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사건을 기다립니다

마태복음 11장 2-11절

by 방망이

곧 오실 주님의 평화가 여기 계신 모든 분들과, 멀리 흩어져 함께 걷고 계신 분들에게 함께 하시기를 간절히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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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림절 세 번째 주일입니다. 지난 대림절 2주 동안 말씀드린 내용을 짧게 정리해보면 이렇습니다. 우리는 무언가를 기다리고 기대하는 일을 피할 수 없습니다.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우리는 더 나은 삶, 더 좋은 관계, 더 살만한 세상 등이 오기를 기다립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어떻게 기다릴지가 중요하다는 말씀을 지난 2주 동안 길게 했습니다.

이제 얼마 후면 성탄절입니다. 우리는 오실 그리스도를 기다립니다. 다시 말하면 대림절은 우리 각자가 기다리고 기대하던 무엇을 향한 초점을, 그리스도에게로 옮기는 시간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몸소 하나님 나라를 땅에 실어 나르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직접 몸으로 실어 나르는 그리스도를 요한복음은 하나님 나라라는 말 대신 ‘빛’이라고 부릅니다. 그리스도는 누군가를 뒤덮고 있는 앞이 보이지 않는 어둠을 드러내고 그 어둠을 밝히는 빛입니다. 그리스도는 누군가를 둘러싼 희망 없음과 의미 없음, 곧 무의미와 절망에 대한 이의제기입니다. 그리스도는 오늘날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가 당연하다고 내미는 것들에 대한 반항이고, 작은 삶들을 낭떠러지로 내모는 큰 것들에 대한 저항입니다.

그러므로 대림절은 조정기간입니다. 우리가 기대하고 기다리던 게 무엇인지를 살펴보는 시간입니다. 우리가 바라던 것들이 다 이뤄지면, 또 다른 생지옥이 도래하는 건 아닌지 물어보는 겁니다. 내게 임한 하나님 나라가 누군가의 삶을 지옥으로 만든다면, 그거 정말 괜찮은 기대이고 소망인지를 곰곰이 따져보는 겁니다. 그렇게 묻고 또 물어가면서 우리 기대와 소망을 조정하고 옮기는 거, 그걸 성서는 ‘회개’라고 부릅니다. 이 기간에 우리는, 자신의 마음과 생각을 살피고 고치면서, ‘주여 오소서’라고 고백하며 준비합니다. 신앙이 그런 거라면, 그걸 헛되다고 저는 말하지 못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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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여기에 한 가지 오해가 끼어들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기다린다는 말에 대한 오해입니다. 재림이든 초림이든 그리스도를 기다린다고 할 때, 우리는 신적인 존재를 생각합니다. 세상 너머에서 구름타고 다시 올 한 인물을 기다리는 거죠. 이걸 좀 어려운 용어로 종말론이라고 하는데요. 일반적인 종말론에 따르면 이때는 두 가지만 하면 됩니다. 하나는 그때까지 자신의 신앙을 잘 지키는 일이고, 다른 하나는 종말 전까지 한 사람에게라도 더 복음을 전하면 됩니다. 종말론에 관해서는 복잡한 논의가 훨씬 많습니다만 그것을 전부 따져볼 여유는 없습니다. 하고 싶은 말은 이것입니다. 그런 기다림은 우리의 믿음과 시선을 세상 너머에서 짠! 하고 나타날 신적인 인물에게 집중하게 합니다. 머리가 길고 백인의 얼굴을 가진 한 인물을 기다리고, 그에게 집중하는 것을 신앙이라고 믿게 만든다는 겁니다. 조심스럽지만 굳이 말하자면, 예수라는 한 인물의 사생 팬이 되는 게 믿음이라고 착각하게 한다는 겁니다. 그렇게 하늘에서 한 인물이 내려오기를 기다리는 우리에게 천사들은 이렇게 물을지도 모릅니다. ‘왜 멍하니 서서 하늘만 쳐다보고 서 있느냐’고 말이죠. 또 예수님은 이렇게 말할지도 모릅니다. ‘너희가 복음을 알지 못하는 고로 오해 하였구나’라고 말입니다. 앞에서 언급한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신앙’이란 언제 올지 모르는, 한 인물을 하염없이 기다리는 걸 말하는 게 아닙니다. 오늘은 본문을 통해서 그 점을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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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은 지난주에 이어서 오늘도 세례 요한을 다룹니다. 하지만 지난주와는 상황이 전혀 다릅니다. 어쩐 일인지 요한은 광야가 아니라 감옥에 갇혀 있습니다. 기세등등하게 하나님 나라를 전하며 심판을 외치던 요한은 온데간데없고 어딘지 자신 없는 모습입니다. 대체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요한은 당시 최고 권력자중 한 사람인 헤롯에게 심하게 들이댔습니다. 자기 동생의 아내인 헤로디아와 정략결혼 한 헤롯을, 요한은 신랄하게 비판했습니다. 그걸 보다 못한 헤롯이 요한을 잡아들여 가두고 입을 틀어막은 겁니다.

