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방망이 Dec 20. 2019

죄와의 친밀

<주홍글자>, 너대니얼 호손

죄와 인간을 나눌 수 있는가. 도구를 통해 물질A와 물질B를 완전히 나누듯 인간에게서 죄를 분리할 수 있는가. 죄와 분리된 인간을 우리는 아는가. ‘모든 인간은 죄인’이라는 통속적인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 죄에서 자유로운 의인이 되어야 한다는 기독교 교리를 말하려는 것은 더욱 아니다. 성서를 빌자면 신의 금기를 어긴 일은 사실상 인간의 실존을 알리는 서문이다. 죄와 인간의 실존은 뗄레야 땔 수 없다. '죄'는 언제나 훌륭한 문학적 주제다. 소설 『주홍글자』는 인간과 죄의 관계를 풍부한 상상력으로 접근한다.

소설 『주홍글자』는 죄를 뜻하는 ‘A’를 가슴에 품고 살게 된 헤스터의 이야기를 다룬다. 한 여인이 아기를 품에 안은 채 처형대 위에 서 있는 장면으로 소설은 시작한다. 온 마을은 그녀를 비난하고 경멸한다. 그녀가 안고 있는 아기가 남편과 낳은 생명이 아니기 때문이다. 남편은 수년째 소식이 없다. 헤스터는 아기의 아빠가 누군지를 밝히지 않는다. 경멸과 수치는 오롯이 그녀의 몫이다. 헤스터는 주홍색 글자 'A'를 가슴에 단 채로 살아가야 한다. 죄의 낙인, 그것이 그녀가 받은 형벌이다. 소설은 헤스터를 중심으로 원래 남편이자 의사인 칠링워스, 결국 아기의 아빠로 드러날 존경받는 목사 딤스데일, 그리고 간음의 결과로 낳은 헤스터의 딸 펄, 이렇게 네 사람의 이야기를 긴박하고 치밀하게 다룬다.

작가 너대니얼 호손은 1804에 미국에서 태어났다. 그의 선조는 원주민 핍박, 마녀사냥 등을 통해 초기 청교도의 터를 다졌다. 선조가 저지른 악행에 대한 부채의식이 호손의 작품에도 영향을 미친다. 주로 단편소설을 집필하던 호손은 1850년 중장편 소설 『주홍글자』를 세상에 내놓는다.


소설은 초기 청교도 사회를 배경으로 한다. 청교도를 향한 작가의 시선은 다소 비판적이다. 영국에서 온 이주민들은 유토피아를 꿈꾸며 마을을 건설하지만 그들의 세계는 양면성을 띤다. 마을은 원주민 박해를 바탕으로 세워졌으며, 마을 중앙에 자리한 교회는 처형장과 함께 한다. 죄와 이상이 공존한다. 마을은 청교도적 인간만이 유일한 답인 듯 그 외 모든 인간성을 제한하고 억누른다. 그 외의 것은 발디딜 수 없다. 다른 인간은 이단이며 마녀이다. 그들의 세계는 유토피아가 아니라 닫힌 세계일 뿐이다.

헤스터는 간음을 했다는 이유로 가슴에 A를 붙인 채 살아간다. 모두가 그녀를 비난하고 혐오한다. 마을 모두에게 그녀는 타자화된 죄다. 마치 십자가처럼. 헤스터는 마을 모두의 죄를 자신의 몸에 지고 살아간다.

A가 반경 2-3미터 접근금지 표시라도 되는 듯, 헤스터 주변은 늘 진공상태가 된다. 그녀는 마을 안에 살지만, 사람들의 바깥에 있다. A는 그녀를 격리한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사람들과의 거리가 헤스터를 바꾼다. 내몰린 바깥에서 그녀는,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시선으로 마을을 본다. 자기만의 공간에서 그녀는 "사색"한다. 사색하는 헤스터는 청교도를 넘어선 인간을 바라본다. 마을을 둘러싼 미지의 숲을, 청교도와는 정반대인 해적들이 득실거리는 바다를 상상한다. 주홍글자A는 청교도 너머로 헤스터를 이끈다. 그녀를 해방시킨다. 이제 A는 죄에만 머물지 않는다. A는 able로, 또 angel로 바뀐다.

죄의 평범성을 외면하는 일은 변화를 불가능하게 한다. 주홍글자를 똑같이 품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자신에게서 분리하려 하거나, 타자화하는 사람은 더욱 자신을 속박하고 옭아맬 것이다. 가슴의 A를 고통스러워 하면서도 그것이 자신의 것임을 인정하는 사람만이 걸음을 내딛는다. 우리는 죄를 죽이거나 떼어낼 수 없다. 이 점에서 '죄 죽이기'는 틀렸다.

끝으로 꼭 덧붙이고 싶은 점이 있다. 주인공 헤스터가 여성이라는 점이다. 소설은 당시 시대가 결정한 여성상을 다룬다. 이제 곧 갸름해지고, 창백해 질 청교도적 여성상을 지적한다. 헤스터 역시 이렇게 말한다. 통째로 옮긴다.

"그뿐 아니라 여성이라는 종족에 대해서도 그와 같은 암울한 의문이 그녀의 마음에 떠오르곤 했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여자라 해도, 과연 여성으로서의 삶을 받아들일 가치가 있는 것일까? 헤스터 자신의 삶과 관련해서는  오래전에 그렇지 않다는 결론을 내리고서  이상 문제 삼지 않았다. 남자도 그렇지만 사색을 하는 여자는 말수가 적어지기도  뿐더러 서글퍼지기도 한다. 아마도 그녀는 자신 앞에 전혀 가망 없는 일이 놓여있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모른다. 우선은 사회  구조가 뒤집히고 새로 건설되어야 한다. 그런 다음 여성이 공평하고 적절하다고  만한 지위를 떠맡을  있기 위해서는, 남성의 천성 자체나 대대로 전해 내려오면서 천성에 가까워진 습성이 본질적으로 수정되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다른 모든 난관을 제거했더라도 여성 스스로가 훨씬 크게 변모하지 않는다면 이런 앞선 개혁들을 이용할  없을 것이다. 그런 상태에서는 여성의 가장 진실한 삶을 찾아볼  있는 영적 정수가 증발해 버리고 없을지 모른다."

170년이 지난 오늘 우리는 헤스터에게 뭐라고 변명해야 할까. 페미니즘으로 읽기에도 소설은 부족함이 없다. 문제는 오늘도 유효하기 때문이다.



서평2. 너대니얼 호손/주홍글자/열린책들/2012

작가의 이전글 노인이 묻는다. 노인에게 묻는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