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누가복음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방망이 Dec 25. 2019

우리를 기억해 주십시오

누가복음 23장 33-43절

좋으신 하나님의 평화가 여기에 계신 모든 분들과 멀리 흩어져 함께 걷고 있는 모든 분들에게 함께 하기를 간절히 빕니다.

()

[함께.걷는.]을 시작하기 전에 교회탐방을 다닌 적이 있습니다. 탐방을 다닐 때 한 가지 생각한 것이 있는데요. 저에게 익한 형태의 교회들 보다는, 다소 낯설더라도 그 교회만의 정신이 그곳만의 예배에 잘 스며든 곳에 가봐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당시 탐방했던 교회 중 하나가 향린교회였습니다.

그 해의 마지막 주일에 OO님과 함께 갔던 걸로 기억하는데요. 교회 입구에 걸린 현수막부터 시작해서 모든 예배 순서 하나하나, 인상 깊지 않은 게 없는 교회였습니다. 그 중에서도 특히 기억에 남는 순서가 있었는데요. 그 해 명을 죽음을 맞이한 성도들을 기억하는 시간과, 남은 가족을 위로하는 순서가 그 해 마지막 주일 예배에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시간이 많이 지나서 뭘 어떻게 했는지 정확하게 기억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떠올려 보자면, 예배 집례자가 그 해 소천한 성도의 이름을 한 사람씩 천천히 호명했고, 남은 가족들은 앞으로 나가 초에 불을 밝혔던 것 같습니다.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당시에는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한 해 마지막 주일이면 다른 교회들은 하나같이 ‘지금까지 지내온 것’을 부르며 획일적인 감사를 말하고 있을 텐데, 이곳은 죽음을 마주하고 큰 슬픔을 당한 성도들을 위로 하는구나’ 그것만으로도 향린 교회는 제게 좋은 교회로 각인 되었습니다. 덧붙이자면 제가 생각하는 형식이란 그런 겁니다. 겉멋이 아니라 태도이고 마음이고 생각을 새겨 넣는 몸입니다. 돌아와서, 교회 공동체가 한 해의 마지막 날 죽음을 기억한다는 건 무슨 뜻일까요.   

()

교회력으로 오늘은 ‘왕이신 그리스도 주일’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습니다. ‘성령강림절 후 몇 째 주일’만 몇 달째 보내오다가, 오랜만에 다른 이름이 붙은 날입니다. 단순하게 말하면 ‘왕이신 그리스도 주일’은 교회력 마지막 주일입니다. 양력에 익숙한 우리에게는 잘 와닿지 않겠지만, 교회력으로는 한 해를 마감하는 특별한 주일이라는 겁니다.

제가 늘 도움을 얻고 있는 설교 자료실에서 배운 내용에 따르면, 과거 독일 루터교회에서는 이 날을 ‘영원의 날’ 또는 ‘죽은 자들의 날’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그 날이 되면 향린교회처럼, 소천한 성도들의 이름을 한 사람씩 불러 기억하고, 영원한 안식을 빌어주는 시간을 가졌다고 합니다. 교회력의 마지막 날을 ‘죽은 자들의 날’이라고 이름 붙였다는 건 여러 궁금증을 갖게 합니다. 날짜는 다르지만, 향린교회는 한 해를 끝마치는 예배에서, 독일 루터교회는 교회력의 마지막 주일에 죽은 성도들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아마도 비슷한 의미가 있지 않았을까요.  

1년이라는 긴 시간의 끝에 일부러 죽음을 기억하는 이상한 예배만큼, 오늘 본문도 우리를 당혹스럽게 합니다. 분명 이름은 ‘왕이신 그리스도 주일’인데, 내용은 고난주간에나 적절해보이기 때문입니다. 저 역시도 교회력 제목을 보고, ‘나귀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예수님’이 나오는 본문을 예상했습니다만 보기 좋게 틀려서 잠시 당황했습니다. 오늘 본문을 우리는 어떻게 읽을 수 있을까요.   

