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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방망이 Dec 23. 2019

알맞은 거리를 알 수 있을까

<채식주의자>, 한강

『위대한 개츠비』와 『이방인』의 경우처럼 외국 작품을 한국어로 옮기는 문제로 시끌벅적했던 적은 있지만, 한국 소설을 외국어로 번역하는 일로 이처럼 떠들썩한 적이 또 있었을까. 물론 외국어로 번역된 한국 소설이 『채식주의자』가 처음일리는 없다. 그럼에도 유난히 소란스러운 이유는 소설 『채식주의자』가 노벨문학상과 비견된다는 ‘맨부커상’(인터내셔널 부문)을 수상했기 때문일 것이다. 한국 소설이 이름 높은 상을 받는 일에 관한 내성이 없어서일까. 시간이 지난 지금도 번역에 관한 논란이 끊이지 않는다. 마치 카페인을 처음 받아들인 몸이 자신의 심박을 진정시키지 못하는 것처럼.

『채식주의자』는 한강 작가의 장편소설로 세 개의 독립된 단편 「채식주의자」, 「몽고반점」, 「나무불꽃」이 서로 조응하여 하나의 이야기를 이루는 연작소설이다. 소설은 어느 날 갑자기 육식을 거부하기 시작한 ‘영혜’와, 그녀의 채식으로 인해 남편과 형부, 그리고 언니 ‘인혜’에게 벌어지는 이야기를 차례로 다룬다. 서사의 중심에는 ‘영혜의 육식거부’가 확고하게 자리를 잡고 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인물 영혜는 철저하게 대상화(對象化)되어 있다. 작가는 영혜를 멀리 떨어뜨려 놓고, 그녀를 바라보는 남편, 형부, 언니의 시점으로 이야기를 펴나간다. 어쩌면 『채식주의자』는 영혜와의 거리(distance)에 관한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접근 불가능한 미지의 생물처럼 멀리 떨어진 그녀를 얼마나 알 수 있을지(understanding)에 관한 이야기 말이다. 동물적 인간의 삶을 거부하고 식물적 나무가 되려는 영혜를 과연 ‘누가’ ‘이해’할 수 있을까. 한글로 된 『채식주의자』를 읽는 우리는 그녀와의 거리를 얼마나 좁힐 수 있을까.

1. ‘ 아내를 가로지르는 투명한 선혈 - <채식주의자>
소설 속 화자 ‘나’의 아내인 영혜는 평소 브래지어를 착용하지 않는 것을 제외하고는 특징 없는 평범한 여성이다. 남편 ‘나’는 아내를 이렇게 묘사한다. “그러니, 세상에서 가장 평범한 여자로 보이는 그녀와 결혼한 것은 자연스러운 선택이었다.”(10쪽), “그녀는 내가 고르고 고른, 이 세상에서 가장 평범한 여자가 아니었던가.”(26쪽) 남편은 평범한 아내를 선택했고 고른 것이다.

어느 날 아침, 영혜는 냉장고 안에 잘 포장되어 있던 여러 종류의 고기를 남김없이 버린다. 그런 아내를 보고 놀란 남편이 무슨 일이냐고 묻자 영혜는 ‘꿈을 꿨어’라고 답할 뿐이다.

어두운 숲이었어. 아무도 없었어. 뾰죽한 잎이 돋은 나무들을 헤치느라고 얼굴에, 팔에 상처가 났어. … 얼어붙은 계곡을 하나 건너서, 헛간 같은 밝은 건물을 발견했어. 거적때기를 걷고 들어간 순간 봤어. 수백개의, 커다랗고 시뻘건 고깃덩어리들이 기다란 대막대들에 매달려 있는 . 어떤 덩어리에선 아직 마르지 않은 붉은 피가 떨어져 내리고 있었어. 끝없이 고깃덩어리들을 헤치고 나아갔지만 반대쪽 출구는 나타나지 않았어. 입고 있던 흰옷이 온통 피에 젖었어. …  손에 피가 묻어 있었어.  입에 피가 묻어 있었어.  헛간에서, 나는 떨어진 고깃덩어리를 주워먹었거든.  잇몸과 입천장에 물컹한 날고기를 문질러 붉은 피를 발랐거든.”(18-19)

이 꿈을 계기로 영혜는 모든 종류의 육식을 거부한다. 그녀의 변화는 식생활에만 제한되지 않는다. 영혜는 남편과의 잠자리도 거부하는데, 이유를 묻는 남편에게, ‘당신의 땀구멍 하나하나에서 올라오는 고기 냄새 때문’이라고 그녀는 답한다. 남편에게서 새어나오는 어떤 동물성도 그녀는 견딜 수 없다. 그렇게 대답하는 아내에게 질려버린 남편은 “나는 모르고 있었다. 저 여자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다.”(22쪽)고 말한다. 남편 ‘나’는 끝까지 아내를 알려고 하지 않는다. 처음부터 알기 위해 고른 대상이 아니었으니까.

