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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방망이 Dec 22. 2019

인간, 되기

<인간실격>, 다자이 오사무

금요일 밤이 되면 11시가 되기를 은근히 기다린다. 네** 웹툰 <호랑이 형님>이 업데이트 되기 때문이다. <호랑이 형님>은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한 웹툰으로, 신비한 힘이 숨겨진 어린 아이를 차지하기 위해, 호랑이, 새, 늑대, 여우 등 온갖 동물들이 각축을 벌이는 내용을 담고 있다. 얼개만을 보면 뻔한 이야기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웹툰을 본 사람들은 알거다. <호랑이 형님>이 얼마나 생기발랄하고 참신하며 흥미진진한 웹툰인지를 말이다. 흥미로운 것은 <호랑이 형님>에 나오는 동물들이 인간을 생각하는 방식이다. <호랑이 형님>은 영상매체들이 흔히 하듯, 인간을 끔찍한 파괴자나 최상위 포식자로 그려내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호랑이 형님>에 등장하는 동물들은 인간을 가장 멀리해야 할 부류로 여긴다. 동물들은 인간 마을 근처에만 가도 숨이 막혀하고, 혼탁한 매연 속에 있기라도 한 것처럼 곤혹스러워 한다. 묘한 것은 그런 장면이 스쳐지나갈 때마다 수긍하는 나 자신이다. 나만 그런 것 같지는 않다. 대체 우리는 ‘인간’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 걸까?

‘인간이 어떻게 그럴 수 있지?’, ‘인간이 먼저 되라.’등의 표현을 우리는 종종 쓴다. 마치 인간이라면 닿아있어야 하는 평균치 윤리라도 있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거꾸로 생각해보면, 앞의 표현들은 대체로 인간만이 행하는 일들에 대한 한탄이기도 하다. ‘인간’에게 결코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일은 사실상 인간을 통해서만 일어난다. 그래서일까? ‘인간’이 되는 일은 어렵다. 우리는 인간을 넘어서고자 발악하지만 정작 그 길은 인간의 삶 바깥 즉 죽음 말고는 없다.   

소설 『인간 실격』은 ‘인간되기’에 실패한 주인공 ‘요조’의 삶과 죽음을 다룬다. (가수 요조가 이 소설에서 이름을 가져왔다고 한다. 요조숙녀 따위에서가 아니라.) 주인공 요조는 어린 시절부터 자신 이외에 인간을 철저하게 타자로 느낀다. 『인간 실격』은 이렇게 소설을 시작한다. “부끄럼 많은 생애를 보냈습니다. 저는 인간의 삶이라는 것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13)

어린 요조에게 ‘인간’은 이해와 공감이 가능한 존재가 아니다. 요조는 자신을 보통명사 ‘인간’에게서 완전히 동떨어진 존재라고 여긴다. 집합적인 ‘인간’ 묶음에서 떨어져 나간 존재가 주인공 요조다. 개념화된 인간 묶음에 속하지 못하게 된 자신, 자신을 ‘인간’에 동일화하지 못하는 요조는, 그 때문에 불안과 두려움을 느낀다. “제가 가진 행복이라는 개념과 이 세상 사람들의 행복이라는 개념이 전혀 다를지도 모른다는 불안. 저는 그 불안 때문에 밤이면 밤마다 전전하고 신음하고, 거의 발광할 뻔한 적도 있었습니다.”(16) 그렇다면 인간의 무엇이 요조를 ‘그들’에게서 멀어지게 했을까.  

저는 어렸을 때부터 몸이 약해서 자주 병치레를 했습니다. 자리에 누워서  커버, 베갯잇, 이불 홑청은 정말이지 쓸데없는 장식품이라고만 생각했는데 그것이 뜻밖에도 실용적인 물건이라는 사실을 스무  가까이 되어서야 알게 되었고,  인간의 알뜰함에 암담해지고 서글퍼졌습니다.”(14)