한편 요한은 예수님을 주목했습니다. 자신이 직접 세례를 베풀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은 그의 신발 끈도 메지 못할 거라며 예수님을 높였으니까요. 자신은 고작 물로 세례를 주지만 그는 불로 세례를 줄 거라며 예수님의 메시야 됨을 확신하기도 했습니다. 요한복음에서는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이라며 자신이 직접 예수의 그리스도 됨을 공인해줍니다. 세례요한과 예수님, 이 두 인물의 만남은 확인과 확신으로 가득합니다.

덕분에 설교자들에게 요한은 최고의 모범입니다. 자신을 변두리로 밀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요한은 자신을 고작 ‘외치는 소리’에 비유하기도 하고, 감히 예수의 신발 끈도 어쩌지 못할 하찮은 존재로 말하기도 합니다. 그의 이런 태도는 예수에 대한 확신이 없으면 불가능할 겁니다. 그런 점에서 세례요한은, 예수님을 삶의 중심에 모신다는 게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최고의 예입니다. 그런 그를 설교자들이 좋아하지 않을 리가 없죠. 그런데 본문에서의 요한은 다릅니다. 2절과 3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2그런데 요한은,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들을 감옥에서 전해 듣고, 자기의 제자들을 예수께 보내어, 3물어 보게 하였다. "오실 그분이 당신이십니까?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

옥에 갇힌 요한은 제자들을 보내 예수의 정체성을 확인하게 합니다. ‘당신 맞느냐’는 겁니다. 그의 물음은 온통 불확실성으로 가득합니다. 확신은 회의와 의심으로 뒤바뀌어 있습니다. 앞에서 보았던 기세등등함은 한줌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위풍당당하게 하나님 나라를 선언했던 자신감은 어디로 숨은 걸까요. 신발 끈과 불의 세례를 말했던 단호함은 어디로 사라진 걸까요. 아니 애당초 요한은 뭐가 궁금해서 제자들을 보내 물었을까요. 이미 그의 확신은 불신과 회의에 침범 당했던 겁니다. 이제 우리는 그를 모범에서 탈락시켜야 할까요. 그에게 주었던 신뢰를 전부 걷어 들여야 하는 걸까요. 대체 요한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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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옥에 갇혔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하나님 나라를 전한 결과가 결국 감옥이라는 허탈한 현실이, 그를 불신이라는 수렁에 빠트렸는지도 모릅니다. 언제 풀려날지 모르는 암담한 현실이 그를 비관하게 만들었다 해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어쩌면 그는 자기 앞에 놓인 죽음을 예측했을지도 모릅니다. 제 생각에 요한은 성경에서 가장 비참한 죽음을 당한 인물로 세 손가락 안에 듭니다. 목이 잘려 쟁반에 올라간 그의 머리를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비참하지만, 더 안타까운 점은, 예수의 대답이 그가 기대하던 정답이 아니었을 것 같기 때문에 더 그렇습니다. 적어도 성경 안에서는 확신으로 시작해서 의혹으로 끝나버린 삶인지도 모르니까요.

예수님에게 세례를 베푼 이후, 요한은 그의 행보를 주목했을 겁니다. 확신했으니까요. 자신이 공언했으니까요. 그런데 자신의 생각과는 달랐던 겁니다. 요한은 예수님이 하나님이 약속한 메시야라고 믿었는데, 자기 예상과는 어긋났던 겁니다. 요한이 한 기대가 어떤 내용인지 분명히 알 수는 없지만, 적어도 자신의 기대와 인식에서 예수는 미끄러져 나갔던 겁니다. 우리 마음대로는 도무지 어쩌지 못하는 타인의 마음처럼 말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토록 불신에 찬 물음을 던졌을 리 없습니다. 그러니 죽음을 앞에 두고 확인하고 싶었던 건지도 모릅니다. 그거 하나만 알아도 그는 여한이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자기 소명을 다 이룬 것이니까요.

