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1장 18-13
곧 오실 주님의 평화가 여기 계신 모든 분들과 멀리 흩어져 함께 걷고 있는 모든 분들에게 함께하기를 간절히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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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걷는교회’를 검색해보면, 우리와 같은 이름을 가진 교회가 꽤 나옵니다. 우리처럼 검색되지 않는 교회까지 생각한다면, 적어도 십여 개 넘는 ‘함께걷는교회’가 있는 것 같습니다. 교회 이름을 [함께.걷는.]으로 지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같은 이름을 가진 교회들이 꽤 있다는 게 괜히 싫어서 어떻게 차별 점을 둘 수 있을지 고민했습니다. 두 가지 방법을 선택했습니다. 하나는 우리를 함께.걷는.교회.으로 구별하는 방법이었고, 다른 하나는 [함께.걷는.]까지만 줄여서 일종의 별칭처럼 부르는 방법이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함께와 걷는과 교회를 하나로 묶어서 뿐만 아니라, 각 단어가 의미하는 바를 따로 숙고해야 할 필요가 생겼습니다. ‘함께’가 무엇인지를, 그것이 가당키나 한 말인지를 뒤늦게야 고민하게 됐다는 겁니다.
‘함께’란 말도 썩 산뜻하지는 않지만 그 단어를 조금 더 진부한 ‘관계’로 슬쩍 바꿔도 큰 문제는 없을 것 같습니다. 함께한다는 건 곧 누군가와 관계를 맺는다는 뜻이니까요. 흔히들 ‘관계가 가장 어렵다’고들 하는데요. 그 말을 ‘함께가 가장 어렵다’라고 다시 바꿔도 무방할 것 같습니다.
솔직히 저는 그 말이 싫습니다. 틀린 말이라서가 아닙니다. 힘들더라도 복잡하고 섬세하게 얘기해서 끄집어내야 할 것들을 한 마디로 뭉뚱그려버리기 때문입니다. ‘그건 원래 그래, 다 그런 거지 뭐’라는 식으로 말이죠. 저는 그런 게 싫습니다. 비윤리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뭉뚱그려버리면 발언되지 못하고 억눌린 말들과 파묻혀버릴 관계들이 여전히 남기 때문입니다. '목사는 원래 다 그런 거고, 가족은 원래 다 그런 거고, 남자는 혹은 여자는 원래 다 그런 거'라고 퉁 치고 그 관계를 내버려두면, 답답함과 억울함 같은 감정이 기권 혹은 포기라는 말과 더불어 누군가의 심정에 차곡차곡 쌓일 겁니다. 그렇게 누적된 관계는 지층처럼 굳어버릴 테고, 누적된 지층은 또 다시 누군가를 억누르거나 옥죄는 틀이 될 겁니다.
한편 혹자들은, 파묻힌 것들을 전부 드러낼 때, 금지된 판도라의 상자를 열어젖힐 때 맞이할 파국을 두려워하기도 합니다. 전부 다 드러내고 나면 뭘 보게 될지, 관계를 막 헤집고 나면 뭐가 남을지 알 수 없으니까요. 그 들이 갖는 두려움을 전부 모르는 체 할 수도 없습니다. 두려움은 때로 우리를 보호하기도 하니까요. 두려움은 우리를 구원하기도 합니다. 그것을 폭력으로 배설하지 않는다는 전제하에서 말입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요. 결국 ‘함께’가 가장 어려운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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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을 보겠습니다. 본문은 성탄절에나 어울릴 만한 내용입니다. 본문 첫 구절은 선언이라도 하듯, ‘예수 그리스도의 태어나심은 이러하다’고 말합니다. 전형적인 성탄절 본문이죠. 하지만 여러 차례 말씀드렸듯, 오늘은 대림절 넷째 주일입니다. 아직은 기다림의 절기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왜 교회력 본문은 우리를 예수님의 나심으로 안내할까요. 성탄절 당일에 모이기 어려운 사람들을 위한 배려일까요. 그럴지도 모릅니다. 그게 아니라면, 천사들과 요셉의 만남을 통해 임박한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모습을 보여주려는 건 아닐까요. 세례 요한에서 요셉으로 주목해야 할 인물이 바뀐 걸까요?
