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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방망이 Dec 21. 2019

그리스도교 언어 구출하기

<그리스도교 신앙을 말하다>, 마커스 보그

'죄'라는 단어는 이제 수명을 다 했다고 생각했다. 이제 그 용어는 더이상 인간의 현실을 드러내지 못하는, 그들만의 종교적 언어일 뿐이라고 말이다. 이제 '죄'와 같은 철지난 용어는 내다버리고, 그것을 대체할 다른 언어를 찾아야 한다고 믿었다. 이를테면, 소외나 한(恨) 같은 용어가 인간의 현실을 더 잘 드러내주지 않을까?

<잃어버린 언어를 찾아서>(비아, 2016)는 이런 섣부른 생각을 잠시 미루게 해주었다. 이 책은 '죄'라는 언어만이 가진 인간의 근원적 경험과 심연이 있다고 주장한다. 다른 어떤 언어도 '죄'라는 말을 온전히 대신 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죄라는 용어를 포기하는 순간 우리는 많은 것을 잃게 될 것이라고 저자는 경고한다. 이처럼 <잃어버린 언어를 찾아서>가 '죄'라는 언어만을 주제로 한다면, 죄 뿐 아니라 그리스도교의 언어 전체를 새롭게 살피는 방식으로 그리스도교를 소개하는 책이 있다. <그리스도교 신앙을 말하다>(비아, 2017)가 바로 그 책이다.

"이 책은 일종의 '그리스도교 언어 입문서'다(13)." 이 책은 그리스도교 언어를 다룬다. 구원, 회개, 믿음, 하나님, 예수, 부활, 승천 등 그리스도교 신앙의 바탕이 되며, 교회 일반에서 사용하는 대부분의 언어를 다시 설명하고 있다. 바꿔 말하면, 저자는 그리스도교 언어를 포기하는 쪽보다 구원해 내는 쪽을 선택한다. 그런데 왜 그래야 하는가? 무엇 때문에 언어를 다시 설명해야 하며, 그것을 구원(해방)해야 하는가?

같은 언어를 다르게 쓰고 있기 때문이다. 같은 언어를 말하면서도, 서로 전혀 다른 두 개의 그리스도교를 신앙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언어를 통해 우리가 속한 그리스도교를 이해할 수 밖에 없고, 그 이해를 통해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을 형성하게 마련인데, 그 언어를 오해하고 왜곡해서 사용하기 때문이다.

이런 문제는 어디서 생길까? 언어를 이해하고 해석하는 틀이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저자는 그리스도교 언어를 오해하고 왜곡하게 만드는 두 가지 해석 틀을 제시하는데, 하나는 천국과 지옥의 틀이며 다른 하나는 문자주의이다.  

•천국과 지옥의 해석틀
저자는 "천국과 지옥의 해석틀이 블랙홀처럼 그리스도교 언어를 빨아들여 그 의미를 바꾸고 왜곡하고 있다."(32)고 지적한다. 천국과 지옥의 해석틀은 그리스도교의 핵심 용어라고 할 수 있는 구원, 믿음, 죄와 용서, 회개 등을 블랙홀처럼 빨아들인다. 모든 것은 이 땅에서의 삶이 아니라, 죽은 후 내세를 향한다. 천국과 지옥의 틀 앞에서 그리스도교 언어는 처음 가졌던 그 풍부한 의미를 잃고, 천국을 위한 획일적인 단어로 전락한다.  

•문자주의
대다수 그리스도인들은 성서가 사실이 아니라면 신앙은 진실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성서는 하나님의 정확무오한 계시므로 반드시 사실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문자 중심적 성서 읽기는, 그리스도교 안에 있는 사람들을 다양한 읽기에서 차단함으로써 성서에 스며있는 다채로운 은유를 발견하지 못하게 하며, 그리스도교 바깥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성서를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는 비이성적 얘기들로 가득한 책으로 오해하게 만듦으로써 그리스도교와 더욱 멀어지게 한다. 이에 대해 저자는 역사-은유적 읽기를 제안하는데, "역사적 접근이란 성서와 그리스도교 언어를 그 언어가 나온 과거의 역사적 상황에 놓는 것을 뜻"(46)하며, 은유적 읽기란 "언어가 지니는 의미의 잉여에 관한"(50)읽기로, 표면적으로 드러난 사실적 의미 그 이상을 성서의 언어가 담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    

위의 두 가지 틀로부터 그리스도 언어를 해방시키기 위해 저자가 사용하는 방법은 두 가지다. 첫째는 왜곡돼 버린 언어의 의미(성서적이라고 믿어지는)를 성서 안에서 다시 찾아내는 것이다. 이를테면 '구원'이라는 말을 이스라엘의 출애굽 당시, 혹은 바벨론 포로 시대에 어떤 의미로 쓰였는지를 살펴봄으로써, 구원이라는 언어를 내세(천국)로부터 구해내고, 그 용어가 다분히 땅의 현실과 관련하는 정치적/경제적/공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음을 드러낸다.

둘째는, 그리스도교의 언어들을 역사 속에서 살피는 것이다. 저자는 우리가 본래적이라고 믿고 사용하는 그리스도교 언어들의 의미가 후대 산물임을 지적한다. "1600년경 이전까지만 해도 영어에서 '믿다'라는 동사는 어떤 진술이 아니라 사람만을 대상으로 쓰는 말이었다."(177) ... 17세기 이전에 '믿음'이라는 말은 더 많은 뜻을 포함했다. 영어에서 believe는 '소중히 여기다'라는 뜻을 지닌 고대 영어인 'be loef'에서 파생된 말이다."(178) 두 가지 방식을 토대로 저자는 그리스도교 언어 각각이 가진 의미를 해체하여 재구축한다.

혹자는 저자가 오늘날 한국적 신앙에 너무 냉혹하게 칼을 들이대는 것 아니냐고 나무랄지도 모르지만, 저자는 더할나위 없이 따뜻하다. 그는 자신과 다른 견해를 결코 비웃거나 조롱하지 않는다. 어떻게 하면 자신과 다른 견해를 가진이들을 설득할지를 고민한 흔적이 책 곳곳에 뭍어난다. 그렇다고 신앙고백으로 내용을 뭉뚱거리거나, 은혜로운 말로 얼렁뚱땅 넘어가려고도 하지 않는다. 명망있는 신학자답게 자신의 견해를 정직하게, 쉽지만 단호하게 적어간다. 저자는 그리스도교 신앙을 냉혹하게 해체 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는 언어를 구해냄으로써, 그리스도교를 살리고 싶어한다.

" 책의 목적은 성서와 근대 이전의 그리스도교 전통에서 길어 올린 그리스도교 언어의 대안적인 의미를 제시하는  있다."(12)

두껍지 않은 책 안에 20개가 넘는 용어를 풀어내다 보니, 압축된 내용이 많아 되려 비약적으로 보이기도 하고, 다소 반복적이고 단조로운 구성이 지루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것을 극복할 방법은 독자에게 있다고 보는데, 별거 없다. 저자의 마음을 헤아리며 천천히 읽는 것이다. 개인에게 뿐 아니라, 교회들에게도 이 책이 널리 읽히기를 바란다. 쉽지는 않겠지만.



서평12. 그리스도교 신앙을 말하다/마커스 보그/비아/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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