점점 극단으로 향해가는 아내를 더 이상 견디기 어려운 남편은 그녀의 가족을 이용해 아내를 제자리로 돌려놓으려고 한다. 며칠 후 처형의 집에서 있을 아내의 친정 가족 모임에서, 그녀의 식구들이 아내를 설득해 주기를 기대하며 아내의 상태를 전한다. 가족이므로. 하지만 남편의 기대는 어긋나고 만다. 친정 식구들은 아내를 어르고 달래며 설득하려 하지만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이에 분노한 장인은 딸을 강제로 붙잡고 그녀의 입 안으로 탕수육을 욱여넣지만, 저항하던 영혜는 과도로 자신의 손목을 긋는다.

영혜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그녀는 극단적인 ‘채식주의자’가 된 것일까. 식(食)에 관한 어떤 신념에 자신을 편입시키려는 것일까?

도살장처럼 보이는 선혈 가득한 장소에 관한 꿈을 꾸고 난 후, 영혜는 포장된 고기를 전부 버린다. 포장된 고기는 도살장과 식탁 사이의 거리(distance)를 보여준다. 생존을 위해 동물을 사냥하고, 사냥당한 동물을 위한 의식을 치르던 과거의 인류와는 달리, 먹기 좋게 썰린 공장식 고기팩은 도살장과 식탁 사이에 거리를 만듦으로써 죄의식을 지운다. 그 거리를 확보한 인간은 죄책 없이 요리된 고기를 즐긴다. 처음부터 날카로움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아무도 찌르고 상처 입히고 죽인 적이 없고, 어느 누구도 날카로움을 받아 낸 적이 없는 것처럼.

날카로움을 받아내는 대상과의 거리는 ‘인간’에게 평화를 가져다준다. 그 거리너머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굳이 알 필요가 없다. 마치 남편이 아내 영혜를 알기 위한 노력을 거부하듯이. “그러나 왠지 나는 그녀를 만질 수 없었다. 그녀에게 말을 붙이고 싶지도 않았다.”(15쪽) 요리된 고기를 즐기는 인간이 날카로운 세계를 망각하듯, 남편은 아내와의 거리를 확보함으로써 영혜가 받아내고 직면한 폭력을 외면한다. 법적으로 ‘거리 없음’을 뜻하는 무촌(無寸)인 ‘부부’관계 안에서, 아내를 다룰 수 있는 대상으로 만들고 자신은 아무런 침입도 받지 않으려는 남편의 욕망은, 도살당한 고기와 깔끔한 포장의 결합만큼이나 모순적이지 않은가?

남편이 원했던 평범함을 이탈한 영혜를, 남편은 채식주의자로, 정신질환자로 다시 틀 지운다. 그래야만 거리를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영혜가 브래지어뿐만 아니라 환자복을 벗어버림으로써 다시 씌워진 틀을 거부하자 남편은 아내를 떠남으로써 무촌(無寸)이 된다.

2. 음란하고 관능적인 '' - <몽고반점>
두 번째 단편 「몽고반점」은 영혜의 형부인 ‘그’의 시점에서 서술된다. 그는 비디오미술 작가로 성수대교 붕괴와 같은 사실주의적 작품을 주로 영상에 담아왔다. “형 별명이 오월의 신부였잖아. 의식 있는 신부, 강직한 성직자 이미지…”(135쪽) 그에 대한 주변의 평가가 보여주듯, 주로 현실세계를 영상에 담는 작업을 해오던 그가, 어느 날 어린 아들의 엉덩이에 있는 파란 몽고반점이 영혜에게도 남아있을 거라는 아내의 말을 듣고 걷잡을 수 없는 욕망에 사로잡힌다. ‘그’가 지금까지 작품에 담아왔던 현실세계의 이미지와는 전혀 다른, 처제의 몸에 남아 있을지도 모를 파란색 몽고반점의 이미지에 정신을 빼앗긴 것이다.