한 가지 짚고 갈 게 있습니다. 이 이야기에 관한 간단한 정보입니다. 우리에게 그토록 중요한 아기 예수의 나심은, 사복음서 중에서 두 복음서에서만 다룹니다. 마가복음과 요한복음은 아기 예수의 나심을 언급하지 않는 반면,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은 각자의 방식으로 그 이야기를 다룹니다. 어렸을 적 교회에서 보던 성극은 대체로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을 짬뽕한 것입니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은 아기 예수의 나심을 전혀 다른 방식으로 다루는데요. 이를테면, 마태복음은 요셉을 중심으로 이 이야기를 다루는 반면, 누가복음은 마리아를 중심으로 삼습니다. 두 복음서가 말하려는 내용은 겹치기도 하지만, 적잖은 차이를 보이기도 합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마리아를 중심으로 한 누가복음을 더 좋아합니다만, 작년에 이 자리에서 나누었기 때문에 오늘은 본문에만 충실하려고 합니다. 마태복음에만 집중하기에도 역량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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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에는 몇 가지 주목할 만한 내용이 있습니다. 이미 언급했듯 ‘왜 하필 요셉인가. 그를 의롭다고 칭찬하는 건 무슨 뜻인가.’ 하는 점이라든지, 마태복음이 이사야 7장을 자기 멋대로 인용한 방식에 관해서라든지, 아내 마리아와 요셉의 사회적 관계나 지위에 관해서라든지 등에 관한 내용이 그것입니다. 굳이 또 말하자면, 저는 마리아가 예수님을 임신하게 된 사건이 결코 축복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제 열두 살이나 열세 살에 불과 했을 거라고 추측되는 소녀가 혼인 전에 느닷없이 임신한 사건을, 대체 어떻게 축복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녀가 느꼈을 당황스러움과, 겪었을 난처함을, 한 눈에 받았을 의심과 비난 섞인 눈초리를 저는 상상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마리아의 임신을 은혜라고 말하고 싶다면, 그것이 결코 우리가 상상하듯 성스럽고 아름다운 축복일 수 없다는 점을 반드시 짚어야 합니다. 조금만 생각해보면, 이 이야기는 뿌리부터 우리를 뒤흔드는 내용이지만, 눈을 질끈 감고 오늘은 지나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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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에서 주목하려는 내용은 이제 곧 태어날 아기의 ‘이름’입니다. 본문은 여러 차례 이름을 언급하며, 거기에 무게를 둡니다. 21절부터 23절까지를 함께 읽겠습니다. 눈으로만 읽으실 분들은 소리를 내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21마리아가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 예수는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할 것이다." 하고 일러주었다. 22이 모든 일로써 주께서 예언자를 시켜, 23"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신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졌다. 임마누엘은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이다.”
곧 태어날 아기에게 두 가지 이름이 주어집니다. 하나는 우리가 잘 알다시피 예수라는, 당시에는 인간적이면서도 평범한 이름이고, 다른 하나는 이사야서가 예언한 임마누엘이라는, 신성함으로 둘러싸인 이름입니다. ‘예수’라는 이름은 우리에게 익숙하기도 하고 다소 평범하기도 하니, 우선은 임마누엘이라는 이름을 생각해 봅시다.
본문이 해석해주듯이, 임마누엘은 하나님이 자기 백성, 곧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뜻입니다. 곧 태어날 아기에게 그 이름을 부여한다는 건, 그가 곧 하나님의 함께하심이라는 선언일 겁니다. 비루한 자들에게서 곧 태어날 생명이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증거라는 겁니다.
임마누엘에 관한 이 이야기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무턱대고 좋아하는 내용입니다. ‘임마누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선언 그 자체로 따뜻하고 포근하니까요. 또한 누군가에게는 위로와 격려이기도 하고요. 그래서인지 혹자들은 지체 없이 ‘예수는 임마누엘’이라는 선언으로 달려갑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희망에 찬 선언으로 급하게 도약합니다. 오늘은 그러지 않으려고 합니다. 곧 태어날 아기와 임마누엘 사이를 느릿느릿 걸어보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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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이건 획기적인 기획이면서도 신성모독적인 발상입니다. 하나님은 닿을 수 없는 하늘에 계시니까요. 유대인들에게는 이름도 입에 담을 수 없는 존재가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름이 없죠. 그나마 인간의 편에서 준비한 하나님의 보좌가 언약궤였고, 그 언약궤를 받들어 모신 장소가 성전이었습니다. 언약궤는 아무나 만질 수조차 없는 무엇이었고, 몇몇 사람들 빼고는 접근조차 불가능했던 장소가 성전이었습니다. 그런 언약궤, 또는 성전이 임마누엘의 증거였던 건데, 본문은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증거가 몸이라고 선언합니다. 이제 태어날 생명이 임마누엘이라는 겁니다. 본문은 이름조차 부르지 못하던 존재에게 이름을 부여하고, 감히 그 이름을 호명하려고 합니다. 이런 얘기 우리에게나 뻔하고 익숙한 거지, 애당초 정신 나간 소리였을 겁니다. 복음이라는 게, 이제 곧 몸으로 태어날 하나님의 함께하심이라는 게 얼마나 엄청난 변혁이었을까요.