그러니, 자신이 기다리던 메시야인지 아닌지 알려달라는 겁니다. 더 기다려야 할 이가 있는지 없는지 확인 좀 해달라는 겁니다. 그런 요한의 애처로운 물음에 예수님은 이렇게 답합니다. 4절에서 5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4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가서, 너희가 듣고 것을 요한에게 알려라. 5 사람이 보고, 다리 저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 환자가 깨끗하게 되며, 듣지 못하는 사람이 들으며, 죽은 사람이 살아나며, 가난한 사람이 복음을 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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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대목부터 본문의 초점은 예수님에게로 옮겨집니다. 요한의 질문에 예수님은 직접적인 답을 해주지 않습니다. 그 대신에 이사야서의 유명한 구절을 인용합니다. 예수님이 자신의 소명을 드러낼 때마다, 다른 복음서에서도 공히 인용하는 유명한 구절입니다. 각 복음서마다 이 구절을 인용하는 방식이 조금씩 다르기는 하지만, 이 내용은 이사야서가 예언한 바로 그 메시야가 예수님이라는 걸 가리킨다고들 흔히 말합니다.

이사야서를 인용한 내용에 관해서는 나누지 않겠습니다. 오늘은 다른 부분에 태클을 걸어보려고 합니다. 흔히들 앞에서 인용한 이사야 구절이, 예수님이 자신을 메시야로 인정한 내용이라고들 확언합니다. 너희가 보면 알지 않느냐고, 이사야의 예언과 같지 않느냐고 돌려 말씀하신 내용이라는 겁니다. 그런 걸까요. 예수님은 정말 그렇게 자신이 메시야라고 말씀하신 걸까요. 자기가 바로 그 인물이라고 말입니다.

그렇다면, 왜 요한에게는 더 이상 기다릴 필요가 없다고 답하지 않은 걸까요. ‘자신이 바로 그’라고 딱 잘라 말하지 않은 걸까요. 예수님은 왜 자꾸 분명함에서 멀어지려는 걸까요. 다시 4절과 5절을 읽어봅시다.

“4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가서, 너희가 듣고 것을 요한에게 알려라. 5 사람이 보고, 다리 저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 환자가 깨끗하게 되며, 듣지 못하는 사람이 들으며, 죽은 사람이 살아나며, 가난한 사람이 복음을 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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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생각해보면 어떨까요. 메시야는 인물이 아니라 사건이라고 말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특정 장소가 아니라 땅에 도래한 다스림이듯, 메시야 역시 특정 인물이 아니라 사건이 아닐까요. 우리가 봐야 하고, 들어야 할 사건 말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특정 인물에 집착하지 않기를 바랐던 게 아닐까요. 신적인 인물에 우리의 믿음과 신앙이 갇히지 않기를 바랐던 게 아닐까요. 우리가 특정 메시야에게 집착하고, 하늘에 눈이 팔려서, 이 땅에서 보고 들어야 할 무엇을 놓치지 않기를 바랐던 게 아닐까요. 어쩌면 요한은 인물에 갇혀있던 게 아닐까요. ‘그’인지 ‘그’가 아닌지에 말입니다. 지금까지 교회는, 그리고 우리는 ‘그’라는 감옥에 갇혀 있던 게 아닐까요.

예수님은 사건을 말합니다. 눈을 뜨고, 걸으며, 병이 낫고, 살아나는 사건에 메시야가 있다고 말합니다. 그거 보라는 겁니다. 우리는 봐야하고 들어야 합니다. 얼마 전 드라마에서 보았던 수많은 ‘향미’들의 눈물이 그치는 사건을, 철탑과 톨게이트 위에서 불법을 행하면서라도 자신을 불쌍히 여겨달라고 외치는 이들이 땅에 내려오는 사건을, 일터와 학교와 집에서 내쫓긴 사람들이 돌아오는 사건을, 무엇보다 우리 자신이 하나님 나라에 대해 한 조각만큼 달라지는 사건을 보고 들어야 합니다.

우리가 기다려야 할 건 인물이 아니라 사건입니다. 그리스도이신 예수가 가득담긴 사건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기다리는 그것은 임박해 있습니다. 가까이에 있다는 거고, 우리 사이에 있다는 겁니다. 인물을 기다리며 임박한 사건을 밀쳐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오셔야 다 해결되지’라고 푸념만 하면 안 된다는 겁니다. ‘주여 오소서’라고 고백할 때, 우리는 예수가 가져온 그 사건이 우리에게도 오기를, 우리에게서 일어나기를 구하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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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걷는.]이 사건이기를 바랍니다. 말 그대로 '함께'하는 사건이고, 다소 느리더라도 '걷는' 사건이기를 바랍니다. 교회란 말은 그야말로 그리스도를 따르기로 작정한 사람들의 모임이라는 사건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라는 사건을 기다립니다. 교회는 늘 일어나야 하는 사건입니다.



2019년 12월 15일 [함께.걷는.교회.] 설교 전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