()

본문은, 왕은 왕인데 조롱당하는 왕을 다룹니다. 흔히 예상하거나 기대하는 것처럼 피 칠갑된 예수를 그리거나, 끔찍한 고통에 주목하지 않고 모욕과 조롱에 초점을 맞춥니다. 본문은 현장에 있던 다양한 사람들이 어떻게 예수를 비웃고 조롱했는지를 그립니다. 35절에서 39절까지를 함께 읽겠습니다.

"35백성은 서서 바라보고 있었고, 지도자들은 비웃으며 말하였다. " 자가 남을 구원하였으니, 정말 그가 택하심을 받은 분이라면, 자기나 구원하라지." 36병정들도 예수를 조롱하였는데, 그들은 가까이 가서, 그에게  포도주를 들이대면서, 37말하였다. "네가 유대인의 왕이라면, 너나 구원하여 보아라." 38예수의 머리 위에는 "이는 유대인의 왕이다" 이렇게  죄패가 붙어 있었다. 39예수와 함께 달려 있는 죄수 가운데 하나도 그를 모독하며 말하였다. "너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여라."

많은 내용과 장면들이 섞여 있지만 사실상 조롱은 한 곳으로 향합니다. ‘네가 정말 왕이라면, 너 자신이나 구원하라’는 겁니다. 지도자들과, 군인들, 예수님과 함께 못 박힌 사람까지, 그들은 한 목소리로 예수를 모욕합니다. 한 마음 한 뜻으로 그리스도를 비웃습니다. 실패한 메시야, 자신도 신변도 어쩌지 못하는 왕이 오늘 본문의 주제입니다. 이런 왕, 여러분들은 괜찮으시겠습니까. 분명한 것은 이겁니다. 예수님은, 적어도 그들이 원하고 기다렸던 왕은 아니었습니다.

()

우리는 예수님을 왕이라고 즐겨 부릅니다. 예로부터 지금까지 수많은 찬양이 예수를 왕으로 고백해 왔습니다. 찬양을 좋아하는 분이라면, 어느 정도까지는 예수를 왕으로 고백하는 찬양 말하기 게임을 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별로 재미는 없겠지만요. 그런데 요즘 그런 생각을 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정말 왕이라고 생각했을까요. 복음서 전체를 통틀어 그는 한 번이라도 자신을 왕으로 인정한 적이 있기는 할까요.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고 묻는 빌라도의 심문에, ‘네가 그렇게 말했다’고 예수님은 답하지만, 그걸 ‘그렇다’는 응답이라고 보기는 어렵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제가 알기로 예수님은 자신을 왕으로 긍정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습니다.

더 나아가 그런 생각도 해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좋은 왕’으로 고백하고 선포하는 일에 망설임이 없습니다만, ‘좋은 왕’이란 말은 애당초 모순이 아닐까요. ‘좋은, 선한’ 등의 꾸미는 말과 왕은 잘 어울릴까요. 우리는 왕을 원하는 건가요. 저는 원하지 않습니다. ‘좋은 왕’이라는 말은 언어도단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건 동그란 네모, 네모난 세모 같은 표현입니다. 왕정은 하나님 나라를 담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자신에게 붙은 왕이라는 별칭을 흡족해하실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것은 네 말이다.’라고 돌려주지는 않으실까요. 물론 왕이라는 호칭을, 다스림을 뜻하는 상징으로 읽을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고백하면 할수록 그의 다스림과 점점 멀어져 가는 교회를 자꾸만 목격하게 됩니다. 완벽한 왕을 보좌에 앉히는 게 우리의 욕망이겠으나, 예수는 우리의 기대에서 자꾸만 미끄러져 갑니다.  

그는 거기에 없습니다. 안타깝지만, 뜨겁고 열광적이었던 우리의 노래가 향하는 방향에 그는 없습니다. ‘당신은 왕이라야 한다.’는 욕망 가득한 시선이 향하는 자리에 그는 애당초 자리할 생각이 없었는지도 모릅니다. 그곳엔 ‘십자가에서 내려와라, 내려와서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는 기대만 가득했을지도 모릅니다. 완벽한 왕이 아니라면, 우리는 언제나 그를 내다버릴 준비가 되어있는지도 모릅니다. 무력하고 무능력한 예수를 따른다는 게 대체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우리는 말할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어떤 그리스도를 우리는 기대할 수 있을까요. 우리가 예상했던 그곳이 아니라면, 그는 어디에 있는 걸까요. 그게 무슨 소용이 있는 걸까요.  