퇴화된, 모든 사람에게서 사라진, 오로지 어린아이들의 엉덩이와 등만을 덮고 있는 반점. 오래전 갓난 아들의 엉덩이를 처음 만지며 느꼈던 말랑말랑한 감촉의 희열과 겹쳐져, 그녀의  번도 보지 못한 엉덩이는 그의 내면에서 투명한 빛을 발했다.”(87)

 ‘그’는 아내 몰래 처제에게 작품의 모델이 되어줄 수 있는지를 묻는다. 영혜는 형부의 부탁을 담담하게 수락하고, 자신의 온 몸에 태고의 것 같은 식물이 그려지도록 형부의 붓에 자신을 맡긴다. 그러나 ‘그’는 거기에 만족하지 않는다. 그의 욕망은 더 깊고 근원적이다. 그는 식물을 온몸에 그린 남녀가 하나로 섞이는 이미지를 원한다. 결국 ‘그’는 자신의 몸에도 같은 이미지를 그려, 처제와 몸을 섞기에 이르고 그 모습을 영상에 담는다. 다음 날 아침, 동생 영혜를 위해 반찬을 챙겨 온 ‘그’의 아내이자 영혜의 언니인 인혜가, 두 사람의 기괴한 모습이 담긴 영상을 보게 되는 것으로 「몽고반점」은 끝을 맺는다.

 「몽고반점」은 「채식주의자」에 뒤이은 이야기로, 육식을 거부하다가 자신의 손목을 그은 영혜와, 영상 예술을 하는 형부 사이에 일어난 파격(破格)을 그린다. 이 이야기는 불편하고 모호하다. 그들의 행위가 사회적 금기를 깨트리는 일탈인 탓도 있지만, 무엇보다 화려한 색의 식물을 온 몸에 그려 넣은 두 육체가 몸을 섞는 이야기를, 포르노그라피로 보아야 할지 예술적인 장면으로 읽어야 할지 난감하기 때문이다. 불편하고 난감한 그들의 파국적 이야기를 우리는 어떻게 읽게 될까.

 소설은 ‘그’의 결핍과 욕망을 그린다. 그는 강직한 성직자(135쪽)처럼 현실을 담아내고 고발하는 영상을 찍어왔지만, 그는 자신의 작품에 만족하지 못한다.

 이상  현실의 이미지들을 견딜  없었다. 다시 말해, 그것들을 다룰  있었을  그는 충분히 그것들을 미워하지 않았던  같았다. 혹은, 충분히 그것들로부터 위협당하지 않았던  같았다.”(83)

그에게 ‘현실’은 영상 안에서 자신이 만들어 낸 이미지일 뿐이다. 그는 ‘다룰 수 있는’ 현실을 만들어내는 자신을 견딜 수 없다. 자신이 다룰 수 있는 작품, 즉 자신을 침범하지 않는 현실이 어떻게 현실일 수 있겠는가. 마치 「채식주의자」의 ‘남편’이 아내와 거리를 두고 그녀를 다루려고 한 것처럼, 아내가 겪은 생생한 현실을 남편은 한낱 ‘꿈’으로 치부하려고 했던 것처럼, 「몽고반점」의 ‘그’는 현실을 ‘사실주의적’인 작품으로 만들고 다루어왔을 뿐이다.

하지만 그는 자신과 자신이 만든 사실주의적 작품 사이의 간격을 안다. 그 간격을, ‘사실주의(realism) 작가’라는 말을 그는 견딜 수 없다. 영혜가 ‘채식주의자’가 아니듯, ‘그’ 역시 ‘사실주의 작가’가 되기를 원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는 현실에 발 딛지 않은 이미지를 갈망한다. 말하자면 순수한 예술을. 그런 그에게 동물적인 인간으로 살기를 거부하는 처제와, 그녀에게 남아있는 파란 식물적 이미지의 결합은, ‘그’에게는 저항조차 하기 어려운 압도적인 이미지였을지도 모른다. 이제 ‘그’는 온 몸에 식물을 품고 있는 영혜와의 결합을 통해 작품 자체가 되고자 한다. 자신이 영상 속으로 들어가 거리를 없애버린 것이다


거리 좁히기는 앎이다. 그러나 앎은 위험하다. 그어진 경계 너머의 상대를 열망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앎은 격(格)을 파(破)하는 욕망적 행위이며 그래서 음란하다. 순수한 앎을 욕망할수록 그것은 관능적이다. 처제에게 ‘가도록’(113쪽) 만든 ‘그’의 욕망이 때로는 예술적으로, 때로는 성적으로 보이는 혼란을 일으키는 것은 어쩌면 필연적일지도 모른다. 그래서일까? 성서에 따르면 태초부터 앎은 금지되어 있었다. 앎은 죄가 되었다.

3. 타자에게 호명되기 위한 이름 - <나무불꽃>
세 번째 단편 「나무 불꽃」은 정신병원에 입원한 영혜를 바라보는 언니 인혜의 시점에서 서술된다. 인혜의 남편과 영혜 사이에 있었던 충격적인 사건 이후, 영혜는 외진 곳에 자리한 정신병원에 입원하고 인혜는 남편과 헤어진다. 영혜의 상태는 갈수록 심해지는데, 육식만을 거부하던 그녀는 이제 먹는 행위 자체를 멈춘다. “밥 같은 거 안 먹어도 돼. 살 수 있어. 햇빛만 있으면.”(186쪽) 그녀는 식물이라도 되려는 것일까?