인간은 먹지 않으면 죽는다. 그러니까 일해서 먹고 살아야 한다, 라는 말만큼 저에게 난해하고 어렵고, 그리고 협박 비슷하게 울리는 말은 없었습니다.  저에게는 ‘인간이 목숨을 부지한다.’라는 말의 의미가 지금껏 전혀 이해되지 않았다는 얘기가   같습니다. ... 실용적인 괴로움, 그저 밥만 먹을  있으면 그것으로 해결되는 괴로움. 그러나  괴로움이야말로 제일 지독한 고통이며, 제가 지니고 있는  개의 재난 따위는 상대도 안될 만큼 처참한 아비지옥일지도 모릅니다. ...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웃 사람들의 괴로움의 성질과 정도라는 것이 전혀 짐작이 가지 않았던 것입니다.”(16)

요조가 견딜 수 없어하는 것은 인간의 실용성이다. 살기 위해,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먹어야 한다고 말하는 인간이다. 놀이에 불과했다면 좋았을 육교가 건너기 위해 만든 도구라는 것을 알았을 때도 요조는 실망한다. 다시 말해 근대적인 목적으로 삶의 빈자리를 꾸역꾸역 채워 넣으려는 인간을 요조는 견딜 수 없다. 모든 빈칸에 ‘의미’라는 답을 채워 넣으려는 인간 말이다. 그 뿐 아니다. 인간에게 본질 같은 게 있다고 말하면서도, 거짓과 불신으로 충만한 인간과 그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는 인간 세계 역시 요조에게는 난해하다.

서로 속이면서, 게다가 이상하게도 전혀 상처를 입지도 않고, 서로가 서로를 속이고 있다는 사실조차 알아차리지 못하는 , 정말이지 산뜻하고 깨끗하고 밝고 명랑한 불신이 인간의 삶에는 충만한 것으로 느껴집니다. ... 저는 바른생활 교과서에 나오는 정의니 뭐니 하는 도덕 따위에는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저한테는 서로 속이면서 살아가는, 혹은 살아갈 자신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인간이야말로 난해한 것입니다. 인간은 끝내 저한테 요령을 가르쳐주지 않았습니다. 그것만 터득 했더라면 제가 인간을 이렇게 두려워하면서 필사적인 서비스 같은 것은  해도 됐을 텐데 말입니다. 인간의 삶과 대립되어 밤이면 밤마다 지옥 같은 괴로움을 맛보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말입니다.”(27)

그렇다고 해서 요조가 특정한 선함에 가깝거나 순수한 존재는 아니다. 오히려 요조는 인간에게 붙어있기 위한 단 하나의 방법으로 ‘익살’을 떤다.

그래서 생각해  것이 익살이었습니다. 생각하면 할수록 사람이란 것이  수가 없어졌고,  혼자 별난 놈인  같은 불안과 공포가 엄습할 뿐이었습니다. 저는 이웃 사람하고 거의 대화를  나눕니다. 무엇을 어떻게 말하면 좋을지 몰랐던 것입니다. 그것은 인간에 대한 최후의 구애였습니다. 저는 인간을 극도로 두려워하면서도 아무래도 인간을 단념할 수가 없었던  같습니다. 그렇게 해서 저는 익살이라는 가는 실로 간신히 인간과 연결될  있었던 것입니다.”

요조는 인간과 어울려 살기 위해 자신을 거짓으로 채운다. 즉 자기 아닌 것들로 자신을 채우는 것이다. 소설 초반에 등장하는 세 장의 사진은 부자연스럽다 못해 인간과는 거리가 먼 듯이 웃고 있는 요조의 표정을 묘사한다.

그리고 이번에도 역시 웃고 있다. 이번 미소는 주름투성이의 원숭이 웃음이 아니라  능란한 미소가 되어 있지만, 그러나 인간의 웃음이라고 하기에는 어딘지 걸린다. 피의 무게랄까 생명의 깊은 맛이랄까. 그런 충실감이 전혀 없는, 새처럼 가벼운 것이 아니라 그야말로 깃털처럼 가벼운, 그냥 하얀 종이  장처럼 그렇게 웃고 있다.”(11)

