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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방망이 Dec 27. 2019

말하고 노래하게 하라

누가복음 1장 26-38절

좋으신 하나님의 평화가 우리에게 있기를 간절히 빕니다.


옛날부터 전해지는 우리나라 동화 중에 ‘장화홍련’이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언제, 누가 지은 이야기인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아마도 조선시대에 전해지는 이야기가 아닐까 싶은데요. 장화와 홍련, 두 자매의 억울한 죽음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내용을 간단하게 말하면 이렇습니다. 어느 날 장화와 홍련의 어머니가 죽게 됩니다. 그러자 아버지는 다시 혼인을 합니다. 세월이 지나 새엄마는 세 아들을 낳게 됩니다만… 여전히 남편은 장화와 홍련에게만 사랑을 쏟습니다. 새엄마는 점점 장화와 홍련을 미워하게 되죠. 결국 새엄마는 음모를 꾸미게 됩니다. 어느 날 밤에 피로 범벅이 된 죽은 쥐의 껍질을, 잠들어 있던 장화의 다리 밑에 놔둡니다. 다음 날 아침, 새엄마는 장화가 부정한 짓을 해서 임신을 했고, 피가 묻은 쥐 가죽을 유산된 아이라고 아버지를 속여서 장화에게 누명을 씌웁니다. 장화는 어떻게 됐을까요? 제대로 된 변명 한 마디 해보지 못하고, 우물에 빠뜨려 죽임을 당합니다. 관아에 가서 법적인 절차를 밟아서 처리한 게 아니라, 관습법에 따라 사적으로 사형을 집행한 겁니다. 딸을 그렇게 사랑하던 아빠는 별다른 반응 없이 딸을 죽게 놔둡니다. 즉, 어떤 여성이 혼인하지 않은 남자와 부정을 저지르고 아이를 갖게 되기라도 하면 그냥 죽여도 됐던 겁니다. 언니의 억울한 죽음을 알게 된 동생 홍련은 언니를 따라 자결을 하고, 두 자매는 귀신이 되어 구천을 떠돌다가 마을 원님에게 나타나 자신들의 원한을 갚아달라고 했다는 그런 이야기입니다.


전래동화가 흔히 그렇듯, 권선징악으로 결론이 내려지는 뻔한 이야기 같지만, 사실 이 이야기 속에는 우리가 알지 못했던 복잡한 이야기가 숨어 있습니다..만 지금은 그냥 넘어가겠습니다. 결론만 말씀 드리면 ‘장화홍련’은 가부장제도의 폐해를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꼬집는 이야기이기도 하고, 당시 여성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삶을 살았는지를 보여주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왜 그런지 궁금하신 분들은 예배 후에  찾아오시면 따로 이야기를 나누겠습니다.




내용은 조금 다르지만, 오늘 우리는 성경 속에서 뜻하지 않게 임신한 어린 여성을 만나게 됩니다. 예수님이 어떻게 이 땅에 오게 되었는지를 들려주는 이야기 중 하나입니다. 우리에게 너무 친숙한 이야기죠. 흔히 사도신경에서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에 해당되는 부분입니다.