조금 더 나아가 봅시다. 본문이 말하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시는 증거가 뭔가요. 이제 곧 태어날 생명입니다. 힘없고 부서지기 쉬운, 그러나 호흡하는 한 생명입니다. 마음먹고 부러뜨리면 쉽게 부러질 연하디 연한 존재가, 타인에게 기대지 않고서는 얼마간도 살 수 없는, 그러나 숨을 내뱉고 들이쉬는 생명이 ‘신의 함께’라고 본문은 말합니다. 그게 또 복음인겁니다. 하늘이 아니라 땅에, 몸으로 올 뿐만 아니라 전적으로 도움이 필요한 존재로, 우리에게 오는 여린 존재가 ‘하나님의 함께’입니다. 그러니 애당초 세고 강한 거, 견고하고 완벽한 메시야 기다리는 기대 틀린 겁니다. ‘하나님의 함께’는 그렇게 도래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손쉬운 고백으로 돌아가 봅시다. 예수가 임마누엘이라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심이 곧 예수’라는 향수어린 선언을 생각해봅시다. 그때 말하는 ‘함께’란 뭘 말하는 걸까요. 그것은 우리의 머리를 쥐어뜯게 하는 ‘함께’보다 명증한 무엇일까요. 예수님은 우리와 어떻게 함께하실까요. 그것은 우리에게 어떻게 드러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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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함께’를 붙잡으려는 여러 시도가 있습니다. 신의 언어를 말하거나 신적 체험으로 ‘함께’를 드러내려는 노력을 끈덕지게 해왔습니다. 사실 저는 그 노력의 낙오자입니다. 예수님은 저와 함께하시지 않는 걸까요. 높이나 숫자 역시 신의 ‘함께’를 증명해 온 오래된 방식입니다. 생각해보면 우리는 질리지도 않고 그런 방식으로 ‘신의 함께’를 손에 쥐고 싶어 합니다. 꼭 그런 방법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분명히 하지 못해서 안달이 나 있습니다. '신의 함께는 이러이러 해야 하는 거 아니냐'고 말하기를 좋아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함께’가 무엇인지 우리는 여전히 알기 어렵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마태복음은 자신의 시작과 끝에서 똑같이 ‘함께’를 말합니다. 시작에서는 임마누엘을 말하고, 끝에서는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있으리라’고 말합니다. 저는 이 시작과 끝이 의도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소위 수미쌍관이죠. 그런데 끝에서 말하는 ‘함께’ 역시 이상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그거 예수님이 하늘로 올라가면서 다시 올 거라고 약속하면서 한 말씀인데, 올라가 놓고 ‘함께’를 말씀했으니까요. 그렇다면 적어도 우리가 흔히 생각하던 ‘함께’는 아닌 겁니다. 그렇다면 본문이 말하는 ‘함께’란 뭘까요. 21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21마리아가 아들을 낳을 것이니, 너는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
방금 읽은 21절과 임마누엘이 나오는 23절은 등식이 성립합니다.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할거니까 임마누엘인겁니다. 다시 말하면, 이제 곧 태어날 아기에게서 드러날 ‘하나님의 함께’는 백성들의 죄를 등에 집니다. 그럼 죄는 뭔가요. 그게 뭐기에 짊어 진다는 건가요? 이제 죄에 관해 조금만 생각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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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를 이렇게 풀어 이해해도 괜찮다면, 그것은 결핍이고 모자람입니다. 딱 그만큼이면 좋겠는데 그거 못하는 인간의 무엇입니다. 더하거나 덜한 거고, 답답할 만큼 느리거나 독단적으로 빠른 겁니다. 가장 좋은 만큼이지 못하고 많거나 적은 겁니다. ‘죄가 겨우 그거라고?’라며 반문 할지도 모르지만, 고작 그것 때문에 우리는 서로를 불편해하고, 불편하게 만드니까요. 