때문에 이 세계 안에 요조 자신은 없다. 거짓뿐이다. 진실은 한줌도 남지 않게 되는 것이다. 인간이라는 껍데기와 익살스러운 몸짓만 남게 될 뿐, 요조는 점점 빈 존재가 되어간다. 그에게 삶이란 인간과 연결되기 위한 익살일 뿐이므로 그는 삶 바깥에 있다. 그는 삶이 없는 삶을 살고, 존재 없는 존재가 되어간다. “나는 무야. 바람이야. 텅 비었어.”(19) 어쩌면 요조에게 인간이란 애당초 ‘없음’에 가까운 존재일지도 모르겠다. ‘산뜻하고 명랑한 불신’만이 충만한 존재이므로. 결국 인간 노릇하기에 지쳐버린 요조는 가장 궁극적인 무(無), 즉 죽음을 선택하지만 그것마저도 번번이 실패한다.

흥미롭게도 『인간 실격』은 저작 시기나 주제 등에서 쟁쟁한 유럽 소설 몇 권을 떠오르게 한다. 대표적으로 카뮈의 소설 『이방인』과 주인공 뫼르소를 떠올리게 하는데, 두 소설이 모두 철저하게 개념화된 인간과, 그로부터 고립되어 있으면서도 두드러지는 한 개인을 그린다는 점에서 비슷한 문제의식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하지만 각 소설이 두 주인공 요조와 뫼르소를 그려내는 방식은 사뭇 다르다. 간단히 말해 『이방인』은 타인을 죽임으로써 뫼르소라는 한 인간의 ‘있음’을 드러낸다면, 『인간 실격』은 자신을 죽임으로써 ‘없음’으로 가려는 요조를 보여준다. 즉, 두 소설 모두가 큰 문제의식은 함께 공유하면서도 그것을 드러내는 방식은 전혀 다른 것이다. 하지만 두 소설 모두가 ‘죽음’이라는 큰 주제를 다루면서 근대 이후에 직면하게 된 삶의 무의미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당대를 엿볼 수 있게 해준다는 점 역시도 흥미롭다. 카뮈가 선수를 치지 않았다면 『인간 실격』은 ‘이방인’이라는 제목이 붙었어도 전혀 어색하지 않은 소설이다. (『이방인』은 1942년에, 『인간실격』은 1948년에 출판되었다.)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과도 엮어볼 수 있는데, 두 소설 모두가 주인공의 어린 시절부터 청년이 되기까지의 성장을 다룬다는 형식도 비슷하지만, 그보다 두드러지는 것은 두 작가가 인간에 대해 갖는 태도다. 헤세는 『데미안』의 주인공 싱클레어를 통해 ‘참인간’이 되어야 한다고 타인을 향해 설교한다면, 오사이 다자무는 요조를 통해 인간됨에 관해 자조한다. 싱클레어가 위로 치솟는 인간이라면, 요조는 끝없이 아래로 침잠한다. 헤르만 헤세가 외롭게 인간의 가능성을 외친다면, 오사이 다자무는 쓸쓸하게 불가능성을 말한다. 이와 같은 두 소설의 현격한 차이는 어디서 비롯되는 걸까? 두 사람 모두 제2차 세계대전에 깊이 관여한 국가의 작가라는 사실도 그렇지만, 두 작품이 2차 세계대전을 사이에 두고 앞뒤로 출판되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조금은 더 흥미로운 읽기가 될 수 있지 않을까. (『데미안』은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난 직후인 1919년에 출판되었다.)

소설은 두 말할 나위 없이 좋다. 문장이 짧으면서도 곳곳에서 제목만큼이나 강렬한 문장들을 만나게 된다. 소설은 주인공 요조만큼이나 익살스러우면서도 동시에 어둡고 적나라하다. 어렵지 않으면서도 충분히 말을 건넨다. 다시 읽고 실컷 수다를 떨고 싶게 만드는 책이다. 일독을 권한다.

세상이란  도대체 뭘까요? 인간의 복수일까요.  세상이란 것의 실체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요. 무조건 강하고 준엄하고 무서운 것이라고만 생각하면서 여태껏 살아왔습니다만 ... 그렇지만 그때 이후로 저는 '세상이란 개인이 아닐까.‘하는 생각 비슷한 것을 가지게 되었던 것입니다.”(93)



서평13. 인간실격/다자이 오사무/민음사/1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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