어느 날 밤, 천사 가브리엘이 마리아에게 나타나 깜짝 놀랄 소식을 들려줍니다. 그 내용을 짧게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마리아가 한 아기를 낳게 될 텐데, 그 아기가 온 세상을 구원할 구주가 되신다는 겁니다. 이 이야기는 예수님의 탄생에 관한 다양 버전 중에 하나입니다. 성서는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를 여러 가지 버전으로 들려줍니다. 우선 천사 가브리엘이 마리아에게 직접 소식을 전해줬다고 하는 버전, 또는 이름 모를 천사가 요셉의 꿈에 나타나 소식을 전해줬다고 하는 버전, 또 이 소식이 이방박사들에게 전해졌다고 하는 버전과 들판의 목자들에게 전해졌다고 하는 버전도 있습니다. 마가복음과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를 아예 다루지 않습니다. 이렇듯 다양한 이야기를 애써 하나로 만들 필요는 없습니다. 각 복음서가 각각의 이야기를 통해서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왜 이방인 점성술사들에게 그 소식이 전해졌는지, 왜 피곤해 졸고 있던 도시 바깥의 목자들에게 천사들이 찾아 왔는지, 왜 마리아라는 이름의 비루하고 어린 여성에게 천사가 가브리엘이 찾아왔다고 말하는지 각각의 이유가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다른 버전의 이야기들을 억지로 순서에 맞게 끼워 맞추려고 할 필요는 없습니다. 당연하게도 오늘은 마리아라는 흔하디 흔한 이름을 가진 나이 어린 여성에게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여기 계신 분들은 성탄절하면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시나요? 저는 여전히 따뜻하고 아름다운 이미지가 먼저 떠오릅니다. 아마도 어렸을 때부터 매년 봐왔던 성탄절 연극이나, 그림들이 제게 성탄에 관한 따뜻한 이미지를 심어준 것 같습니다.  


우리에게 성탄은 언제나 아름답고 따뜻한 이미지로 기억됩니다. 밤 하늘에는 무수한 별들이 아름답게 반짝이고, 그 별 빛 아래서 목자들은 평화롭게 양떼들을 돌보고, 값비싼 선물을 가득 실은 낙타 등에 올라탄 동방박사들 역시 별 빛을 보고 한가롭고, 기쁜 마음으로 유대로 베들레헴으로 향합니다. 그 중에서도 핵심은 마구간에서 아기를 안고 있는 마리아입니다. 더 이상은 자비로울 수 없는 눈빛과 표정으로 한 아기를 바라보고 있는 엄마 마리아가 있습니다. 왠지 모르지만 아기를 안고 있는 마리아 주변은 빛으로 가득합니다. 그 위를 보니 날개 달린 천사들도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마치 수호신처럼 아기를 지켜보고 있습니다. 이런 모든 장면이 조화를 이뤄서 따스하면서도 포근한 영상을 우리에게 전해줍니다. 그리고 거기에 한 가지가 더해집니다. 그것은 불가능이 없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남성과 잠을 잔 적이 없는데도 아이를 갖게 된 놀라운 하나님의 능력이 대미를 장식합니다. 그렇다 보니 성탄절마다 자주 반복되는 설교 내용 중 하나가 불가능이 없는 하나님이고, 마리아는 하나님이 베푼 능력의 최고의 수혜자가 됩니다. 누구도 받지 못한 특별한 복을 받은 여인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요? 이 본문을 정말 그렇게만 읽어도 괜찮은 걸까요?


우리에게 익숙한 관습적 읽기를 잠시 내려놓고, 이 이야기를 다시 읽어보면 어떨까요? 이 이야기는 정말 아름다움과 포근함과 하나님의 능력으로 가득 찬 이야기일까요? 글쎄요.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쩌면 누군가의 입장에서는 당혹스러움과 두려움과 어쩌면 억울함으로 뒤범벅된 이야기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성경에 따르면 당시 마리아는 요셉과 결혼하기로 되어 있었습니다. 학자들에 따르면, 당시 결혼 상대자가 결정되어 있으면서, 아직 혼인을 치르지 않은 여성의 나이는 13세쯤이라고 합니다. 굉장히 앳된 나이죠. 뭐- 그렇게 놀랄 일도 아니죠. 우리나라라고 크게 차이가 있었던 것은 아니니까요. 충분히 생각할 수 있는 일입니다.