()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 봅시다. 본문에는 다른 복음서에는 없는 독특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예수님이 달린 십자가 양쪽에 함께 매달린 두 죄인에 관한 내용입니다. 이 이야기 자체가 특이해서 두 사람을 비교하는 방식으로 본문을 읽을 수도 있겠습니다만, ‘나와 당신을 구원하라’며 예수님을 비웃는 사람은 조롱이라는 맥락에서 다른 사람들과 매한가지입니다. 조롱1,2,3 중 3번입니다. 그에 관해 할 얘기가 없는 건 아니지만, 넘어가겠습니다.   

이 이야기의 초점은 반대편 사람에게 있습니다. 그는 비웃음과 조롱으로 가득한 공기를 바꿉니다. 40절에서 42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40그러나 다른 하나는 그를 꾸짖으며 말하였다. "똑같은 처형을 받고 있는 주제에, 너는 하나님이 두렵지도 않으냐? 41우리야 우리가 저지른  때문에 그에 마땅한 벌을 받고 있으니 당연하지만, 이분은 아무것도 잘못한 일이 없다." 그리고 나서 그는 예수께 말하였다. 42"예수님, 주님이 주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에, 나를 기억해 주십시오."

그는 십자가에서 예수님을 조롱하는 다른 죄인을 책망합니다. ‘똑같은 처형을 받고 있는 주제에’라고 말하며 저쪽 사람을 책망하면서도, 마찬가지 처형을 받고 있는 예수에게 그는 자신을 기억해 달라고 말하며 그를 높입니다. 뭘까요 이거. 모두가 조롱할 때, 그 사람만 예수를 높입니다. 무력하고 무능력한 예수가 정답임을 그는 알고 있습니다. 느닷없지만 그는 분명 ‘정답’을 말했다는 사실을 우리는 눈치로 압니다. 그는 어떻게 정답을 알았을까요. 계시가 임했는지, 직관으로 알았는지 알 도리는 없습니다. 그가 어떻게 정답을 알았는지 맞힐 재간은 제게 없습니다. 그렇다면 질문을 조금만 바꿔보겠습니다. 본문은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걸까요.  

()

지난 주 저는 ‘종말’에 관해 말했습니다. 끝에 서서 이미 종말을 사는 사람들과, 그 끝에 함께 서기로 마음먹은 사람들에 관해서 나누려고 했습니다. 죽음을 무릅쓰면서도, 누구의 머리카락도 다치지 않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에 대해서도 나누려고 했습니다. 끝을 살고 있는 사람들을 잊지 말자는 얘기였습니다. 종말을 믿는다는 건, 종말에 걸친 삶이 있다는 걸 믿는 거라고 말했습니다.

반면, 종말을 말하면서도, 자기 목숨만을 부지하려는 건 종말 신앙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거라고도 말했습니다. 자기만 살려고 애쓰는 건, 결국 누군가를 끝으로 몰아세우게 될 거라는 이야기도 했습니다. 종말을 말하지만, 그것을 믿지 않으면서, 누군가를 끝으로 몰아세우는 삶은 얼마나 끔찍한가요. 반면 끝을 잊지 않으면서도, 함께 끝에 서기로 마음먹으면서도, 누구의 머리카락도 간절히 상하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는 것, 그게 종말 신앙이라는 이야기를 지난주에 했습니다. 혹시 궁금하시다면, 지난주 내용을 꼭 읽어보셨으면 좋겠습니다.

