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방망이 Dec 20. 2019

노인이 묻는다. 노인에게 묻는다.

<노인과 바다>, 어니스트 헤밍웨이

살다 보면 묻게 된다. 잘 살아보려고 분투할수록, 정직하게 삶을 마주하려고 할수록 피할 수 없다. 우리는 묻는다. 과연 생은 의미 있는가.

거창해도 어쩔 수 없다. 한번 시작된 물음은 질문자를 끝없이 괴롭히고, 의미와 무의미 사이를 갈팡질팡 하게 만든다. 때로는 의미로, 때로는 무의미로 저울은 기운다. 생은 계속 그렇게 흔들린다.

신화 시시포스 이야기는 인생을 신에게 받은 형벌이라고 말한다. 인생은 무한히 굴러 떨어지는 무거운 바위를 끊임없이 밀어 올려야 하는 고단하고 무거운 반복일 뿐이다. 무의미하며, 허무하다. 생은 축복이 아니다.

혹자는 소설 『노인과 바다』를 시시포스 이야기로 읽는다고 한다. 3일간의 사투 끝에 잡은 큰 물고기를 상어들에게 빼앗기고, 빈손으로 돌아와 다음 낚시를 준비하는 노인의 모습은 그야말로 헛헛하다. 노인을 사랑하는 소년은 그런 노인을 보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린다.
  
소설 『노인과 바다』를 만나는 데 37년이 걸렸다. 1952년에 태어난 『노인과 바다』는 놀랍게도 '늙지' 않았다. 소설 속 주인공처럼 생생하고 젊다. 자꾸 눈길을 빼앗는 이성처럼 매력적이다.

제목만 보면 평온한 바다와 한가로운 뱃사공이 떠오르겠지만 그것은 오해다. 소설은 역동한다. 소설 속 바다는 잔잔하지만, 이야기는 파도처럼 넘실거린다. 강인하다. 그러면서도 아름답다. 시 같은 소설이고, 소설을 가장한 시다.

"노인은 소년에게 낚시하는 법을 가르쳤고, 소년은 그를 사랑했다."

소설 『노인과 바다』는 보물상자다. 소설 안에는 탐나는 보물이 가득하다. 하나를 집어 들면 다른 보물이 탐나고, 그것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다시 그 옆의 보석이 빛난다. 37년 만에 만난 소설 『노인과 바다』는 오색찬란하다. 소설은 낚시에 관한 해박한 지식을 바탕으로 한다. 작가 어니스트 헤밍웨이는 실제로 낚시를 즐겼다고 한다. 그는 이 소설로 노벨상을 받는다.

노인은 늙었다. 죽음에 가깝다. 무력하고 연약하며 패색이 짙다. 소설 시작과 끝에 등장하는 소년 역시 그렇다. 소년은 노인을 사랑하지만 그 역시 어리고 작다. 그런 그들을 소설은 주인공으로 삼는다. 이야기는 바다 위를 무대로 한다. 무려 84일 동안 물고기를 잡지 못한 노인이 홀로 먼바다로 나간다. 먼바다에서 노인은 지금까지 만난 적이 없는 거대한 물고기를 만나고, 3일간의 사투 끝에 물고기를 잡는 데 성공한다. 그러나 육지로 돌아오는 길에 만난 상어들과 다시 사투를 벌이고, 결국 큰 물고기의 뼈만을 남긴 채 집으로 돌아온다. 집으로 돌아온 노인은 여느 때처럼 소년과 다음 낚시를 준비한다.

소설은 중편임에도 이야깃거리가 넘친다. '왜 하필 노인인가(왜 하필 소년인가)'의 문제로 시작해 무궁무진하다. '고통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 '큰 물고기로 대표되는 자연은 노인에게 무슨 의미인가' 등 끝없는 물음을 독자에게 던진다.

육지가 보이지 않는, 하늘과 바다 사이에 선 노인은 혼자다. 그는 지금까지 본 적 없는 큰 물고기를 마주한다. 그 거대함 앞에 인간은 무력한가? 노인은 말한다.

"인간은 패배하기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니야. ... 인간은 파괴될 수는 있지만 패배하지는 않는 거야."

하지만 소설은 인간의 위대함을 무작정 찬양하지 않는다. 생을 가볍게 낙관하지 않는다. 저자는 갈등한다. 노인은 육지를 대표하는 사자 꿈을 꾸고, 위대한 야구선수 디마지오를 말하지만, 때로는 낚시 줄에 앉은 작은 새를 보며 연약한 자기 존재를 위로한다. 연약함과 위대함 사이에서 노인은 갈등하고 투쟁한다.

노인에게 자연은 대상이 아니다. 노인은 세계의 일부다. 생을 걸고 싸우는 큰 물고기는 수단이 아니라 친구다. 생계를 위해 물고기를 잡으려고 하지만, 착취나 소비의 대상이 아니다. 노인은 거대한 그림 속에서 작은 일부다. 태양과 바다가 있고, 크고 작은 새와 물고기가 있다. 그리고 한 인간이 있을 뿐이다. 인간은 모든 것을 허락받은 정의가 아니다. 노인은 오히려 묻는다. 생을 운에 맡겨버리는 인간이, 먼바다로 나갈 용기가 없는 인간이 위대한 친구(큰 물고기)를 먹을 자격이 있는가? 생계를 위해 위대한 친구를 죽여야만 하는 인간의 행위는 죄인가.

질문 하나가 남았다. 물고기를 잡지 못한 날이 87일로 늘어버린 노인의 사투는 무의미한가? 노인은 패배자인가. 물고기와의 사투가 자기 자체가 되어버린 삶은 허무한가. 성실하게 다음 낚시를 준비하는 노인의 모습은 부질없는가. 지쳐 잠들어 사자 꿈을 꾸는 노인의 생은 충분히 묵직하며, 의미로 충만하지 않은가.

 위에 있는 노인의 오두막에서, 노인은 다시 잠들어 있었다. 그는 여전히 엎드린  자고 있었고 소년이  옆에 앉아 그를 보살피고 있었다. 노인은 사자 꿈을 꾸고 있었다.”


서평1. 어니스트 헤밍웨이/노인과 바다/열린책들/1952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