물론 지금의 열 세 살과는 여러모로 달랐을 겁니다. 당시에는 오늘날처럼 어린이나 청소년이란 개념이 없었고, 일정 나이만 지나면 곧바로 노동에 투입 되었으니까요. 또한 마리아라는 이름은 그녀의 사회적 지위를 보여주기도 합니다. 마리아라는 이름은 낮은 계층에서 태어난 여자아이에게 가장 많이 붙는 이름이었으니까요. 그런 마리아가 어느 날 느닷없는 임신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보수적인 유대사회에서 말이죠. 간음한 여성을 바닥에 던져두고 돌로 쳐서 죽이는 일이 합법화된 사회였습니다. 사적인 사형이 가능한 사회였던 겁니다.


요즘은 어떤가요? 물론 마리아가 살던 유대사회와 비교할 수 없이 좋아졌습니다만, 막상 미혼모를 향한 시선이 크게 다른지는 모르겠습니다. 조선시대나 유대사회처럼 곧장 죽이려고 들지는 않지만, 시선 살해는 여전합니다. 나이가 조금만 어린 여성이 산부인과만 가도 따가운 눈총과 불필요한 의심을 받기도 합니다. 낙태에 관한 윤리에 대해서는 쉽게 떠들어 대지만, 임신을 하게 된 과정에 대해서도, 혹은 그 이후에 엄마와 아이의 삶에 대해서는 누구 하나 책임지려 하지 않습니다. 자신과 무관하다고 생각하는 정의를 외치는 일은 놀라울 정도로 쉽습니다.


이쯤 되면, 묻고 싶어집니다. 남성과 여성을 불문하고, 결혼 전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임신하게 된다면, 그것을 영광과 축복으로 여기고 기꺼이 그렇게 하겠다는 사람이 얼마나 될지 말입니다. 어떤 결과가 나올까요?


장화홍련에 나오는 장화는 임신을 했다는 이유로 한 마디 변명도 하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그래서 구천을 떠도는 귀신이 되었죠. 마리아 때는 달랐을까요? 죽는 겁니다. 변명도, 반항도 못하고, 찍소리 못하고 죽는 겁니다. 마리아가 놓인 상황은 죽음입니다. 이런 상황이 어떻게 아름답고 복된 상황일 수 있는지 저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누가복음은 왜 마리아를 중심으로 이 이야기를 전할까요? 누가복음 전체에 흐르는 분위기를 통해서 그 까닭을 추측해 보는 겁니다.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억눌린 자에게 해방을 전하는 예수를 누가는 전합니다. 누가복음은 다른 복음서들에 비해서도 바깥에 있는 이들을 안으로 초청하는데 관심이 많습니다. 1장 후반부에 나오는 마리아의 노래 역시 그렇습니다. 마리아는 역전을 노래합니다. 부한 사람들을 빈손으로 돌려보내시고, 굶주린 사람들을 배부르게 하신 하나님, 왕들을 끌어내리고 비천한 자를 높이시는 하나님을 노래합니다. 말 할 수 없는 마리아들에게서 노래가 흘러 나오게 된 것입니다.


그런 관점으로 이 이야기를 읽어보는 겁니다. 조금 다른 방식으로, 범위를 더 넓혀서 읽어보는 겁니다. 한 사람의 마리아가 아니라 그 시간을 살고 있는, 그리고 오늘을 살고 있는 수많은 마리아의 이야기로 읽어보는 겁니다. 그 땅을 사는 수많은 마리아들이 노래하게 한 이야기, 말 못하는 입을 열어 말하게 하는 이야기로 읽어보는 겁니다. 이 이야기를 단순히 ‘하나님 능력 짱짱짱’으로만 읽지 않고, 이 땅에 마리아들이 잉태한 죽음이 생명이 될 것이라는 약속으로 읽는 겁니다. 말 못하고 죽음을 맞이할 수 밖에 없는 장화와 홍련이 죽지 않게 될 것이라는 약속으로 읽는 겁니다. 하나님의 구원이,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간 남성들을 통해 이 땅에 오는 게 아니라, 마리아들에게 품어진, 그리고 그 속에서 바뀐 생명을 통해서 움트게 될 것이라는 하늘의 약속으로 읽어보는 것입니다. 더 이상 처녀 귀신의 억울한 이야기가, 그들의 말 못하는 죽음이 이 사회에 떠돌지 않도록 하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으로 읽는 것입니다. 그때 비로소 성탄은 마리아에게 복 있는 이야기가 되는 게 아닐까요?




