게 한다. '모든 인간은 공유되어야 한다'는 내용을 다룰 때, 공유되는 것은 여성에 제한되는 듯한 인상을 받았다. '공유'를 말하면서도 주체는 남성이며, 여성은 대상으로 그려진다. 이는 저자의 의도일까, 아니면 그의 무의식이 드러난 걸까. 내가 잘못 읽은 것이기를 바란다.


여러 가지로 아쉬움이 남는 책이다.



서평11. 멋진 신세계/올더스 헉슬리/소담/1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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