「나무 불꽃」은 그런 영혜를 바라보는 언니 인혜의 시점에서 서술된다. 앞의 두 소설이 사건을 중심으로 한다면, 「나무 불꽃」은 언니 인혜의 회상, 독백, 생각 등을 중심으로 차분한 어조를 띤다. 또한 앞의 두 소설은 큰 따옴표(“”)를 사용해서 대화를 서술하는 반면, 독특하게도 「나무 불꽃」은 대화에 어떤 부호도 사용하지 않는다. 영혜와 인혜의 말을 구분하지 않는 것이다. 그 누구보다 성실하게 현실을 지켜온 인혜와, “진창의 삶을 남겨두고 경계 저편으로 건너간”(173쪽) 영혜가 마치 한 목소리를 가지기라도 한 듯 말이다. 이렇듯 독특한 작법을 통해 소설 속 인혜는 반복해서 묻는다. 자신은 영혜와 다른 걸까?

그와 영혜가 그렇게 경계를 뚫고 달려 나가지 않았다면, 모든 것을 모래산처럼 허물어뜨리지 않았다면, 무너졌을 사람은 바로 그녀였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다시 무너졌다면 돌아오지 못했으리라는 것을, 그렇다면, 오늘 영혜가 토한 피는 그녀의 가슴에서 터져 나왔어야   일까.”(220)

그들은 같은 존재다. 다른 이름을 가졌지만 그들은 같다. 어린 시절 ‘아버지’의 동물적 폭력을 받아내야 했던 존재라는 점에서, 이 세계가 내지르는 날카로움을 받아내야 하는 존재라는 점에서 그들은 같다. 『채식주의자』 전체를 통틀어 오직 그들에게만 부여된 이름은, 타자에게 호명되기 위한 것이다. 그들의 이름은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다. 아버지에게 호명될 때, 그들은 인혜와 영혜로 분리된다. 아버지의 폭력을 고스란히 받아야 하는 영혜와, 아버지의 매를 피하는 대신 그를 위해 밥상을 차려야 하는 인혜로 나뉜다. 이 세계의 날카로움을 인식하고 경계를 뚫고 달려 나간 영혜와 달리, 지독하리만치 충실하게 현실을 지킨 인혜는 철저히 타인(아버지, 남편, 아이)에게 자신의 무게를 중심을 둠으로써 자신을 지워버린다.

유리진열대가 그와 함께 무너져버릴  같다고 느꼈을 정도였다. …. 그날 이후 그녀가 그에게 바란 것은 자신의 힘으로 그를 쉬게 해주는 것이었다.”(160), “그의 말투, 그의 취향, 그의 미각과 잠자리에 자신을 맞추기 위해 그녀는 노력했다.”(193)

인혜는 정신병원에 갇혀 식물이 되려는 영혜에게서 분열된 자신을 본다. 지극히 평범한 삶을 사는 듯 보이는 인혜 역시, 경계 저편으로 가버린 영혜와 다르지 않다. 영혜는 날카로움에 저항하기 위해 일상 저편으로 넘어가버린 반면, 인혜는 멈칫거리며 현실에 남았을 뿐이다. 세상이 날카로운 그만큼 자신을 지워가면서 현실을 견디고 있을 뿐이다.

누구의 선택이 옳은 걸까. 우리는 인혜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그녀는 현실과 타협한 진부한 인물에 불과한 걸까. 소설에 어울리는 파국적 인물은 영혜이지만, 현실에서 가까이에 두고 보기에는 언제나 타인중심적인 인혜가 좋겠다고 여기는 건 아닐까. 그렇다면 평범한 그녀의 삶은 평범한가. 늘 타인에게만 초점을 맞추는데 익숙한 인혜는 착하고 믿음직한 사람인가. 알 수 없다. 소설은 어떤 윤리적인 판단도 내리지 않으며, 누군가를 교훈하지도 않는다. 다만 소설은 영혜의 가족도, 남편 ‘나’도, 영상작가인 ‘그’도 모두 떠나간 반면, 인혜만이 남았다고 말한다. 인혜만이 현실에 발 딛고 있으면서 영혜의 곁에 있다. 그녀만이 자신과 인혜 사이의 거리를 직면하고 있다. 이 이야기 전체를 떠받치는 것은 다름 아닌 인혜인지도 모른다.



서평15. 채식주의자/한강/창비/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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