여러 차례 말씀 드린 것처럼, 대림절 동안 수요일마다 ‘KTX 여성 승무원 해고 노동자들의 복직 투쟁’을 위한 기도회에 다녀왔습니다. 저는 승무원 앞에 ‘여성’이라는 말을 붙이는 것을 싫어하는데요. 여기서는 분명히 붙여야 할 이유가 있습니다. 여성이라서 더 쉽게 해고 당했기 때문입니다. 승객들의 안전을 책임지는 역할로 자부심을 갖고 취직한 그들이, 여성이기 때문에 승객들의 안전과는 무관하다는 이유로 해고되었습니다. 여성이기 더 쉽게 해고 되었고, 여성이기 때문에 복직이 안 되는 겁니다.


지난 수요일을 끝으로 네 번의 기도회를 마쳤는데요. 25일 11시에 성탄 예배로 한 차례 더 있습니다. 가급적 그 곳에도 갈 생각입니다. 그런 자리가 있으면 가능한 참석하려는 이유가 몇 가지 있는데요. 우선은 머릿수를 채우려는 것입니다. 그런 곳일수록 쪽수가 힘이라는 것을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른 이유도 있는데 그것은 조금 후에 나누도록 하구요. 우선 그곳에 가면 현장의 증언이라는 시간이 있습니다. 부당해고를 당한 KTX 여승무원들이 직접 말하는 시간입니다. 누가 하느냐에 따라 분위기가 다르기는 하지만, 어떤 과정을 통해 이 자리에 있게 되었는지, 현재 상황은 어떤지, 또 얼마나 큰 어려움을 겪었는지를 떨리는 목소리로 직접 말하는 시간입니다. 그들의 말을 듣고 있으면, 거기서 함께 찬양을 하고 있으면 복음이라는 제게서 살아나는 것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평소에는 온갖 잡다한 이론들을 읽으며 세상 없이 회의적이 되었다가도, 10년이 넘도록 복직을 기다리며 함께 해달라고 말하는 그들의 목소리를 듣고, 함께 노래하면 대림이라는 말이, 복음이라는 말이 너무나 새삼스럽게, 제게서 꿈틀대는 것을 느낍니다.


마리아가 입을 열어 찬미의 노래를 한 것처럼, 저는 이 땅에 수많은 마리아가 입을 열어 말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말 한 마디 못하고 죽은 ‘장화’들의 소리를 우리가 듣기를 바랍니다.


저는 이 본문을 ‘하나님의 능력 짱짱짱’으로 읽거나 너무나 쉽게 ‘마리아에게 임한 축복’으로 읽는 것에 쉽게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마리아 얼마나 좋겠어.’, ‘마리아 얼마나 복 받았어. 예수님을 임신했으니 말이야’ 같은 말들이 그들의 입을 열지 못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읽기가 이 땅의 마리아들을 입다물고 그냥 임신해야 하는 자로, 그냥 순종하고 감사해야 하는 대상으로 만들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 땅에 마리아들이, 복음 때문에 말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들의 찬양과 말을 우리가 듣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들이 잉태했던 죽음이 복음 때문에 생명으로 바뀌게 되기를, 그들이 입을 열어 말하고, 노래하기 되기를 바랍니다.