지난주 내용이 예수님의 ‘말’이었다면, 오늘 본문은 예수님이 그 끝에 선 이야기입니다. 지난주가 예언이었다면, 오늘은 실현입니다. 그 끝에 함께 선 예수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은 보좌가 아니라, 끝에 함께 있습니다. 끝에서 그는 누구의 머리카락도 상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러므로 자신을 잊지 말아달라는 한 죄인의 기도는 그야말로 적절합니다. 본문은 우리가 그렇게 하기를 바라는 게 아닐까요.

‘네가 예견하던 곳에 예수가 없다고 해서 그를 없다고 말아라. 그는 끝에 있다. 그는 자신의 구원을 위해 내려오지 않을 거다. 연금 때문에 누군가를 몰아넣지도 않을 거고, 자기 안위 때문에 누군가를 끝에 서게 하지도 않을 거다. 그는 조롱당하는 자리에 있다. 무력한 곳에 있다. 끝에 있다. 그를 찾아서 그와 함께 너도 거기에 서라. 예수와 함께 누구의 머리카락도 상하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고, 그렇게 끝에 선 너를 잊지 말라고 요구해라.’라고 말입니다.

()

아시는 분도 있고, 모르시는 분도 있겠지만 한때 우리는 보냄의 노래로 ‘주여 주 예수여’라는 곡을 불렀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정답을 말한 사람이 예수님에게 한 요청에 곡을 붙인 노래죠. ‘주여 주 예수여 저를 기억해주소서. 주여 주 예수여 당신 나라 임하실 때’라는 짧은 가사가 붙은 떼제 곡입니다.

처음 그 노래를 보냄의 노래로 불렀을 때, 저에게 장례식 때나 불러야 하는 거 아니냐고 묻는 분이 계셨지만,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여기서 끝을 배울 때, 그 끝에 함께 서기로 작정하고 걸어 나갈 때, 우리는 구하는 겁니다. 우리를 잊지 말아주십시오. 기억해주십시오. 끝에 선 사람들의 머리카락을 상하지 않게 해주십시오. 라고 말입니다.  

()

제가 좋아하던 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이 끝났습니다. 끝부분은 이런저런 이유로 많이 아쉬웠는데요. 그럼에도 얘기 거리가 많은 좋은 드라마라고 생각합니다. 개인적으로 최고의 장면 하나를 고르라고 한다면, ‘나를 잊지 말아요’라는 손담비의 대사가 나오는 장면이라고 생각하는데요. 드라마를 모르시는 분들이 계실 것 같아서 설교 최초로 드라마 영상을 한 번 준비해 봤습니다.

(동백꽃 필 무렵 영상)

https://m.youtube.com/watch?v=iT0We1ZfV3I


장면을 설명하고 싶은데 망칠 것 같아서 참겠습니다. 끝을 살던 향미의 인생과 ‘나를 잊지 말라’는 저 말 때문에, 저와 비슷한 생각을 하는 많은 사람들이 향미를 중심으로 드라마를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사실 드라마 속에서 향미는 살해를 당했는데요, 저 장면을 기억하던 팬들은 드라마 끝까지 향미가 살아있기를 바랬습니다. 그의 머리카락도 상하지 않기를 바라며 말이죠. 향미가 끝을 사는 많은 이들을 떠오르게 했기 때문입니다.

이 영상 밖에 기억에 안 남는 거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적절한 예를 들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나를 기억해 달라’는 그 말을 다시 듣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준비했습니다. 저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 겁니다. 또한 우리의 말이어야 하는 겁니다.

그게 예배 중에 죽음을 기억하는 이유일겁니다. 죽음을 사는 이들이 그렇게 말하는 소리를 듣는 겁니다. 우리도 함께 서기로 마음먹고, 누구의 머리카락도 상하지 않기를 간절히 비는 겁니다. 거기에 함께 선 우리를 기억해 달라고 말하는 겁니다. 그렇게 끝에 선 이들을, 서로를 기억하는 겁니다. 빈 왕좌가 아니라, 거기에 선 예수를 보는 겁니다. 그렇게 이 시간의 끝에서 다시 올 나라를 기다립니다. 그게 신앙입니다. 그걸 우리는 기대와 소망이라고 부릅니다.



2019년 11월 24일 [함께.걷는.교회.] 설교전문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