딱 그만큼이지 못해서, 지나치거나 덜해서 미움을 주고 또 미움을 얻고 괴로우니까요. 세상 누구도, 누구에게도 필요한 만큼만 맞출 수가 없으니까요. 숙명처럼 피할 수가 없으니까요. 옆 사람과 도무지 딱 들어맞지를 않으니까요. 그런 점에서 아리스토텔레스라는 어마 무시한 고대 철학자가 중용을 최고의 덕이라고 말했던 건 결코 우연이 아닐 겁니다. 중용이 아닌 상태를 교회 용어로는 ‘연약함’이라고도 해왔습니다. 사실상 그것은 죄를 좀 다듬은 표현이죠. 그러므로 이런 이해는 결코 죄에 관해 '고작'이 아닙니다. 존재적으로 우리는 그렇고, 소멸하기 전까지는 늘 그럴 테니까요. 인간의 그런 모자람, 혹은 지나침을 성경은 죄라고 명명합니다. 결국 죄는 관계적입니다. 그런데 그걸 예수라 이름 하는 자가 짊어 진다는 겁니다. 이제 예수라는 이름을 생각해봐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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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은 두 가지 이름을 말합니다. 21절은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라고 말하고 23절은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하라’고 말합니다. 두 이름을 왜 한꺼번에 주었을까요. 임마누엘에 관해서는 앞서 언급했으니 이제 예수라는 이름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예수라는 이름의 뜻은 구원입니다. 예수님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이름이지만, 사실 그건 평범한 이름입니다. 일단 구약에 그 이름으로 살았던 인물들이 있습니다. 여호수아와 호세야가 대표적인데요. 두 사람의 이름 모두 구원이라는 뜻입니다. 두 이름을 헬라어로 발음하면 예수인거죠. 구약뿐만 아닙니다. 신약에는 바예수라는 인물도 나오는데요. 예수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그것 말고도 예수라는 이름은 여기저기서 자주 나타납니다. 82년도에 김지영이 가장 많았듯, 예수님 말고도 예수라는 이름을 흔하게 썼던 겁니다. 이름을 미리 쓴 사람이 있다는 게 꼭 나쁜 건 아니지만, 그래도 임마누엘로써 썩 유쾌한 상황은 아니죠. 아니 그 이전에, 요셉에게 현몽한 천사들은 별로 대단치도 않은 이름을 왜 특별하다는 듯이 주었을까요.
‘하나님의 함께’를 드러내기에 가장 적절한 이름이었기 때문입니다. 임마누엘이 이루어지기에 가장 적절한 이름이 흔해빠진 ‘예수’였기 때문입니다. 평범하고 뻔한 이름이 다른 이들의 모자름과 결핍을 짊어지는 ‘함께’할 단 하나의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가장 신성한 이름은 가장 평범한 이름과 만나야 했습니다. 그는 임마누엘이며, 예수입니다. 그는 더하고 덜함 안에서 하나님의 함께입니다. 그는 결핍과 과도함안에서 즉 죄 안에서 임마누엘을 드러냅니다. 그는 예수라는 이름안에서 타인의 덜함과 더함을 등에 지는 임마누엘입니다. 그게 하나님의 함께이고, 그것은 우리의 ‘함께’와 다르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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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우리의 ‘함께’로 돌아와야겠습니다. 더하거나 덜하고, 빠르거나 느린 우리로 말입니다. 공교롭게도 ‘함께’가 가능한 이유는, 그것이 불가능한 까닭과 같습니다. 우리는 서로의 죄를 짊어지고 임마누엘 하는 겁니다. 82년생 김지영이 그 평범하고 흔한 이름 속에서, 다른 여성의 목소리를 고통스럽게 대신하고 그 안에서 연대하듯 말입니다.
성탄을 눈앞에 두고 우리가 기다리는 임마누엘은, 하나님의 ‘함께’는 어떤 모습인가요. 그것은 세거나 완벽하거나 견고한 메시야가 아닙니다. 장담컨대 그는 함께하지 못할 겁니다. ‘함께’를 필요로 하는 존재가 아니니까요. 우리가 기다리는 임마누엘은 도움을 필요로 하는, 그러면서도 숨을 내뱉고 들이쉬는 여리디 여린 생명입니다. 결핍 덩어리인 그를 우리는 도울 것이지만, 그는 우리의 짐을 질 것입니다. 그는 임마누엘이며, 예수입니다.
2019년 12월 22일 [함께.걷는.교회.] 설교 전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