그런 곳에 가는 두 번째 이유를 말씀 드리는 것으로 설교를 마치려고 합니다. 그런 현장에 가는 두 번째 이유는 그 곳에서 몸을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실체를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여기서 나누는 말은 한계가 있습니다. 실체가 없기 때문입니다. 동양시멘트니 성소수자니, KTX니 해도 우리에게는 실체 없는 관념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그 곳에 가면, 그들에게 몸이 있고, 얼굴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손을 맞잡고 서로 안아야 할 대상이라는 것을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성탄은 몸이 되신 하나님에 관한 일입니다. 성탄은 거룩함이 말로, 관념으로 머물지 않고 실체가 된 사건이고, 실체 속으로 직접 뚫고 들어온 사건입니다. 부담을 드리고 싶지는 않지만, 묻고 싶습니다. 여러분은 어디로 가고자 하십니까? 혹 우리는 성탄을 기뻐하고, 축하하고, 즐김으로써, 실체를 피해 관념으로 달아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지난 수요일 KTX에 갔다가 OOO 부장님을 만났습니다. 그런데 부장님이 다른 분을 반강제로 끌고 와서 저에게 인사를 시키는 겁니다. 저도 그 분은 약간은 난감해하면서 인사를 나눴습니다. 그 분이 누구였냐면, 통통톡 실무자 였습니다. 아마 상담을 하는 분이 아닐까 싶습니다. 우연치 않게 [함께.걷는.교회.]가 하는 헌금의 몸을 만나게 된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우리는 가끔 의도치 않게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나는 이곳에 있을 테니, 그들이 우리에게 와서 설명해야 합니다.” 라고 말이죠. 내년에도 우리에게 헌금을 받고자 한다면, 통통톡이 적어도 우리에게 자신들을 설명해야 한다고 말이죠. 은연중에 이렇게 말하는 셈은 아닐까요? ’우리가 헌금을 해야 한다고? 그래? 그럼 우리한테 와서 너희들의 실체를 보여주겠어? 우리가 당신들을 왜 도와야 하는지, 어떻게 우리가 너희와 함께 할 수 있을지 몸을 한번 보여주겠어?’라고 말이죠. 그 몸 속으로 우리가 들어가려는 것 없이 말입니다.


성탄은 하나님이 이 세계 속으로 들어온 사건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복음이라고 부릅니다. 말씀이 몸이 된 사건 그것이 핵심이죠. 우리에게 관념으로 떠 있는 많은 말들이 있습니다. 동양시멘트니, KTX 여승무원이니, 성소수자니 하는 말이 그렇습니다. 꼭 그들이 아니더라도, 가난한 자들, 억눌린 자들이 우리에게 관념으로만 존재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이 자리에 앉아서, 그들이 대체 누구냐고 묻기만 하는 것은 어쩌면 우리의 게으름인지도 모릅니다. 예수께서 몸이 되어 오신 날, 여러분은 어디에 계실 예정인가요. 몸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몸이 되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온종일 세트로 함께 할 예정입니다. 그 중에서도 하이디스에서 해고당한 이들은 성탄인 동시에 투쟁한지 정확하게 1000일이 되는 날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OOO 부장님에게 부탁을 했다는 겁니다. 투쟁 1000일 겸 성탄인데, 그냥 보내기가 서운해서 기도회를 해주면 안되겠냐고 말이죠. 저는 가려고 하는데요. 혹시 가게 된다면, 춥고 썰렁할지도 모릅니다. 가장 사람이 없는 곳에 가려는 거라서요. 어느 정도의 불편과 어색함은 각오해야 할지도 모르구요. 막상 가더라도 별별 의심과 회의가 들지도 모릅니다. 무력하다 하는 생각도요. 그런데 저는 그래서 가는 겁니다. 함께 무력하자고. 말이죠. 그래서 오시면 너무 감사하겠지만, 미안해하지는 않을 생각입니다. 좀 고생하시더라도요. 우리가 편해서 잊게 된 몸이 있다는 것을 깨닫는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이 무엇인지를 다시 한 번 곱씹을 수 있는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2017년 12월 24일 [함께.걷는.교회.] 설교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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